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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그리운 여섯 남매

정현숙·LA

오래전 '육 남매'라는 TV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집도 육 남매인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 당시 오륙 남매는 흔히 볼 수 있는 자녀 숫자라고 생각했다.

육 남매가 함께 어울려 자란 것은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평생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절약에 철저하셨던 어머니 덕에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의 내 별명은 무말랭이 오이장아찌였다. 매일의 도시락에 거의 그 반찬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엌을 들여다보면 노란 양은 도시락이 나란히 쌓여있었고 엄마는 매일 새벽부터 반찬을 만들어 넣어주기 바빴다. 동생들의 투정으로 가끔 계란말이와 멸치볶음이 들어가긴 했지만 기본 밑반찬은 늘 장아찌였다. 그 많은 도시락에 늘 색다른 반찬을 넣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항상 꿀맛이었다.

언젠가 둥근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우리들을 보시고 "콩이 콩깍지 속에 들어있을 때가 좋지. 잘 익어서 모두 튀어나가 제 갈 길로 가면 다 헤어진단다"라고 하셨다. 한 명씩 짝지어 떠나고 손주들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70년대 초 선발대로 미국에 온 셋째딸 덕에 여섯 남매 모두 미국으로 건너와 터를 잡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빠도 여섯 남매는 일 년에 몇 번씩은 꼭 모였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순서가 있음을 확인하려 했고 저절로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잘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러 잘 익은 콩깍지 속의 콩처럼 더 멀리 흩어졌다. 넷째는 라스베이거스로, 여섯째 막내는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날아갔다.

첫째 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는 육 남매가 모일 수는 없지만 순서대로 나란히 찍은 육 남매의 사진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함께 즐기던 시절이 떠오르고 몹시 그리워진다. 사진 한 장 지갑에 넣고 다니며 가끔 꺼내보며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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