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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좋아하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

새벽 미사에는 피아노 반주가 음악의 전부다. 가끔 미사를 보며 ‘아! 난 아침 잠이 없으니 내가 저기서 반주를 하면 딱 어울릴 텐데’하며 아쉬워 하곤 한다. 미사 반주자를 찾는다는 주보를 보면 그저 희망사항이고 흥미를 느낄 뿐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 원통하다. 좋아하는건 취미고 잘하는 건 특기인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구별을 못하고 부모가 되면 자기 유전자를 받은 자식들에게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며 여러 학원을 보낸다. 예능엔 통 잼병인 내 부모도 대리만족과 함께 여한을 풀려고 어린 나를 무용학원에 보냈다. 하지만 심각하게 엇박자로 북치고 장구치는 나를 선생님이 너무 어리다는 그럴 듯한 핑계로 돌려 보낸 날, 나는 족두리와 북채를 팽개치며 나의 재능을 몰라보는것 부모님을 탓하며 엉엉 울었다. 그 다음엔 한글을 깨치자마자 피아노를 배웠다. 왼손 오른손으로 따로 칠 때는 되는데, 양손이 올라가면 희안하게 양손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바이엘 상하권을 떼고 체르니 교본을 시작하면 피아노를 사주려고 계까지 든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2년간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중학교 음악시간에는 청음 시험을 보는데 ‘넌 귀에 이상 있냐?’는 음악 선생님의 타박이 합창단에 들어가고픈 내 의지를 꺾어버려 한동안 콩나물 악보에 울럼증을 일으켰다. 또 결혼 전 노래방 가서 하품하고 졸면서 남의 노래만 듣던 나에게 약혼자인 남편 친구들이 험상궂은 경상도 말로 “노래를 못하면 시집을 못간다”고 합창을 할 땐 정말 결혼을 무르고 싶었다. 그래도 기계 문명의 발달로 차츰 나아지고 있다. 이제 노래방에 가면 탬버린을 흔들다 3,2,1로 바뀌면 노래를 시작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나름대로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 놈의 춤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교 때 오스트리아인지 러시아인지 출처 모르는 나라의 포크 댄스를 배우는데,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마저 아무도 나하고 짝을 안하려고 해서 나는 시범 조교로 온 멋진 남자선생님을 독차지하며 땀을 줄줄 흘리며 동작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결국 통과를 못해 수영으로 땜빵을 해서 학점을 겨우 땄으니 이도 내 특기는 못 된다. 무엇보다 요즘 스포츠센터에서 줌바라는 격렬하게 땀 흘리는 댄스를 살랑살랑 땀도 흘리지않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쳐가며 뻔뻔하게 하는데 별로 재미가 없다. 취미도 특기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요즘 또 다시 ‘취미는 곧 특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반주에 슬금슬금 용기가 생긴다. 남편에게 지금이라도 연습해 몇 년 안에 반주를 할까 한다며 피아노를 사달라고했더니 “너를 받아줄 선생이 있는가부터 알아보라”며 피아노 건반을 칼라로 프린트 해준단다. 한때 조카들은 노래와 춤에 소질이 있어서 여러 대회에서 대상도 받고 한 때 나에게 매니저의 꿈도 꾸게 했는데, 그리고 최근에는 손녀와 손자에게 어떤 악기가 좋을까 행복한 고민도 하는데. 올해는 내가 잘하는 것을 다시 눈 씻고 찾아봐야겠다. 누구든 세상세 잘하는 것 하나 쯤은 있겠지. 박명희/VA 통합한국학교 교사

2018-01-18

[지평선] 이웃 사촌

좋은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보다 낫다. (Near neighbor is better than a distant cousin.) 만약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만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쓰인다. 내가 만약에 영어를 조금만 더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좋은 이웃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 한 바퀴 돌면 그만인, 97채의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있다. 옛날 집들이 모여있고 학군도 괜찮아서, 여기서 살다가 애들은 자라서 독립하고 우리는 노인이 된다. 어느 날 한 사람만 남아 외기러기로 살다가, 어딘가 닮은 자식이 나타나 집을 팔고 나면 새로운 가족이 나타난다. 아침 산책길에는 내가 이름을 지어준 정겨운 이웃을 만난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50년 전부터 살아온 그 집에서 할머니를 수십 년 전에 먼저 보낸 꽃할아버지는 온갖 꽃들을 집 바깥에 가득 심어서 우리를 기쁘게 해준다. 보랏빛 울타리 콩이 이쁘다고 하니 그다음 봄에 모종을 한 아름 갖다 주셔서 심었는데, 거의 다 죽었다. 겨울에는 남쪽 어딘가 따뜻한 자식네에서 지내시곤 했는데, 올봄에는 볼 수가 없어 궁금하던 차에 그만 지난겨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느 날 굴착기가 마당에 있던 돌 벤치, 돌 항아리, 분수, 돌사자를 치우고 꽃동산을 싹 밀어버리고 잔디를 깔더니 얼마 뒤에 낯선 백인 가족이 이사 왔다. 해마다 할아버지랑 꽃들을 볼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부지런히 얻어다 심을 걸 그랬다. 할아버지의 영어가 알아듣기 싫어서 피해서 돌아간 내가 밉다. 있을 때 잘할걸. 나에게 우렁차게 굿 모닝을 외치는 키도 크고 잘생긴 할아버지는 오늘도 옆자리에 해롱해롱 병약한 할머니를 소중하게 앉히고 아침을 먹으러 부릉거리며 나간다. 비슷하게 키가 크고 마른 남편과 다니려면 나도 코스모스같이 가냘퍼야 남편이 힘들지 않을 텐데 무거워서 큰일이라며 걸음을 조금 더 빨리해 본다. 식탐이 많은 나에게 남편은 협박한다. 운동 안 하고 게을러서 아프고 뚱뚱하면 노인연금 타서 맥도널드나 짜장면 먹으러 갈 때 안 데리고 간다며 미국에 와서 텍스 보고가 없는 나를 겁먹게 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반절 연금 혜택이 있다는걸 몇 년 전에 알고 나서는 안심이 되었고, 그달에는 몸무게가 1파운드가 늘었다. 뒷집 노씨는 FDA를 다녀서인지 건강하지만, 얄미운 쥐같이 생겼다. 치대 다니는 아들만 둘이다. 마누라가 참 좋고 애들 나이가 비슷해서 울타리를 넘나들며 친하게 지냈는데, 언젠터인가 아줌마가 안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 같은 젊은 여자가 야실야실 다니기에 누구냐고 하니 본처는 이혼하고 중국으로 가버렸단다. 노 씨는 새장가를 가더니 집도 고치고 잔디도 사람 사서 깎고, 아들들은 몇 년째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미국 와서 고생 많이 한 조강지처를 버린 나쁜 놈이라며 어쩌다 보더라도 눈부터 흘긴다. 처음 동네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살던 분들은 거의 물갈이가 된듯하다. 오며 가며 안녕하며 웃기만 해야 하는 답답한 정겨운 이웃을 대하며, 만약에 지금이라도 영어를 갈고 닦으면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텐데 하면서 턱없는 영어에 욕심을 낸다. 박명희/VA 통합한국학교 교사

2017-11-09

[지평선] 이옥설(理屋說) : 집 고치기와 버리기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없고, 미장이집 구들 빠진 채로 삼 년 간다’는 말처럼 전문기술자인 신랑이 우리 집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수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2층을 통째로 고친다. 그러고 보면 이사온 첫 해에 비가 몹시 퍼부어 부엌 지붕에서 물이 새고 나서야 평소 구멍 뚫린 채 방치했던 지붕을 부랴부랴 고친 전력이 있긴 하다. 고려시대의 이규보는 집 수리 과정을 담은 한문 수필 『이옥설』에서 처음에 쉽고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는 것을 방치하면, 나중에 수습하기 어렵고 큰 힘이 들어간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그는 일상적인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인간의 삶의 이치와 나라의 정치에 적용하였다. 사람의 몸이나 나라의 정치도 잘못되고 있다는걸 알면서도 망설이며 고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비용도 많이 들게되고, 나라의 정치도 백성을 좀먹는 무리들이 도탄에 빠트리는걸 그대로 둔다면 나중에는 위태롭게 썩어버린 재목처럼 되어서 때가 늦을수도 있으니 평소에 살펴보고 삼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법정스님은 공양그릇과 승복이 전부여서 무소유의 삶을 부러워하게 만들었고, 성당 신부님은 오실 때와 마찬가지로 떠나실 때도 트렁크 하나로 떠나가셨다. 이번에 집을 고치면서 제대로 짐정리를 하게되었다.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이 나오는 걸 보니 평소에 내가 정리의 여왕이라는건 개뿔이었다. 1년에 한 번도 쓰지 않는 건 정리하라는데,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싸들고 와서 35년 간직했던 짐을 정리하며 중얼거린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그러면서도 하나씩 꺼내 망설이며 만지작거린다. 신혼 때 입었던 재킷은 팔도 들어가지 않고, 바지는 종아리까지만 들어가고, 블라우스는 손수건만해서 저걸 내가 어떻게 입었나 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소중하게 간직하는 몇개의 물건이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고 기쁨이다. 부지런한 시아버지가 평생을 쓰셨던 녹이 슨 물뿌리개. 엄마가 남편 이름에 철이 들어있다고 간직하라던 쇳조각. 젊은날 음악에 빠졌던 남편이 모아온 해적판 LP 레코드판들. 남편이 만들어 준 나를 닮은 까만 말과 기관총 모형, 돌하루방과 파도소리가 들리는 소라. 이것들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 늙어갈 것이고 언젠가는 한줌의 재로 사라질 것이다. 몇날 몇일을 정리한걸 모조리 금요일부터 잔디밭에 내놓으니 여기저기서 이웃들이 골라간다. 창문으로 내다보며 하나씩 없어질 때마다 나의 추억도 함께 보낸다.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일 것인데도 거기에 담긴 추억도 가져 가는것 같아서 섭섭하다. 책장, 책상, 의자, 식탁, 설합장, 장식장, 그릇, 운동기구 많기도 많다. 붕어와 잉어를 잡았던 낚시대에선 산길을 굽이굽이 걸어갔던 봄날의 안양 저수지가 떠오르고, 비디오는 한국 드라마를 주말마다 테이프를 엄청나게 빌려다 반납하는 날짜를 맞추느라 졸면서 보았다. 이제 집수리가 끝나면 다시 집안이 꾸며질텐데, 그속에서 이리저리 채이며 살고 싶지 않은데, 이번에는 정말 꼭 필요한 만큼만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아키아와 홈굿이랑 가구점을 수없이 드나들고 있는 내모습이 선하다 박명희/VA 통합한국학교 교사

2017-09-29

[지평선] 꽃길 가는 대한민국

경상도 토박이신 시어머니는 1919년 3.1운동 때 태어나 왜정시대를 거쳐 6.25와 4.19의거, 5.16혁명, 군사독재정권, 민주화 시대를 몸소 겪고 사셨다. 또 그저 평범한 서민으로 아침마다 단정하게 앉아 불경을 외며 가족의 안녕과 나라의 평온을 빌고, 화투로 그날의 운세가 좋게 나와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분이시다. 그런 어머니가 우리에게 종종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세계관을 말씀해 주곤 하시는데 요즈음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하나 없다. 또 대부분의 어른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분들 모두가 평범한 가운데 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 침 튀기며 욕을 하면, 어머니는 “그 동안 수없이 투표를 했지만 후보자가 대접하는 식사와 선물에 상관없이 찍어야 나중에 후회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주셨다. 첫째, 서양에서 온 코가 큰놈은 믿지 말라고 하셨다. 비록 평생 그들의 빨래를 해서 생계를 이으셨지만, 그들은 문화적인 기품이 없어 보이고 그들이 전하는 종교는 초콜릿과 군인을 앞세웠을 뿐 사실은 폭력적인 것이라고 여기셨다. 둘째, 중국 놈은 어느 곳에서나 떼를 지어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살면서 욕심 많고 음흉한 것 같다며 기름진 청요리를 무척 싫어하셨다. 셋째, 왜놈들은 잔망스럽기가 원숭이 같아서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듯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며, 애초에 싹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당시 유행이던 코끼리표 밥솥이나 소니 라디오 같은 일본 물건은 쳐다 보지도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힘이 센 나라끼리 우리 의견과는 무관하게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 선언,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거쳐 겨우 반쪽자리 대한민국 독립을 이루었다는 것과 아직도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는 현실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머니 나름의 해법은 있다. 있는 놈이 거두는 것이고 핏줄은 당기는 법, 독일도 결국에는 잘사는 서독이 보듬은 것처럼, 합쳐 살면서 밥이 모자라면 물 부어서 죽으로 나누어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 뭉쳐진다. 반면 우리가 뭉쳐서 잘 되는 게 배 아픈 그들을 생각해 본다. 미국은 일본이 최고 동맹국이고, 한국은 동북아의 안정과 관계가 있는 하나의 중요한 하부구조로 인식하고 무기를 제일 많이 구매하는 봉으로 여기고 있다. 중국은 사드를 문제 삼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일본은 말리는 척하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나대고 있다. 따라서 행여라도 한반도 통일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한반도 평화통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대한민국 국민은 더는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했으며, 신중히 선택한 결과에 따라 몸과 마음을 합쳐 더욱 앞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오늘도 새로운 지도자는 말한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핏줄로서 간절히 기도한다. 이 나라를 지켜주고 뜻 한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박명희/VA 통합한국학교 교사

2017-05-26

[박명희 교사의 지평선]복 중의 복은 인복

“인복이 많아서 남편 복과 자식 복과 재물 복이 참 많구나.” 호기심으로 친구들과 함께 찾아간 신 내린 지 얼마 안 된 아기 동자가 나에게 반말로 지껄였던 게 문득 떠오른다.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니 복이란 것도 결국 서로가 하기 나름이 아닌가 싶다. 내 세월의 절반을 넘게 자식에게 눈물과 돈을 쏟아 부었지만 무자식 상팔자라는 무상 클럽회원이 되어 ‘내게 자식 복은 없나’ 싶었는데, 나름대로 잘 자라준 조카들 키우는 데 일조했으니 자식 복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편도 그럭저럭 잘 만나 서로가 하기 나름이라며 짝짜꿍 맞춰가며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지금껏 살고 있으니 남편 복도 있는 듯하다. 게다가 알뜰하고 부지런한 남편 덕에 타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며 맞벌이 부담 없이 그저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한국학교에만 가도 밥은 굶지 않고 가끔은 남에게 베풀며 살 수도 있으니 재물 복도 있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내게 주어진 복들을 돌이켜 보니, 무엇보다 가장 큰 인복은 ‘흔치 않은 올케 복’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남동생이 여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서운해 뭐든 꼬투리 잡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 속에 아무리 돌이켜봐도 지금껏 남동생이 가장 잘한 일은 올케를 만난 일이다. “아이고 그 집 아들 효자네요.” 남들이 친정엄마에게 종종 건네는 그 말 뒤에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의 즐거움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가끔 설움의 눈물을 흘렸던 며느리, 올케의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맏이로서 동생들 챙기느라 또 애를 태웠다. 이제 다행히 모두 제 짝을 만나 잘 지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올케의 노력을 되짚어보면 뭐니뭐니해도 올케는 우리 집안의 복덩어리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행복한 복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엉뚱하게 먹을 복까지 가세한다. 엄마 음식 솜씨를 대물림해서인지 올케는 맛있는 음식도 곧잘 만들어 온 가족 입맛을 사로잡았고, 나 역시 솜씨가 조금 있기에 우리 집안은 건강하게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다 싶다. 아무튼 요즘 자식들이 결혼해 독립하고 나니 우리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다. 우리를 따라 미국에 와서 곁에 사는 올케에게 뭐든 챙겨주고 나누어 가지고 싶다. 자석처럼 끌리는 내 이 마음을 아는지 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 중 제일 나이가 젊은 올케는 요즘 부쩍 “형님 십 년 차이는 친구”라며 친숙하게 파고든다. 나 역시 “이렇게 잘 챙겨 주는 시누이 있는 올케는 복 받은 사람”이라며 장난스레 되받아친다. 세상에 나오는 순서는 있지만 가는 순서는 없다지 않나. 함께 하는 그 날까지 건강하게 늙어가며 친구처럼 의지하고, 주어진 이 복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다. 보통 회개하거나 반성하려면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 제가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나요?’라고 하라지만, 나는 사춘기 반항아처럼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감사하게 해주세요’라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복이 참 많아서 감사합니다.

2017-04-14

[박명희 교사의 '지평선']나는 오늘도 나비가 된다

한때 절친한 친구가 두 명 있었다. 그런데 둘이 달라도 어쩜 그렇게 다른지. 한 친구는 성격이 명확하고 확실해서 누군가 결정을 망설이고 있으면 칼같이 판단을 내려준다. 반면 다른 친구는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웬만한 일은 설렁설렁 넘기는 편이다. 마치 커피의 쌉쌀한 뜨거움과 그 위에 얹은 차가운 생크림의 조화 같았다. 늘 불안 불안하던 찰나 기어코 일이 터졌다. 어느 날 작은 일에서 의견인 엇갈려 오해가 생기고 감정의 골이 깊어 다툼이 되더니, 물과 불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미움만 커져 급기야 절교 선언까지 이르렀다. 그 순간이 나비효과와 같았다. 나도 가끔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이 커다란 실수로 번지는 잘못을 하면서도 되풀이한다. 다행히 잘 마무리되면 괜찮지만 잘못된 결과로 돌아오면 그제야 후회하며 마음 아파한다. 특히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예상찮게 생긴다. 사실 ‘문제 어른, 문제 부모’는 있어도 처음부터 문제 아이는 없다.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골치 아프게 한다면 그 아이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어른이 되돌아볼 일이다. 나도 가슴 저미는 경험을 하고서야 깨달았다. 20대 중반에 사범대를 갓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기 위해 내 생활기록부를 제출해야 했다. ‘성적은 우수하지만, 할머니와 살고 있음. 편협한 성격으로 교우 관계도 원활한 편은 아님’ 주어진 환경이 내 탓도 아닌데 괜스레 우울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교사 생활에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고운 점만 쓰겠다고 다짐하고 또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교사 생활을 시작하자 이 원칙은 까마득히 잊고 젊은 날의 혈기와 자만심이 더욱 커졌던 것 같다. 어느 날 겉보기에는 부족한 게 없는데 가출을 밥 먹듯이 했다가 며칠 만에 나타난 반 학생을 거침없는 말들로 나무랐다. 한참 뒤… 텅 빈 교실에 단둘이 남아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행동이 ‘새엄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순간 아이도 나도 복받치는 설움으로 울어댔고, 그제야 나의 첫 결심을 굳게 세울 수 있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흔하지 않은 그 학생과 같은 성을 가진 학생을 마주하면 그때가 떠올라 마냥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또 한 번 떠오르는 ‘나비효과’, 심리학적으로 나비효과는 작은 일이 원인과 결과가 되어 결국 큰일이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젊은 날 내가 저지른 잘못도 나비효과요, 그 일 하나로 나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 것도 나비효과인 셈이다. 긍정적인 나비효과의 경험은 짜릿하고 대가는 솜사탕처럼 달다. 나는 오늘도 인생의 의미 있는 순간을 위해 자그마한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된다. 비록 내 날갯짓 하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누군가 나로 인해 변화를 도전한다면 그게 곧 나비효과 아닐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2017-03-03

[박명희 칼럼] 처음이 중요하다

새해가 되면 비록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새로 다짐을 하며 무엇인가 해보려 한다. 처음으로 아이가 더듬거리며 맘마나 엄마라고 했을때 진심으로 기뻐하던 때를 떠올린다. 말문이 트여 병아리 같은 목소리로 보는것 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했을때 처음에는 얼마나 정성껏 대답을 해주었던가.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뭐가 그리 따지는게 많냐며 입을 막고,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라 하면서 어른 맘대로 결정하고 질문에 대한 답은 사라진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누군가에게 정말 궁금해서 질문을 했을 때의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산수에서 수학으로 고급진 이름으로 바뀐 중학교에서 인수분해와 함수라는걸 배우게 되었다. 왜 x와 y가 들어간 공식이 필요한지 계속 모르겠다고 질문을 했더니, 수학은 그냥 공식에 집어넣어서 푸는거라고 구박을 한다. 그 뒤로는 수학이나 과학같이 공식이 들어간 교과는 흥미를 잃어 점수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남녀공학을 꿈꾸었던 나는 수학의 비중이 적은 여자사범대로 진학하고 국어와 한문교사가 되었다. 톰과 메리를 처음 만나는 영어 공책은 음악 공책 오선지와 거의 같았다. 영어 알파벳은 인쇄체와 필기체가 왜 다른지 모르겠고, 가나다라 같이 확실하게 발음을 안하고, 때로는 소리를 생략하고, 혀를 도르르 말아서 하라는 발음기호가 이해가 안돼서 질문을 하는 나와는 달리 어느새 친구들은 발음기호에 맞춰 단어를 읽기 시작한다. 나는 그 뒤로 영어는 좋아하지만 발음은 엉망인 반푼수가 되어서 되도록 알아 듣기만 했는데, 어느 날부터 미국에서 영어로 말하며 살아 가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수학공식이 왜 생기는지를, 왜 영어발음기호를 외워야 하는지를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처음 배우고 가르치는 이의 역활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나이가 어리고 저학년일수록 경험은 많지만 처음의 눈높이에서 받아주는 담임교사들을 배치하는 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한다. 한글을 깨우친 후에는 만화로 시작하여, 야한 주간지, 문학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머리속에 떠오르는 온갖 멋진 문장을 이리저리 표절해서 숙제를 해갔다. 내 글을 읽은 국어선생님은 빙그시 웃으면서 책을 많이 읽어서 글의 깊이가 있다며,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만 보태서 다시 써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그 뒤로 미친듯이 글을 쓰다 어느해인가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 ‘분홍신’이라는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않는 유치찬란한 단편소설이 실렸을 때 나는 박완서나 최인호보다 잘 쓰는 작가가 되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아직도 해마다 신춘문예 공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틈틈히 글쓰는 즐거움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해주는 한마디의 대답이 상대방이 호기심이 생겨서 묻는 첫 질문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동안 함부로 내뱉은 말들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올해부터라도 누군가가 무엇을 묻는다면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말하리라 결심을 한다

20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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