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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간 운영한 클리닉 문닫았어요" 올드타이머 치과의사 오흥조 박사

초창기 미국 치과면허 최단 취득
한인타운 한인 치과의 배출 공로
봉사활동으로 사회에 기여할 터

올림픽가에서 지난 42년간 치과진료를 했던 '오흥조치과(Dr. Oh's Dentistry·2860 W. Olympic Blvd. LA)'가 지난 6월30일을 기해서 문을 닫았다. 한인사회 치과계의 올드타이머 오흥조 원장을 만났다.

오흥조 박사에게 '오흥조 치과'는 2번째 개업이다. 1975년 미국에 오기 전에 종로 화신백화점 옆에 개업했던 곳이 첫 클리닉. 그래서 오박사가 미국에 문을 연 이 '오흥조 치과'가 2호점이다. 42년간 옆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환자만 봐왔다. 그래서 오박사의 클리닉에 쌓여있는 환자 차트만 1만개다. 차트 하나당 1명에서 5명까지 수록돼 있으니 절반만 따져봐도 족히 2만5000명의 치과 기록이 보존돼 있다.

오흥조 치과는 1976년 7월1일에 문을 열었다. 한인타운의 형성이 시작돼 가던 시점이었고 56학번인 오박사도 40세가 되던 때였다.

"막상 미국에 와서 정착을 생각하고 치과의사를 하려고 하는데 미국 면허를 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오 박사에게 미국에 와서 살자고 제안한 부친 오재인(2015년 103세로 작고) 박사도 한국에서 서울대 치대교수, 대한 악안면 성형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했지만 미국에 와서는 면허를 따지 못했다. 그래서 오재인 박사는 다운타운에서 봉제공장을 경영했다.

오흥조 박사도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에서 개업까지 했던 치과의사였지만 미국치과의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치과 면허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UCLA익스텐션 코스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게 1975년 4월의 일이다.

당시 남가주에는 이미 한국에서 이민온 치과의사들이 있었지만 미국의 엄격한 치과면허제도 때문에 시험을 치러야 했고 개인 능력에 따라서는 길게 5~6년간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황당한 상황도 많았다. 선후배 동료 모두 치과의사로 남들은 아주 부러워하는 전문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의사를 못하니 생계가 막연해질 정도에 이르렀고 특히 부인들의 고생이 눈물겨울 정도였다.

오 박사는 무려 16과목이나 되는 치과면허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선후배 동료 30명을 모았다. 그리고 2주간 한과목에 2명씩 요점 정리를 해오게 했다.

이런 스터디그룹 덕에 그해 8월에 바로 시험에 들어갔다. 타인종을 포함한 응시자는 모두 800여 명. 오 박사는 요약 정리가 잘된 족보덕에 셋째날까지 치르는 필기시험을 단 한번에 통과했고 이어서 넷째날 실기시험까지 합격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의료기구를 빌려서 실기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여섯째날 시험은 진짜 환자를 2명 데리고 가야 했는데 전 시험들을 너무 일사천리로 패스하는 바람에 미처 시험용 환자를 못구해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그 다음 시험에서 수월해졌고 오 박사는 10개월만인 1976년 2월에 시험을 통과해 '천재'로 통하게 됐다. 그리고 오 박사는 수년간 치과 면허시험 대비반의 명강사가 됐다. 그의 족집게 덕분에 1년에 1~2명 정도 취득하던 한인들의 치과면허시험 통과자가 급증했다. 막 태동하던 한인타운에 말이 통하는 적당한 숫자의 치과의사가 조달된 셈이다.

그는 "한인 치과의사들이 개업을 하면서 한인 환자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됐다"며 "덕분에 한인커뮤니티가 성장하는데 일조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980년엔 부친인 오재인 박사가 세우고 초대회장을 역임했던 재미한인치과협회에 제6대 회장이 됐다. 하지만 회장이 되자 넘겨받은 협회 기금은 단 50달러였다.

이미 면허시험을 위해서 공부방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었던 오흥조 박사는 협회차원에서 보수교육을 시작했다. 치과를 비롯한 의료전문인들은 매년 보수교육을 통해서 면허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한인 치과의사들에게 당시까지는 빛좋은 개살구였다. 하지만 오박사는 협회가 보수교육을 주관하게 했고 덕분에 기금을 모았고 회원들에게 최신 기술도 가르쳐 경쟁력이 높은 한인 치과의사로 거듭나는데 도움을 줬다. 협회는 재정적 안정성 덕분에 회원들이 환자 치료에만 신경쓸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됐다.

그런데 이렇게 원조, 역사와 전통을 가진 치과의 문을 닫는 이유가 무엇일까. 후배에게 통째로 넘길 수도 있는데 말이다.

"5년 전에 문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건물과 땅도 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인수한 사람이 당장 개발에 나서지 않고 계속 운영하라고 해서 세를 내면서 운영한 것이 5년이나 됐다.

오 박사는 "날 보고 내게 온 환자들을 다른 의사에게 넘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며 "치료를 끝낸 환자들에게 6개월 전부터 문을 닫는다고 다른 곳에 보내왔다. 다음 치료는 다른 곳에 가라고 부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면허도 은퇴한다. 다만 차트는 5년간 오박사가 보관한다. 치과 클리닉은 결국 오 박사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누구에게 넘기고 파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오 박사는 "자녀들이 잘자라준 것에 감사한다. 대학도 모두 졸업했고 재정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며 "클리닉을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이런 고마움을 봉사로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또 "세상 일에는 모두 때가 있다. 거의 60년을 병원에서 일했다"며 "앞으로 펼쳐질 다른 인생이 기대된다. 질질 끌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오 박사는 부인 에바씨와 2남1녀가 있다. 장녀 수지씨는 변호사, 장남 잔 오씨는 신장외과 전문의, 차남 조셉 오씨는 주류 광고회사 서부지역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큰 며느리 티나씨도 방사선과 전문의다.

"작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 또 좋은 친구를 많이 갖는 인생을 살도록 합시다."

▶오흥조 =양정고 졸업, 서울대 치대졸업, 서울적십자병원 인턴, 레지던트, 재미 한인스쿠버협회 초대회장, 남가주 산악회 고문,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 에베레스트산 등반대장(티벳), 서울대학교 남가주 동창회 회장, 재미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역임. 2009년 2월8일 부부 사진전시회, 2006년 제8회 관악대상(해외부문)


장병희 기자 chang.byungh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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