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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카페]류명수 시인 “시조는 내 삶에 대한 고백성사”

“이 시조는 어떠세요?” “이 대목에 소리가 나을까요 울림이 나을까요?” 같은 시조를 읽고 또 읽고, 인터뷰가 끝나고도 몇 번이고 전화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끝없이 고민하는 시인에게 ‘꺼지지 않을 열정’을 직감할 수 있었다. 류명수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화가다. 이화여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해 1982년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미대에서 도예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력을 보면 틀림없는 화가다. 이런 그녀에게 시인의 타이틀이 붙게 된 계기는 또 뭘까? 류 시인은 “시집가는 딸에게 평생에 남을 선물을 주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며 “그렇게 쓴 글 중 하나를 우연히 공모전에 보냈는데 당선하게 돼 얼떨결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됐다”고 전했다. 일상에서 어느 날 덩그러니 놓인 차탁을 보며 ‘나무를 매만져 내 손에서 탄생하는 차탁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열정을 담은 작품 ‘차탁’이 2013년 워싱턴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학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처녀작을 포함, 모두 73편의 시조를 엮고 표지에 들어갈 제목을 서예로 직접 쓰고 꽃과 구름을 돌에 새긴 각으로 디자인해 완벽히 엄마의 시·서·화로 꾸민 시조집 『꽃구름에 머물다』를 딸 결혼식 날 선물했다. 세 가지 일치를 이뤘으니 ‘삼절 화가’로 한 번쯤 칭하고 싶다 하니, 류 시인은 “제 호가 본디풀이에요. 마치 야생초가 기다리던 햇빛을 받고 영롱하게 빛날 때 더 이상 하찮은 풀이 아닌 풀의 본디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불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쓰고 또 그리며 제 삶의 과정에서 노력할 뿐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며 겸손함을 앞세운다. 그런데 왜 하필 시조일까? 흔치 않은 장르에 또 한 번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이에 대해 류 시인은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가요보다 민요를, 서양화보다 동양화를 좋아했던 ‘전통 애호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그림을 글’로 또는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다 보니,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가 일본에서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온 데 대한 안도의 마음을 담은 ‘세한도, 추사의 그림을 보다’와 같은 그림과 관련된 시조 작품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최근에는 아직도 일본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의 화가 안견의 작품 ‘몽유도원도’를 생각하며 가슴 아픈 마음을 담은 작품 ‘꿈으로 만나다-몽유도원도’를 쓰기도 했다. 류 시인은 “제게 글은 그림을 되새겨 보고 정리해 시조라는 틀로 재해석하는 과정이자, 또 시조를 통해 제가 살아온 삶을 고백성사처럼 되돌아보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씨앗과 같은 존재”라고 털어놓는다. 인터뷰를 마치며 고운 서울말에, 마치 시골 풍경 가득한 시어 조합의 원천에 끝내 마음을 떼지 못하니 시인은 단언한다. “미술과 문학, 즉 예술을 한다는 건 하나의 감각을 더 키우고 감성을 더 날카롭게 하는 것”이라며 “예술인으로 살아가니 절로 감성이 내 인생을 감싸 안는다”고 전한다. 어느새 싱그러운 잔디가 시화로 펼쳐지며, 시인의 삶이 한 수 시조로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꿈으로 만나다 -몽유도원도 빛나는 강물따라 쪽배 하나 흘러가고 도원동 산빛 좇아 새들이 날아가니 현해탄 검푸른 파도 접은 세월 드러낸다 숲속에 복사꽃 외로운 붉은 노을 꽃망울 떨리는 사연 서린 폭포 가리운 채 고향땅 그리운 향기 너를 안고 오려나 꿈속에 들리는 물소리 새소리 오백 년 서러운 한 돌아올 길 잊었는가 잠자는 조선의 숨결 그대 가슴 깨우리라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5-31

[문학카페] “고향 목화밭이 내 시의 명주”

“나는 표절시인이라고 소개하곤 해요. 친정엄마가 살아온 생을, 독백처럼 중얼거린 언어를 내 시 곳곳에 거름처럼 뿌려 썼거든요.” 첫 대면에 느닷없이 도발적인 표현으로 살짝 기자를 긴장시킨 시인의 남다른 배포에 끌리듯 인터뷰가 시작됐다. 1942년 태생, 첫 등단 2002년. 예순의 문턱을 넘어선 나이에도 당당하게 문학의 길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건 나름 ‘탄탄한 옛 시절의 추억과 인생의 굴곡’이 바탕이 된 숙명적 결과로 받아들인다는 이정자 시인. 이 시인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듯 나 역시 여고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던 덕에 숙명여대 국문학과까지 진학했다”며 “하지만 무역학과로 전과해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다, 나이 마흔이 넘어 빈손으로 이민까지 와 발버둥 치며 살다 보니 어느 날 황혼의 역에 추레하게 서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고 살아온 흔적부터 털어놨다. 그리고 문득 ‘불행은 손톱 밑에서 자라고 행복은 발톱 밑에서 자란다’는 속담이 가슴에 사무치듯 와 닿아 실험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는 속도를 관찰하기까지 했다는 이 시인. “결과는 손톱을 다섯 번 깎는 동안 발톱은 한 번만 깎으면 되더라고요. 손톱 밑으로 자란 고통과 상처로 몸부림치며 억울해하는 사이, 느릿느릿 발톱 밑에서 자라고 있을 그 행복마저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 나를 위한 행복거리를 찾았죠.” 아주 늦지도 아주 빠르지도 않은 인생의 순간에 문학을 도구 삼아 자아를 깨달은 셈이란다. 그렇게 일상에서 성실하게 세탁소를 운영하며 바느질하는 틈틈이 치열하게 글을 써 10년여 만에 71편의 시를 담은 처녀시집 『사막에 핀 풀잎의 노래(2010)』를 발간했다. 이 시인은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 부락이라는 벽촌 산지에서 자라며 목화를 따고,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목화 실을 뽑아 옷을 짓는 길쌈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자란 건 이 시대에 누구도 쉬이 가질 수 없는 귀한 소재이자 추억”이라며 “고단하게 살아가면서 엄마가 평소에 넋두리처럼 뱉은 말들에 비유와 은유를 입힌 게 곧 나의 시어가 되고 시가 됐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엄마 표절시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목화밭에서 시기 놓친 목화를 따며 엄마가 입버릇처럼 들려준 ‘석 새 베에 열두 새 솜씨’라는 말을 바탕으로 쓴 시는 2013년 시 전문지 『미주 시학』이 제정한 ‘미주시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시인은 “어렸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 말을 삶의 교훈으로 새기며 살다 어느 순간 시로 재탄생했다”며 “볼품없는 실로도 솜씨 좋게 바느질하면 훌륭한 옷이 지어진다는 본뜻처럼,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살면 반드시 일어설 수 있다는 내용을 시에 담았다”고 소개했다. 또 시에서 고향과 엄마 외에 추가된 하나의 아련한 주제가 있다면 ‘가족’이다. ‘막무가내 졸라대던 막내 등쌀에 / 벼르고 별러 사준 미제 코코아 한 통 / “내일, 내일 하면서 석 달이었지 엄마” / 지금도 지우지 못한 그 기억 / 돌아보니 미안하구나 아들아 <미제코코아와 눈깔사탕 中>’ 이처럼 넉넉잖은 살림 때문에 코코아 한 통 사주는 데 석 달씩이나 걸려 엄마로서 못내 미안함이 가득한 마음이 보석 같은 가시처럼 드러나는 시도 시집 곳곳에 박혀있다. 그동안 문학 없이 살아가며 아무리 바빠도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이정자 시인. 이 시인은 “비록 남들보다 한발 늦게 시작했지만 아직도 처음 글을 썼던 순간의 설렘과 글 쓰는 사람끼리 어우러진 모임에 나가 대화를 나누며 얻는 보람, 글을 읽는 가운데 느끼는 자신을 살리는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이 든다”고 수줍게 전한다. 이어 “지금까지 시 소재가 유년시절까지의 추억이나 엄마에 대한 그리움, 가족 등 주로 한국에만 의지해 썼던 게 적지 않다”며 “미국에 산 지 33년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 이제는 미국에 널리 퍼져있는 다문화나 천혜의 자연 풍경 등에 관해 한글과 영어로 시를 쓸 수 있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시인으로서 한층 더 무르익은 바람 하나를 밝혔다. 농익은 시인의 명주 같은 삶이, 표절을 허락한 어머니 마음에 곱게 짠 실크빛으로 물든다. 수의 그 해 윤 유월 / 장맛비 질척이던 오후 곱게 다듬질 된 명주 필 펼쳐 놓고 코마개 발싸개까지 / 헐렁한 옷 한 벌 지으시다 처마 끝 낙숫물에 눈빛이 젖어 지문 닳은 손끝이 가늘게 떨렸는데 일흔일곱 눈발 치던 해거름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그 옷 서둘러 꺼내 입고 곱게 잠드셨다 (중략) 억새풀 같은 어머니 손수 짜고 손수 지은 명주 수의 차려 입고 제 집 지어 저를 가둔 고치 속 번데기처럼 참 깊이도 잠드셨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5-17

[문학 카페] “울먹거리는 감동의 전율”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문인이셨는데, 유독 제게 원고료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40여 년 의사로 사명감을 갖고 환자 치유에만 집중했다가, 은퇴하고도 5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시인으로 등단한 서윤석 시인. 돌연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물으니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서 시인은 “알게 모르게 글 쓰는 분위기에 노출돼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며 “같은 동네에 살았던 탓에 국어 선생님 원고료 심부름을 하며 당시 문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가운데 내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대학 갈 즈음 선생님이, 다들 글을 써서 보여주는데 너는 왜 안 보여주니?”라고 물으며 문학의 길로 적극적으로 추천했지만 생업에 유리한 학과로 진학을 결정하며 단숨에 뿌리쳤단다. 그때 국어 선생님이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수필가이면서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였다. 그 황금 손을 뿌리치고 50년을 돌고 돌아 결국에는 문학과 만난 서윤석 시인. 하지만 그는 당시를 후회하지도 또 지금에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환자와 함께 걸어온 그 세월을 ‘문학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고 표현한다. 서 시인은 “보통은 사물이나 풍경, 현상 등을 보면 글을 잘 써 내려 가지만 나는 본 것만이 아닌 내 손끝으로 마음으로 경험하거나 체험하고 느낀 것이 아니면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며 “그야말로 감성의 가장 마지막인 울먹거리는 감동을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학에서 첫 결실 역시 미국서 35년간 의사 노릇을 하며 환자와 부대끼고 보고 느낀 감성을 그대로 옮겨 담은 수필집 『헬로 닥터씨오!(2007)』다. 또 2010년 ‘시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탄생시켜 준 작품 역시, 환자를 만날 때 늘 책상에 두고 설명을 하거나 연구를 위해 쓰다듬었던 두개골에 고마움을 담은 시 ‘고마운 마리아’다. 서 시인은 “의사 생활을 시작할 당시 남미 어딘가에서 온 15~16살 소녀의 두개골을 보며 자신을 희생하고 저와 환자들에게 새로운 등불을 주는 모습에 깊은 생명 경외심을 느꼈다”며 “그래서 더욱 좋은 의사가 되고자 노력했고, 마음으로 다해 환자를 만나다 보니 그들의 아픔에 눈물이 났으며, 그 덕분에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며 또다시 마리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2005년, 서 시인은 평생 의사의 마음만 남기고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12년가량 지난 시간 맘껏 누리지 못한 문학열을 아낌없이 터뜨리며 시집 『고마운 마리아(2011)』과 영문 시집 공저 『I am Homeland(2014)』, 시집 『민들레꽃 피는 우리 집(2015)』을 연이어 발간, 다양한 문인 협회 활동과 함께 서울대 미주 총 동창회보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대 의대 미주동창회보인 시계탑의 편집위원장까지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어떻게 이 폭발적인 열정을 참고 살아왔을까? 서 시인은 “최근 문학에 관련된 활동을 하는 걸 보고 친구들은 원래 제가 문학을 좋아했다고 하더라”며 “과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낭독하고, 이육사의 광야를 좋아했던 모습을 되레 주변에서 기억하는 걸 보고 제 속에 문학적 열정을 새삼 깨닫고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의사를 시인으로’ 이끌어 준 일등공신은 ‘가족’이라는 서윤석 시인. 지금도 글을 쓰면 ‘정통 국문학과 문학을 전공한 아내’가 가장 먼저 읽어 주고, 이민 2세대 딸과 미국인 사위가 읽은 다음, 마지막으로 12살 손녀가 읽어서 좋다는 말이 나와야 비로소 글 한 편이 완성된다며 이를 ‘시인의 행복 계단’이라 칭한다. 그동안 함께 못다 한 시간, 지독히도 사랑하느라 웬만한 한국시는 다 읽고 서양시도 끊임없이 읽으며 최근에는 소설에도 관심이 커졌다는 서 시인. 그는 “작가는 은퇴가 없다는 게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며 “과거 내가 좋은 의사였다고 자부하는 만큼,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의사였을 때의 마음가짐과 똑같이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옳지 못한 건 하지 않으면’ 된다”는 흔들림 없이 뿌리 깊은 소신을 밝힌다. 문득 서윤석이라는 이름에 ‘의사’를 붙여주고 ‘시인’을 붙여준 마리아가 스쳐 간다. 지금도 이 땅 위에서 그리고 서 시인의 책장 안에서 여전히 천 년을 살아가는 마리아처럼, 시인의 뭉글뭉글 피어오른 열정도 분명 천 년 만 년 살아 숨 쉬리라. 고마운 마리아 -너는 이 땅 위에서 천년을 산다 진료실 책장 위에 놓인 소녀의 머리를 본다 멕시코, 산골 어디에 살던 곤잘레스, 마리아를 본다 (중략) 검정 볼펜으로 측두에 선을 그으면 골절을 수긍하던 배심원의 눈빛도 보이고 아파하는 환자의 고통도 보인다 (중략) 마리아를 볼 때면 독한 포르말린 냄새가 눈물을 흘리게 한다 (중략) 열여섯 살 처녀 마리아 너는 늘 어린 나이에 책장 위에서 조용히 살다가 우리가 부르면 선뜻 내려와 모두에게 등불이 된다 고마운 마리아 너는 이 땅 위에서 천년을 산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5-10

[문학 카페]시로 기도하는 목사, 허 권 시인

시인이기 이전에 한 교회를 이끌어가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허 권 시인을 만났다. 인사로 건네받은 소박한 교회 주보에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서 있는가 / 나를 사랑하듯 이웃 사랑하면, 인생이 즐거워짐을 / 어찌하여 오늘도 울며 서 있는가 (중략)’. 허 목사가 직접 쓴 설교 시란다. ‘목사는 왜 시를 쓰게 되었을까’, 아주 쉬울 수도 혹은 의외일 수도 있는 정답을 찾아 시인을 만났다. “몇 년 전 상점에 갔더니 주인이 책을 반쯤 읽다가 페이지를 접어놓은 게 보였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제 책인 거예요. 제 시가 너무 재미있어서 일하며 매일 꼭 한 장씩 읽는다는데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요. 그 날 이후 글 쓰는 사람의 즐거움, 읽어 주는 즐거움을 더욱 깨닫고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 시인의 정체도 모른 채 읽어주던 시집 ‘도피성’은 지난 2003년, 한 선교 단체가 5년간 허 시인이 써 온 설교 시를 모아 선교용으로 전파한 책이다. 이는 지난 14년 동안 읽는 이에게는 즐거움과 깨달음이 되어줬고, 지은 이에게는 용기와 열정이 되어준 셈이다. 목사의 시인 등단. 허 시인의 문학과 인연은 1957년 대학 시절로 거슬러 간다. “연세대 국문학과 출신이에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문학으로 알아본 것도 아마 책을 많이 읽고 인문학을 배웠던 기초 덕이 아닐까”라고 되짚는다.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군수인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다 중학교 2학년 즈음 대구에서 정착, 당시 어머니가 태평로에 책방을 여셨단다. 그때부터 하루에 적어도 1~2권의 책을 읽고 읽다 보니 쓰게 되고, 또 쓰다 보니 배우고 싶어져 결국 국문학과까지 갔다. 어머니는 신학대학 가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를 바라셨고, 아버지는 법학대학 가서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모두 뿌리치고 오로지 본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택한 문학애도, 할 것 많은 젊은 청춘에게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허 시인은 “당시 저희 은사님들이 박두진 시인, 최현배 한글학자, 박영준 소설가 등 쟁쟁한 분이셨다”며 “그 속에서 2년 내내 과 친구들은 다들 현대문학이나 자유문학 등에 추천을 받는데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더라고요. 그 길로 다시는 문학 따위는 돌아보지 않겠다 다짐했죠”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때부터 한 때는 연극에 빠져 살고, 또 한 때는 유창한 불어 실력을 내세워 프랑스에 장학생으로 유학,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영어 강사 등을 하며 어학과 더불어 살았다. 하지만 어학을 하며 결국 영시에 재미를 붙여 미국까지 오게 된 허 시인. “사실 여러 가지를 하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형식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문학이 아닌가 하는 갈증이 늘 있었죠.”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기신 ‘목회자가 되었으면’ 하는 유언을 뿌리칠 수 없어 목사가 됐다. 허 시인은 이를 두고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교회를 창립한지 벌써 19년,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편씩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설교문을 작성해 이번이 986번째 쓴 시”라며 “어느 날 설교문을 가만히 보니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시와 같더라고요.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목사가 되어 제가 좋아하는 시를 쓰고 있으니 하나님은 제게 더없이 큰 행복을 주셨네요.” 이렇게 신의 도움으로 묵혀둔 문학의 갈증을 해소하고, 시인은 지금도 매일 새벽이면 글을 쓴다. 허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빌려 매일 글을 쓰고는 있지만 글 쓰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나만의 좀 더 창조적인 언어가 샘솟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 않은 게, 정말 글을 잘 쓰는 분들을 보면 하나님보다 더한 분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웃음)”라며 “그런데도 심오한 신의 생각을 통해 시 속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게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며 쉬지 않고 죽는 날까지 시를 쓰겠다고 호언장담한다. 내년이면 교회 창립 20주년을 맞는 허 권 목사, 그리고 곧 천 편의 시를 채우게 될 허 권 시인. 오늘도 시인이 간구하는 기도가 시의 선율을 타고 목마른 이의 가슴에 다가선다. 기도 내 기도는 본초 자오선 연민하는, 첫 사랑의 데이트 록키 산정과 맞닿은, 안개 속에서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처럼 베일에 가린 그대와, 이야기를 나눈다 서에서도 만나고, 동에서도 만나고 내 기도는, 내가 듣지 못하는 수천 년 전, 요나의 큰 고기 뱃속에서 육지로 살아나오는 육지로 살아나오는 부활의 음성이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5-03

[문학 카페]인문학의 감성 나그네, 백순 시인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 화창한 봄 하늘이 드높다 싶더니 갑자기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봄이 오나 싶더니 겨울이고, 이 비는 또 봄비가 맞으려나? 봄이 참 안 오네요.” 뭔가 문학적 느낌보다 철학적 느낌에 더욱 강하게 이끌리며 백순 시인과 마주했다. 백 시인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과 미국 세 군데 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 28년간 연방정부 노동성에서 경제학자로 근무한 후 현재까지 대학에서 경제학 및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 세 군데 문학지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이후 수필가로 또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인문학의 문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학문적 여유. 경제학은 대학 전공이니 나이 스물을 넘겨서라지만 문학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백 시인은 “내게 문학의 시초라면 중·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방학이면 세계 문학 전집 하루 한 권 읽는 걸 목표로 삼아 헌책방을 전전했던 게 계기랄 수 있겠다”고 회상한다. “가장 좋아하시는 책이 뭘까요?” 질문이 절로 세계 문학에 꽂혔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해요.” 문학을 넘어 철학과 심리, 종교를 아우르는 작품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란다. 2000년대 초부터는 미국의 형이상학 시인 폴 멀둔의 ‘시의 끝은 어디인가? (The end of the poetry)’라는 강의를 듣고 미국 시집에 심취, 『형이상학 시인론(2007)』을 비롯해 『미국 계관시인론(2014)』과 『영국 계관시인론(2014)』을 출간했다. 백 시인은 “한국 시의 특징이 ‘한’이나 ‘서정’ 등 감정에 의지한 것들이라면 미국 현대 시는 논리적이고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것들이 주제”라며 영시에서는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정체성이 매력으로 느껴져 지금까지도 정말 많은 영시를 읽고 있단다. 문학을 마음에 품고 다양한 인문학 활동을 하는 복합 성향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은 ‘아버지 소개’로 이어졌다. 백 시인은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또 정치인이신 백관수 선생”이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나 아버지 주변 분들에 의해 자연스레 세상사에 눈과 귀가 열렸던 것 같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시다 갑자기 6.25 전쟁 도중 납북되신 아버지에 대한 애련함은 백 시인의 삶에 늘 과제처럼 남아있다고. “북한에 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 빈 무덤을 만들어 놓으셨죠. 그 무덤으로 아버지를 모시기 전까지는 평생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습니다.” 백 시인의 얼굴이 살짝 어둡다. 아버지 이야기로 찾아 든 잠깐의 머뭇거림. 백 시인이 문득 시집을 펼치며 공백을 깬다. 백 시인은 “쓴 시 중에 ‘봄은 멀구나’ 하는 시가 있는데 이는 아버지의 빈 무덤을 채우기 전까지 진짜 봄을 느낄 수 없는 내 처지일 수도 있고, 이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말 못 하는 제약을 받으며 평생 봄이 오지 않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 이야기 일수도 있다”고 털어 놓는다. 이렇게 글로써 본인의 마음을 표현한 건 30년 전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다. 백 시인은 “기도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계절에 맞춰 하나님 사랑 문신해서/그래도 주신 사랑 넘치면 내가 편지가 되겠다’ 이런 식으로 쓰다 보니 이게 곧 시편 같았다”며 이를 계기로 『그래도 주님 사랑 넘치면(1999)』『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은혜의 눈송이를(2005)』『워싱턴 광장에서 시편을 읊으리라(2015)』 세 권의 신앙 시집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심정을 표현했다. 또 최근 발간한 『징검다리(2016)』에서는 ‘한글’과 ‘한국어’라는 돌다리를 딛고 미국이라는 개울을 건너가는 이민자의 삶, 즉 자신의 현실적 삶을 담았다. “우리가 평소 느끼는 감정은 삶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다”라며 “한구석에서 쓸쓸함을 느끼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내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백순 시인. 겨울과 봄, 봄과 여름 사이를 저울질하는 계절을 지날 때면 백순 시인의 ‘봄 타령’이 바람결을 타고 삶에 스르르 흘러 들 것 같다. 봄은 멀구나 앞뜰에도 뒤뜰에도 길가 웅덩이에도 먼 돌산에도 온 동네에 봄이 오고 있네 새 색시 문 여는 모습으로 스쳐오는 흐뭇한 바람 강아지 눈 졸리 우는 따스한 빛 엊그제 남은 눈 부스러기 쓸어 내리고 아직도 썰렁한 한기를 풍기는 봄바람 상기도 청명한 풍경을 비추이는 봄빛 봄 같지 않은 봄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기다림이 풀리지 않아서인가 여름에 들이닥칠 마주침이 두려워서인가 봄은 멀구나 사진: 투데이 -백순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4-19

[문학 카페]일상과 문학의 이중주, 박숙자 소설가

가슴 조마조마한 이야기로 심장을 들었다 놨다 감성을 마구 주무르는 소설가의 상상력, 그 시작과 끝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구수한 사투리로 수줍게 인사 건네는 소설가의 ‘일상적인 모습’과 첫사랑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해 위기에 처한 주인공의 ‘도발적인 모습’의 대조. 인생 이중주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박숙자 소설가를 만나봤다. “시, 소설, 수필. 장르도 많은데 왜 하필 소설을 택하셨죠?” 아주 기본적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박 소설가는 “시는 생각 날 때마다 단편적으로 쓰면 되니 손쉬운 반면 화장하듯 예쁘게 꾸미고 단장해 줘야 하는데 다소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소설은 오랜 시간 잘 구성해야 하는 인내가 필요한 대신 내가 가진 창의적인 생각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있어서 쉽고 좋더라고요.” 제대로 된 궁합을 만나 어려움마저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으니 박 소설가는 인생에 소설과의 만남을 남편 이상의 ‘인연’이라 표한다. 박숙자 소설가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다가 영 흥미가 붙지 않아 독성학자의 길을 택했다. 1969년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FDA에서 22년간 의약품 안전성을 심사하는 독성학자로 활약했다. 생리학을 공부하면 무궁무진한 평형상태가 너무 신비스러워 흠뻑 빠져들고, 자연과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다는 박 소설가. 그럼 문학은 대체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박 소설가는 “태생적으로 글 쓰는데 멍에를 짊어진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신문이나 책 등 글로 된 건 죄다 읽을 정도로 글을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들이 입버릇처럼 ‘너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냥 가볍게 생각해봐도 정말 하고 싶은 건 글 쓰는 거구나 싶으니 멍에가 맞는 거죠?”라며 특유의 투명한 미소로 나머지 답을 대신한다. 아이 셋을 키우며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간간이 글을 쓰긴 했지만 사실 생업에 소홀할 수는 없는 일.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늘 마음에 체기 가득했던 문학의 열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단다.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 전까지, 그리고 일하면서 틈틈이 정말 열심히 썼다고 회상한다. 박 소설가는 “아직도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이슬 맺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글을 써요. 그 순도 100%의 맑은 순간이 내 인생 전체를 행복으로 채워주는 정점이 아닐까 싶다”며 벅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한 열정을 담아 쓴 박 소설가의 첫 소설집은『River Junction』이라는 영문판으로 2015년 출간됐다. 왜 하필 영문판부터일까라는 의문이 들 찰나, 박 소설가는 “지금도 영어권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북한이냐 남한이냐를 묻고 뉴스에서 본 북한의 화제를 먼저 물어온다”며 “50년 가까운 세월을 미국에서 살아온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감성을 담은 내 글을 통해 이민자의 삶과 미국인의 삶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영문 소설집 출간 딱 1년 만에 한글판 <두물머리>를 출간한 박숙자 소설가. 이번에는 본인의 의도를 그대로 담고 싶어 직접 번역에 편집까지 하는 열성을 담았다. 박 소설가는 “이민 1.5세대와 2세대는 꼭 이 두 권의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의 정서를 이해하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아마존에서 ‘River Junction, 두물머리’를 검색해 살짝 들춰봐 주는 관심을 주면 참 좋겠다”고 거듭 당부한다. 인터뷰 내내 내비친 숨길 수 없는 박 소설가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문학열. 그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됐을지 못내 궁금했다. 박 소설가는 “자라면서 하도 글 읽기도 쓰기도 좋아하니 부모님이 ‘평생 글을 쓰는데 대체 책은 언제 나오냐’고 물으셨는데 생전에 보여드리지 못한 게 속상하다”며 “내 소설을 가장 재미있게 읽어주실 분이 부모님이라 생각하면 내가 글을 쓴다는 게 그렇게… 행복하네요”라며 또 한 번 수줍은 미소로 답한다. ‘딸의 책 출판을 기다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영전에 올립니다.’ 소설가의 책 첫 페이지에 담긴 멍울진 마음이 천리향을 타고 하늘에 닿았기를 바라며 시선이 자꾸 하늘로 향한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4-12

[문학 카페] "시를 부르고, 노래를 짓는 시인”

시가 곡이 되고, 곡이 곧 시가 되는 글감의 선율. 그 과감한 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시인의 귀한 재주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보통은 인터뷰하기 직전 빳빳하게 윤기 흐르는 시집부터 선보이고 그 안의 내용에서 자신의 첫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박양자 시인이 내보인 건 혈색을 잃고 누렇게 변해 만지면 금세라도 바스러질 듯한 시집 한 권. 한자로 4290(1957년) 10월 5일이라 표기되어 있고 지면에는 ‘창 (박양자)’이라는 시가 한 편 박혀 있다. 박 시인은 “올해로 딱 60년 전이네요. 신성여중에 다닐 때 발간된 교내 시집 <녹나무>에 제 시가 난생처음으로 활자화되어 실렸는데, 그게 제가 문학에 빠지게 된 블랙홀이 될 줄은 몰랐죠.” 박양자 시인은 산 좋고 물 맑은 낭만의 섬 제주도 출신이다. 그 청정 환경을 머금고 여고 시절까지 넘치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접하며 눈과 마음으로 담다 보니 단순히 문학적 감성으로는 부족했을까? 박 시인은 “글을 쓰다 보니 절로 음이 나오고, 또 음이 나올 때 그에 맞춰 글을 쓰다 보니 시와 작사, 작곡까지 하게 돼 아마 대학도 자연스레 음대 작곡과를 간 게 아닐까”라고 회상한다. 게다가 문학과 음악을 넘나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음악을 전공한 박 시인에게도 문학은 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어릴 때는 독립유공자셨던 아버지가 책을 읽을 때마다 엄하게 독후감을 쓰도록 하셨고, 중학교 때는 시인인 문예 선생님과 음악 선생님 사이에서 어느 연도 끊지 못하고 작품을 써야 했으며, 음대 졸업 후 음악 교사가 되어 발령받은 학교에서는 바로 옆자리에 등단한 국어 교사가 치열하게 시 쓰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아직 식지 않은 자신의 창작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삶 안에서 음악과 문학을 양손에 살짝 움켜쥔 채 1987년 미국으로 왔단다. 하지만 태평양을 건너 남의 나라에 와서조차 여전히 문학이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다며 소박한 웃음을 띠는 시인. 박 시인은 “미국을 오니 오페라나 소나타 등 제가 원래 전공했던 서양 음악 작곡은 외국인이 더 잘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곡을 작곡하려고 과거에 쓴 시를 뒤적이던 차에 때마침 문인회 신인상 공모를 보게 된 거죠.” 공모 마감 일주일을 앞두고 자신의 작사 실력도 인증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응모한 세 편의 시.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만났던 그 기회가 삶에 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시집을 안겨준 고마운 인연이라고 말한다. 특히 박 시인은 “제 시 중에 ‘세월’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가 지금까지 저를 열정을 품고 시를 쓰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됐다”고 전한다. 시는 시인의 삶과 생각을 드러낸 결과물이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박 시인에게도 ‘세월’은 적잖은 의미를 줄 터. 이에 대해 박 시인은 “시와 작곡, 작사를 할 수 있는 재능을 살려 ‘안젤리’라는 장례미사 전담 성가대에서 활동하며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많이 봐요. 그래서 살아가는 세월 동안 ‘숨을 잘 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늘 생각하게 된다”며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상 잊혀진 것, 하찮은 것, 혹은 일상에서 늘 접하게 되는 평범한 것에서 진실의 가치를 보고 느낀 것들을 세상에 풀어내며 살고자 한다”고 단단한 삶의 가치를 전한다. 박 시인은 인터뷰를 마치며 “저는 좋은 시를 읽으면 꼭 필사합니다. 시를 읽고 필사를 하면서 읽고, 필사한 시를 읽으면 모두 3번을 읽게 되거든요. 그러면 그 시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자신의 감성에 맞게 어느새 스며들어 있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써 놓은 시만 1000편이 넘는데, 지금 제게 그 시들이 다 보물이 됐죠”라며 아주 오랜 습관 하나를 귀띔한다. 궁금했다. “혹시 음악과 문학 사이에 양다리 신가요?” 박 시인은 틈도 없이 단호하게 답한다. “창작의 관점에서 보면 시와 작곡, 작사는 같지만 결국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시가 제겐 더 어려워요. 시는 평생 공부해야 할 과제 같은 거랄까요?” 시를 부르고, 노래를 짓는 박양자 시인. 문득 시인의 시를 부르고 싶어진다. ' 손 펼치고 오므릴 때면 호젓한 들길 같은 손금들이 서로 맞붙거나 구부러져 골진 어둠이 서리기도 한다 손가락이 만드는 작은 고랑마다 움켜쥐면 불끈한 돌이 되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부수었나 손 주먹 깊은 동굴에 모여 마음이 퍼렇게 일구는 갈래들을 가닥가닥 여며야 하는데 느슨하게 펼쳐보는 손바닥에는 드르륵 드르르르, 뜯어진 솔기 같은 하루를 곱게 박음질 하던, 그 낯설던 손 주먹 무게 만한 노동이 아직도 눈부시게 손 끝 지문조차 희미한 내력을 순하게 슬어 놓고 있다. ------------------------------------------------------------ 목화솜 이불 시집올 때 장만한 목화솜 이불 한때는 귓불 간질이던 품속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더니 솜틀 집 없는 이역에서 무겁고 딱딱해졌다 찰흙덩이처럼 조금씩 굳어가는 목화솜 더는 말랑말랑한 기대 저버리고 막장 같은 어둠에 무게를 쟁여두고 있다 덜그럭덜그럭 솜 틀 때면 한숨 같은 솜먼지 풀풀 날리던 시절 있었는데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날지를 못한다 스스로 부풀리지 못하고 가만히 가라앉아 빠져나올 듯 나올 듯 짓누른 내 오랜 쓸쓸함 같은 것 그런 날은 내 벼랑 같은 세월의 내력이 실꾸리 감기듯 저며 든 이불 속에 누워 발 뒤꿈치에 걸린 실밥 몇 가닥 톡톡 끊어낸다 또 못 버리겠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4-05

[문학 카페] “뒤늦게 빠진 사랑, 시는 내 운명”

“저에게 시는 운명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운명이라 표현할까. 올해로 등단 14년, 내년을 기약하며 벌써 다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오영근(사진) 시인의 문학 청춘기를 만나봤다. 오 시인의 명함에는 큼직하게 박쥐 모양이 새겨져 있고, 전자메일 주소는 배트맨 오(batmanoh)다. 게다가 첫 시도 ‘흡혈박쥐의 장송곡’, 시인으로 등단한 계기 역시 이 시라고 하니 문득 시인과 박쥐의 관계부터 호기심이 닿는다. 오 시인은 “원래 전공은 생물학이고, 박쥐가 전공입니다.” 다소 차가운 느낌의 ‘박쥐’와 따스한 느낌의 ‘시인’. 참으로 대비되는 조화라는 생각이 스치던 찰나, 오 시인이 덧붙인다. “그런데 시가 뭔지 알기 위해 시인이 됐습니다. 시를 그냥 읽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시를 더 깊이 알고 싶고 알수록 또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게 바로 운명 아닌가요?” 오 시인은 자신의 삶에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늦둥이’고 시는 ‘늦바람’이라고 말한다. 2003년, 나이 일흔을 목전에 두고 등단해 2년마다 내리 네 권의 시집을 발간했으니 늦바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싶다. 특히 첫 번째 시집에서는 갓 태어난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듯 시집이 소설책 두께만 하다. 오 시인은 “시라는 본질에 대해 내가 고민하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 이렇게 세 언어로 쓰다 보니 두꺼워졌다”며 “특히 내 시 안에는 우리나라의 정서는 물론 일부 역사적 사건도 함께 쓰여 있어 이민 2세나 3세대가 같이 읽고 한국에 관심을 놓지 않는 계기가 된다면 더 없이 바랄 게 없다”고 묵혀둔 포부도 살짝 전한다. 네 권의 시집은 모두 ‘시(詩)’라는 말로 시작된다. 1집은 <시는(2004)>, 2집은 <시는 사랑(2006)>, 3집은 <시는 믿음(2008)>, 4집은 <시는 소망(2010)>이다. 오 시인은 “시라는 말 자체가 좋지 않나요? 한자 시(詩)를 떼어 보면 말씀 언(言)에 마을 사(寺), 말씀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잖아요. 인생 늦깎이에 그 말 안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라며 이내 문학 소년의 감성을 드러낸다. 시집 네 권을 막상 펼쳐보니 시집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생물학 박사로 40여 년의 교단생활을 막 끝내고 퇴직한 2000년, 처음 시인의 이름으로 낸 1집 처녀시집에서는 시들의 제목이 ‘해부학 교실, 장기기증자, 지렁이 아가씨’ 등 생물학 강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2집은 금세 사랑이라는 제목답게 ‘아내와 그녀, 첫 입맞춤’ 등 사랑 젖은 감성이 흠뻑 묻어있다. 물론 중간중간 ‘나의 사랑하는 박쥐에게’ 등 생물학적 발상은 여전하다. 한편 3집 믿음은 ‘눈 감고 기도하면, 십자가 목걸이’ 등 시인의 신앙적 감흥이 깊이 묻어나는 시들로 가득 찼다. 오 시인은 “세상에서 첫 번째 시인은 하나님”이라며 “하나님이 표현하신 세상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하기에, 나는 하나님이 표현하신 것들을 겨우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발 물러선다. 네 번째 시집 소망은 시인의 다소 고조된 감성이 엿보인다. ‘소금이고 싶다, 대통령을 찾습니다, 남북한 대학생에게 고함’ 등 인간과 자연에 관한 소망에서부터 평화통일과 사회정의를 담은 시가 곳곳에 화살처럼 박혀있다. 오 시인은 “사실 내가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며 울분을 글로 쏟아낸 것”이라며 “때로는 내가 소망하는 삶을 위해 부조리한 현실을 질타하는 시도 거침없이 쓴다”고 고백한다. 여든셋의 오영근 시인. 8년 만에 5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오 시인의 다음 시집 제목은 또 ‘시는 OO’ 일까? 오 시인은 “글쎄요,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시는…….” 이런저런 단어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 시인이 입을 연다. “시는 천국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다가 천국에 가서, 만약 천국에서도 시 모임이 있다면 시 모임을 나가고 싶고 시를 쓰고 싶어요. 비록 늦게 사랑한 죄는 있지만 그럼에도 시는 내 운명이에요.” ‘오영근, 길 영, 뿌리 근’. 시인의 이름처럼 이 땅에서 길게 뿌리 내린 시인의 싱그러운 문학 열정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훗날, 천국까지 또다시 길게 뿌리 내리기를 응원하며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을 벌써부터 기다려본다. 영원한 시인 뿌린 씨앗이 지하의 젖을 빨아 먹고 두꺼운 대지를 뚫고 힘차게 돋아나오는 믿음을 아십니까? 햇볕으로 펄펄 달구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온갖 지구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랑을 아십니까? 때가 되면 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낙엽을 흔들어 깨워 대지 위에 흩뿌리는 소망을 아십니까?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면, 영혼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의 운명입니다. (후략)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3-29

[문학카페] “수묵화 한 폭과 같은 풍경을 담은 시”

“나에게 소박한 산골 동네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게 지금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문학회 특강 자리에서 들었던 이 한마디가 귓전에 걸려 며칠 동안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분명 이 시인의 감성엔 깊숙한 추억이 스며 있는 듯했다. 인터뷰를 위해 단둘이 마주 앉은 자리. 산골 동네를 예감하고 만난 것에 비해 세련된 폼으로 나타난 시인. 의외의 궁합에 시인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자극됐다. 숙명여대 1학년 때 신춘문예 당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인에 대한 정보다.“숙대 국문과 졸업하신 거죠?”“아뇨? 숙대 약학과 졸업했어요.” 아차. 일찌감치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하니 당연히 문학도로 착각하는 실수부터 범했다. 김행자 시인의 본디 직업은 약사다. 시인과 약사의 끈은 꿈과 생업 정도로 묶으면 된단다. 김 시인은 “저희 집안이 아들 다섯에 딸 넷, 9남매예요. 아버지가 생업을 위해서는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고 아들은 모두 공대로, 딸은 간호대·약대·교대로 보냈다”고 전했다. 그렇게 약사가 되어 결혼을 하고 1976년, 미국에서 약사가 귀하던 시절 약사 직업을 그대로 안고 온 가족이 이민을 왔다. 한국서 아무리 귀한 일을 하다가 와도 제 직업을 버리고 상상조차 힘들게 이민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아버지의 혜안은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라 생각한단다. 생업은 그렇고, 그럼 글과의 인연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때는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책과 글을 좋아도 했거니와, 이를 알아본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머들령 문학회’를 소개하면서 ‘시인 김행자’로서의 본격적인 문학 행로가 시작됐다. 머들령 문학회는 충청 시단의 선구자로 불리는 ‘소정 정훈 시인’이 1960년 그의 집에서 발족한 문학 모임으로 당시 대전 시내에서 문학 하는 학생들은 중고등 청소년까지 드나들며 공부, 수많은 문인이 배출돼 주목 받은 문학 동인회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김 시인은 “대학시절보다 고등학교 때 이 문학회 활동을 통해 정말 많은 습작과 합평회를 거치면서 내 글이 성장기를 맞았던 것 같다”며 “이때가 나의 문학적 감성 폭발기로 기억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탄탄하게 갈고 닦은 실력으로 김행자 시인은 1968년 대학 1학년의 이른 나이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좋겠어요, 소녀는’이 당선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작 첫 시집 <눈감으면 그대>는 이로부터 27년 뒤인 1995년 발간, 두 번째 시집 <몸 속의 달>은 또다시 10년쯤 뒤인 2004년 발간됐다. 시인으로 살아온 50여 년의 세월에 단 두 권의 시집. 이를 두고 김 시인은 “그동안 생업과 육아, 습작.. 세 다리를 걸쳐 작품활동을 했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시는, 고여야 세상 밖으로 탄생할 수 있는 감성의 결정체 같은 것”이라며 “고이고 고여서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집으로 엮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시인의 시집을 펼쳐본다. 두 번째 시집 가장 첫 페이지에 쓰여진 글귀 “한때 나를 일으켜 준 삶의 흔적들을 묶어 두 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나는 자꾸 부끄럽다. 아. 삶도 그렇게 깊을 수 있다면.” 책 속 김행자 시인의 시에서는 유난히 ‘호박꽃, 선인장, 목련꽃 나무, 병든 사과나무, 들꽃, 오동나무, 장미꽃’ 등 자연의 소재가 눈에 도드라지게 박힌다. 그러고 보니 김 시인의 고향이 충북 영동이라 했던가! 고향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더니 그보다 더 큰마음의 고향 풍경이 쏟아져 펼쳐진다. 김 시인은 “충북 도가실 마을 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황톳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유원지를 지나, 독골재라는 고개에서 쉬엄쉬엄 한참을 가면 어둑한 밤이 돼서야 할머니 집에 도착하는데, 할머니 집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바람이 불면 스산한 소리가 빚어지고, 집 뒤로 물방앗간에 있는 웅덩이에는 새파랗다 못해 검푸르게 바닥을 비추는 투명한 물빛이 고여있는 한 편의 수묵화 같은 풍경”이었다며 아직도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고 말한다. 인터뷰 내내 풀어도 풀어도 끝없이 나오는 충만한 감성이 금세 터져버릴 것 같다. “두 번째 시집 이후 13년이 지났는데, 이제 또 한 권 낼 때 되지 않으셨어요?” 질문에 김 시인의 답변은 무척 견고하다. “서정춘 시인은 등단 30년 만에 첫 시집을 냈어요. 그때 그분이 전하더라고요. ‘시를 쓰기 위하여 시인이 되어야지,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을 마음에 품고 산다고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덧붙인다. “시는 하나님이 숨겨둔 신비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생을 찾아도 다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 죽는 날까지 써야죠. 안 쓰면 안 되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수첩을 덮으며 스쳐 들은 말이 더욱 깊은 여운으로 머리를 맴돈다. ‘안 쓰면 안 되니까, 죽는 날까지……” 숲에 가면 사는 것이 울적해지면 숲으로 가네 마음은 먼저가 흰 들꽃 따라 눕고 비릿한 젖 내음 발목을 타고 오르네 숲에 가면 초록이 온통 나를 빨아들여 존재의 빈 껍데기만 남네 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나의 힘 밤마다 비명도 없이 어린 잎들을 틔워 내고 착하게 살아 있는 것들을 보듬어 안네 사는 것이 울적해지면 숲으로 이사 가고 싶네 숲에 가서 길을 잃고 싶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3-22

[문학 카페] “꾸미지 않은 은유로 써내려간 시인의 삶”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인터뷰에 응한 시인의 머리에는 어김없이 트레이드마크가 얹혀 있다. “이 베레모는 언제부터 쓰셨어요?” 시집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선 참 뜬금없는 질문부터 던져본다. 이경주 시인은 “베레모는 1953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동료들과 국제시장에 갔는데 이런 모자를 내 머리에 얹고는 다들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 거예요. 도토리 같기도 하고 버섯 지붕 같기도 한 그 모습이 웃겼던지. 그 김에 나도 어울리나 거울을 봤는데, 괜찮은 것 같더라”며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인생에 베레모를 동행한 게 65년이란다. 또 공교롭게도 7년 전 이경주 시인을 수필가로 등단시킨 작품 중 하나가 ‘베레모’라 하니, 가히 ‘베레모 시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 챙겨온 시집 겉면에는 ‘봄, 편지, 고향, 자유’ 등 정감 어린 단어들이 소담하게 나열돼 있다. 언뜻 아름다운 고향에 대한 깊은 정서가 글을 이어가는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고향은 어디세요?” …… “함흥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열아홉 나이에 혈혈단신 목숨 걸고 한탄 강을 건너 남으로 왔어요.” 아름다운 글감과 치열하게 목숨 건 삶, 이 불균형한 대비를 마주하니 이경주 시인이 더욱 궁금해진다. 올해로 여든아홉.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시인은 어머니가 마흔에 낳은 늦둥이다. 하지만 당시 오롯이 사랑받을 환경이 못 됐다며 “첫째인 누나는 일찍이 시집가고, 어머니는 5살 아래인 소아마비에 걸린 조카를 돌봐야 했기에 나는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자연스레 바깥으로 나돌다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생겼고, 급기야 북을 뒤흔든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사건’에 연루돼 1년의 은신 생활 끝에 홀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한다. “한탄강, 나는 그 강을 말 그대로 한탄스런 강이라 불러요. 생명을 걸고 그 강을 넘어오다 많은 사람이 빠져 죽거나 총 맞아 죽었어요. 그 강을 무사히 건너온 나는 하늘이 내려준 생명으로 사는 셈이죠.” 누군가 ‘글은 굶주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연유에서 시작된 것일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문학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심정을 담은 또 다른 나의 표현이었죠.” 이 시인은 은신 생활을 하면서부터 틈틈이 글을 썼단다. 어린 시절 뻐꾸기 울음소리와 계절 따라 꽃 피는 풍경 이외에는 구름 밖에 볼 게 없었던 벽지에서의 기억이나 자신의 정치적 의식, 또 어머니에 얽힌 가슴 시린 심정 등을 글로 끄적거린 게 ‘시인 이경주’를 탄생시킨 원천이 됐다는 것이다. 이 시인이 삶 속에 스친 풍경과 심정을 고스란히 담았다는 시집에는 과연 어떤 세상이 담겨 있을까? ‘세월의 그물에 걸린 말 알’. 이 시인은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세월이,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그물에 걸려 시와 같은 말로 알 속에서 미숙하게 태어나고 있다”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시집 안에 박혀있는 시들의 표현이 꽤 은유적이다. ‘울 어머니 간절한 눈물이/돌 가슴으로 새겨진다’, ‘나는 까만 조약돌/파도는 내 엄마/내 얼굴 씻어준다/나는/파도가 만든 조약돌’. 이 시인은 “평소 주머니에 수첩을 넣어 다니며 뭔가를 보고 번뜩이는 생각이 있으면 재빨리 메모에 옮긴다”며 “구멍이 뻥뻥 뚫린 가랑잎 떨어지는 걸 보면 폐결핵 환자의 폐 뚫린 가슴과 함께 그 아픔이 떠오르고, 낙엽이 떨어지면 이별 장면에서 슬픔과 눈물이 숨어 있는 추억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꾸미지 않은 은유에 비친 시인의 시가 독자의 마음에 닿으면 참으로 은은히 퍼지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도 이경주 시인은 시니어센터 등에서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스승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시인은 “나이가 많아도 아직 문학 소년소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분들의 글 표현은 다소 매끄럽지 못하지만 시상 자체는 매우 귀한 것이라, 되레 내가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현재 나이 103세인 김재완 어르신을 꼽는다. 80대 나이에 글을 배우고 싶다고 이 시인을 직접 찾아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이었고, 지금도 그 인연은 소중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인은 “요즘 몸이 좋지는 않으시지만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해 ‘선생님’하고 부르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며 “이런 제자 둔 사람 나와보라고 속없는 자랑을 하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내년 1월이면 아흔을 맞는 이 시인은 “앞으로의 내 글은 아마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을 헤쳐가며 살아온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많이 담기지 않을까 싶다”며 “나머지 인생은 나 스스로 지난 삶을 정리하며, 그동안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용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용서를 빌며 아름답게 채워가고 싶다”며 옅게 미소 짓는다. 시인의 식지 않은 열정이 더욱 아름답게 발화될 것이라는 예감을 해 본다. 이경주 시인은 함북 성진 출생으로 2003년 조선 문학에 시 ‘바위’가 당선돼 등단, 시집 ‘그루터기에 핀 솜다리(2005)’, ‘노을 진 들녘에 선 사슴의 노래(2008)’, ‘낙조에 구르는 조약돌(2009)’과 ‘세월의 그물에 걸린 말 알(2014)’을 펴냈다. 3월의 봄들 아직 빗줄기 몇 차례 지나간 누리에 연둣빛 봄살이 몸살한다 가지마다 피부가 트는 아픈 소리 하늘에서 봄볕을 떨구는 봄! 봄! 봄!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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