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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와 손 잡았다…악몽의 시작이었다"

정리=정구현 기자
정리=정구현 기자

[LA중앙일보] 발행 2017/05/17 미주판 4면 기사입력 2017/05/16 21:08

'김경준의 주홍글씨'BBK를 말한다 #2

김경준이 본사 스튜디오에서 기자에게 99년 당시 MB와의 첫만남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김경준이 본사 스튜디오에서 기자에게 99년 당시 MB와의 첫만남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97년 도쿄서 한국 스카우트
IMF 위기속 270억 순익 올려
24억 번 '투자 귀재' 유명세

고위층 '만나자' 요청 쇄도
'MB 집사' 김백준 먼저 전화
"대단한 분이 뵙고 싶어한다"
99년초 영포빌딩서 MB대면


1997년 1월경 도쿄.

전화는 느닷없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전화를 건 헤드헌터는 한국의 신생 증권회사가 자본 운용 책임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난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 도쿄 지점에서 자본 운용 전문가인 '프랍트레이더(proprietary trader)'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한 회사는 환은스미스바니(이하 환은)였다. 한국의 외환은행과 미국 증권업계 2위인 스미스바니투자은행이 투자한 합작회사였다.

김백준

김백준

날 선택한 이유는 그 당시 일본과 한국 증권업계의 상황 때문이다. 일본에 주재한 미국계 투자은행들은 최고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세계 유수 투자은행의 CEO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실력을 쌓고 승진했다. 그래서 투자은행가들에게 일본은 '성공 보증 근무지'로 꼽혔다. 나도 그 기회를 잡았다.

1996년 한국도 일본의 증권시장을 모델로 주가지수 선물거래 시장을 개설했다. 파생상품을 처음 거래하게 된 한국에서는 일본 근무 경험이 있는 한국계 프랍 트레이더가 필요했다. 당시 도쿄에 주재한 외국계 투자은행가 중 유일한 한국계인 나는 그 조건에 맞는 적격자였다.

환은 측의 스카우트 제의는 파격적이었다. 연봉 20만 달러에 집 차 별도의 업무비 지급과 이익의 20%까지 보너스로 주겠다 했다. 당시 증권업계에서 이익 배분을 보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민 끝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제 2의 일본 파생상품 시장을 현실화시키자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97년 3월 한국땅을 밟았다. 5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사실상 처음'으로 고국을 다시 찾게 됐다. 굳이 사실상 처음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이후 BBK 사건 조사과정에서 95년 내가 입국한 기록이 문제됐기 때문이다. 그해 난 홍콩을 가던 중 한국을 경유했다. 당시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을 문제 삼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어 밝혀둔다.

한국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이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으면서다. 한국으로 간 그해 11월 IMF가 터졌다. 증권가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금융위기가 곧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금융계 전체에 대규모 감원의 칼바람이 몰아쳤지만 난 반대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해 200억의 펀드로 270억의 순익을 거둬 환은스미스바니 전세계 지점 중 최고 수익률을 올렸다. 연봉과 실적 보너스를 합해 20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원화로 24억이 넘는다. 그때 내 실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난 '24억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매일경제 99년 2월12일자 17면

TV 출연에 강의 요청도 밀려들었다. 다들 성공 비결을 알고 싶어했다. 내겐 어렵지 않았다. 한국의 투자전문가들이 이제 갓 걸음마를 할 때 난 뛰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금리가 10~25%까지 널뛰기를 할 때였다. 파생상품 거래는 시장이 불안정할 때 오히려 수익률이 높다. 이듬해에도 고수익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했다. 한때 한국 전체 선물 거래의 80%가 내 손을 거쳐 이뤄졌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난 한국 근무생활에 서서히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시장 자체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터라 거래 하나하나를 완성하기가 힘들어졌다.

한번은 해외 헤지펀드와 5억 달러 스왑거래를 한 적 있다. 당장 그 회사로 3억 달러를 보내야 했는데 송금을 못해 발을 동동 굴린 적이 있다. 그날 한국 전체 외환 보유액이 3억 달러가 안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국 기업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모 은행에서 근무하는 와튼스쿨 동문을 찾아가서 겪은 일이다. 동문은 부장이었다. 부서마다 하루종일 다른 동료가 무엇을 하는지 감시해서 보고서를 올리는 직원들이 있었다. 행장에게 직접 보고서를 매일 올린다고 했다. 도저히 창의적인 발상이 나올 수 없는 근무환경이었다.

한국에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즈음 홍콩의 한 재벌기업 총수가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그랬다면 BBK도 없었을 것이고 13년간 교도소에 갇힐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99년 초로 기억한다. 역시 느닷없는 전화였다.

"나 김백준이라고 합니다. 대단하신 분이 한번 만나자고 하시는데 어떻습니까?"

당시 한창 유명세를 얻던 내게 만나자는 실력가들이 많았다. 정치인 대기업 회장 등등 김백준의 제의 역시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보통 저쪽이 '대단한 분'이라고 하면 이쪽에서는 누군지 묻지 않는 게 그런 대화에서의 불문율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백준은 나에 대해 사전에 검증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근무한 환은스미스바니의 감사가 외환은행 쪽 직원이었다. 외환은행 런던 지점장 출신이었던 김백준이 그 직원에게 내 실적을 다룬 보도의 사실 여부를 물어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백준의 비서가 이틀 뒤 오전 7시30분에 서초동 영포빌딩으로 가면 그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알려줬다.

춥고 쌀쌀한 출근시간에 강남의 길은 번잡했다. 번듯한 고층빌딩이라 생각했던 영포빌딩은 실망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화장실이 보이는 작은 건물이었다. 약속 장소인 1층 사무실 입구에는 '동아시아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에 비서인 듯한 여직원 한 명만 있을 뿐 다른 책상들은 다 비어있었다. 뒤쪽 큰 방으로 따라갔고 여직원이 문을 열어줬다.

정면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활짝 웃으며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이명박입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BBK 사건수첩

프랍 트레이더

금융회사 자기자본을 운용하는 트레이더. 개인의 돈을 운용하는 펀드 매니저와 구별된다. 월가의 엘리트중에서도 엘리트들이다. 소설가 톰 울프는 1987년 발표한 '허영의 불꽃'에서 프랍 트레이더를 '우주의 지배자(Master of the Universe)'라고 불렀다.

김백준

1940년 전북 출생이다. MB의 최측근으로 '집사'로 불린다.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2년 선배다. 외환은행 근무시절 1976년 현대종합금융으로 스카우트되면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인 MB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부터 지금까지 40년을 함께 일했다. MB가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막아내 'MB의 수호신'으로도 통한다. 특히 BBK 사건이 터지자 MB측 소송 대리인으로 나서 미 연방 법원에 김경준의 송환 연기를 신청하기도 했다. MB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총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해 퇴임까지 5년간 MB 옆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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