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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기업 (44) 하나파이낸셜] 이민자 사업 키우며 전국 10대 팩토링 회사로 성장

이민 초기, 한인들에겐 꿈은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충분하지 못한 자본으로 낯선 땅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이민자들에게 은행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한인들의 잠재력을 믿고 이들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금융회사가 바로 하나파이낸셜(Hana Financial)이다. 1995년 창업 이래 한인들은 물론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키며 함께 성장했다. 18년이 지난 현재 하나파이낸셜은 한인 최대 팩토사를 넘어 미 전국 10대 팩토링 회사로 커나가고 있다.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나파이낸셜은 팩토링 전문 금융회사로 1995년 LA에 설립됐다. 현재 하나파이낸셜의 사업 분야는 팩토링과 주택ㆍ상업 모기지, SBA(소기업청) 지급보증 담보대출 등으로 확대됐다. 팩토링은 팩토사가 사업자로부터 매출 채권을 사들이면서 선수금을 지급하고 수금을 대행하는 상업금융 서비스를 말한다. 때문에 잠재력은 풍부하나 자금력이 부족한 업체들이 하나파이낸셜의 자금 지원을 등에 업고 비즈니스를 키워 올 수 있었다. 하나파이낸셜은 동부지역 업체들의 팩토링 수요를 예측, 2003년 뉴저지주 포트리에 지사를 설립했다. 이후 2005년 지사를 뉴욕시로 옮겼으며 현재 팩토링과 SBA 대출 업무를 위해 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회사 전체 팩토링 볼륨 중 42%를 뉴욕 지사에서 이뤄내고 있다. 서니 김(Sunnie Kim) 대표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 받아 2012년 언스트영과 LA비즈니스저널로부터 올해의 기업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금융위기는 없다=금융위기는 팩토사에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금융위기 이후 은행권의 대출 문호가 좁아지면서 많은 사업주들은 대체 자금조달 창구로 팩토링을 선택했다. 덕분에 하나파이낸셜은 2010년 팩토링으로 16억 달러의 실적을 올리며 전년 동기 대비 43%의 급성장을 이뤘고 2011년에도 6% 성장했다. 2012년에는 전체 실적 18억 달러로 5.8%의 꾸준한 성장을 기록했다. 일찌감치 팩토링 업무 외에 주택 및 상업 모기지와 SBA 대출 쪽으로 사업 방향을 다각화한 것도 금융위기와 그 후폭풍을 헤쳐나올 수 있는 힘이 됐다. 2012년 SBA 대출을 통해 1억1600만 달러의 자금을 중ㆍ소기업에 지원했으며 미국 전체 2487개 렌더 중 대출 규모로 18위, 한인 은행을 포함한 한인 금융권 순위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하나파이낸셜 측은 "2012년엔 SBA 대출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동시에 신용평가사인 S&P로부터 SBA 포트폴리오 A등급을 획득한 덕분에 SBA 론포트폴리오를 토대로 자체 본드(Bond)도 발행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재 채용 3대 비밀=서니 김 대표는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 관리라고 믿는다. 직원을 뽑을 때 개인의 경력이나 경험보다는 자질ㆍ태도ㆍ열정 등 3개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특히 금융업은 직원들이 정확하고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의 신뢰 없이는 기업 경쟁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들이 팀을 이뤄 혼자 일할 때보다 더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김 대표가 신경쓰는 부분이다. 김 대표는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어려운 순간을 만나기 마련인데 그 때마다 최선을 다하라(Do my best), 올바른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 목표는 높이 정하라(Aim high)를 마음에 새긴다"며 "현재 직원의 50%는 한인이 아닌데 2013년에는 한인 커뮤니티는 물론 주류시장을 겨냥하며 사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하나파이낸셜=▶1995년 창립 ▶2003년 동부지점 뉴저지주 포트리에 오픈 ▶국제팩토링협회(FCI) 가입(73개국 260여 개 회원사 중 미국 회원사 총 10개 뿐임) ▶2005년 동부지점 뉴욕시로 이전 ▶2008년 SBA 대출 자체 승인 자격(PLP) 획득 ▶2010년 모기지 뱅킹 시작 ▶2011년 조지아주ㆍ메릴랜드 SBA 대출 사무소 설립 ▶2012년 오렌지카운티ㆍ샌가브리엘밸리 주택 모기지 사무소 설립 ▶직원수: 140명 ▶웹페이지: www.hanafinancial.com ▶연락처: 본사 1000 Wilshire Blvd., 20FL, LA, CA. 213-240-1234. 뉴욕지점 1410 Broadway, #1102, NY, NY. 212-240-1234.

2013-01-20

[성공기업 (42) 뱅크아시아나] 커뮤니티와 함께 묵묵히 성장하는 신생 은행

지난 12일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뱅크아시아나 본점에 한인 주요 봉사단체 대표와 임원들이 모였다. 이들이 은행으로 향한 이유는 창립 5주년을 맞은 뱅크아시아나가 8개 단체에 총 2만 달러의 후원금을 전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허홍식 행장은 "창립 5주년 기념식을 거대하게 치르는 대신 행사 비용을 추운 계절 우리의 이웃들과 따뜻하게 나누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5년간 뱅크아시아나가 걸어온 길에는 은행의 고객도 있었지만 커뮤니티의 소외된 이웃들도 있었다. 뱅크아시아나는 고객과 사업주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수익금의 일부는 사회에 꾸준히 환원하면서 묵묵히 성장해 왔다. ◆고객과 눈 맞추는 은행=뱅크아시아나를 설립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립된 것은 2006년이다. 한인사회에 바탕을 둔 은행은 맞지만 이를 넘어선 더 큰 의미로 커뮤니티를 품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름은 뱅크아시아나로 정했다. 2007년 11월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본점을 열면서 고객들에게 보다 가깝게, 편리하게 다가서는 은행이 되기로 했다. 과감하게 텔러 스테이션을 없앴다. 대신 책상과 의자를 설치했다. 바로 앞에서 고객들과 눈을 맞추기 시작하자 고객들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고객들의 필요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더욱 신속하게 할 수 있게 됐다. 고객 만족도가 높아지며 은행의 위상도 높아져 갔다. 은행의 실적이 향상된 것은 물론이다. ◆금융위기를 기회로=설립 후 얼마 되지 않아 금융위기를 맞았다. 부실 대출 정리에 급급했던 은행들과 달리 뱅크아시아나는 상대적으로 충격이 적었다. 대신 리스크를 관리하며 위기를 기회 삼으며 건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2010년에는 연방 재무부 산하 지역사회 발전 금융기관기금(CDFI)으로부터 인증을 받아 자본금을 늘렸다. 한인은행으로서 소기업 지원을 통해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자산 대비 자본금 비율이 16%까지 높아지면서 보다 튼튼한 은행이 됐고, 대출 한도 역시 높아지는 효과를 누렸다. 지난 6월에는 은행 평가기관인 바우어파이낸셜로부터 최우수 등급인 별 5개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허홍식 행장은 "앞으로도 소기업청(SBA) 지급보증 대출 등을 통해 한인들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앞으로도 계속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은행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뱅크아시아나=▶2006년 4월 은행 설립 추진위원회 구성 ▶2007년 11월 17일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에 본점 설립 ▶2008년 9월 뉴저지 포트리 지점 개점 ▶2011년 5월 뉴욕 플러싱 지점 개점 ▶2012년 6월 바우어파이낸셜로부터 최우수등급인 별 5개 수상 ▶자산: 2억1000만 달러, 대출 1억7000달러, 예금 1억6500달러, 순익 200만 달러(2012년 12월 말 기준) ▶직원수: 40명 ▶연락처: 팰리세이즈파크 지점 201-313-5400, 포트리 지점 201-585-7707, 플러싱 지점 718-888-0020.

2012-12-23

[성공기업 (40) 다모아] 한결 같은 화장품 사랑으로 이어온 35년

"직원들을 믿고, 고객의 필요를 충족한 덕분에 35년간 다모아를 운영해 올 수 있었습니다." 리지필드ㆍ포트리ㆍ플러싱 등 주요 한인 상권에서 어김 없이 만날 수 있는 화장품점이 있다. 상호는 '다모아'. 이름에서부터 유명 화장품은 다 모아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현재 뉴욕ㆍ뉴저지ㆍ버지니아주에 9개 다모아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혁군 사장은 "화장품이 너무 좋아 빠져 살다 보니 어느새 환갑이 넘었다"며 "이제는 사업 확장보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매장을 찾는 고객들이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날 수 있는 다모아로 만들어 가고 싶다"고 말했다. ◆꿈이 있는 사람='아름다운 꿈이 있는 사람들은 모여라'라는 뜻의 다모아는 지난 1977년 워싱턴주에서 시작했다. 다양한 화장품 브랜드를 판매하며 유명 화장품 전문점으로 자리를 굳혔지만 한 사장은 뉴욕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더 큰 무대에서 승부하고 싶다는 욕심에 다모아는 1980년 맨해튼 32가로 매장을 옮겼다. 그 뒤 지난 32년간 플러싱은 물론 뉴저지ㆍ버지니아주까지 확장했다. 현재 9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시슬리ㆍ시세이도ㆍ SK-Ⅱㆍ폴라 등을 한 자리에서 구입할 수 있는 종합 화장품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열정이 기회로=다모아를 처음 만든 한 사장은 화장품 브랜드 폴라에서 영업사원부터 시작한 업계의 대모다. 당시 사회 경험도 없는 초년생이었지만 한 사장은 6개월이라는 최단 기간만에 디렉터로 임명되며 능력을 인정 받았다. 그는 "화장품이 너무 좋아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뛰었을 뿐인데 업계에서 점점 유명해졌다"며 "덕분에 회사의 지원으로 처음 워싱턴에 '다모아'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모아의 또 다른 성장 기회는 맨해튼에서 찾았다. 맨해튼으로 매장을 옮긴 뒤 어느 날 시세이도 미주지사 부사장이 직접 매장을 방문한 것이다. 평소 세계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취급하고 싶었던 한 사장은 자신의 비즈니스 철학과 열정을 보였고, 부사장은 그의 뜨거운 에너지와 가능성을 알아봤다. 한 사장은 "매장을 찾아왔던 시세이도 임원이 나를 신뢰했고, 그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열정은 곧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직원이 재산=한 사장은 다모아의 중요한 성공 비결로 '열정 있는 정직한 직원'을 꼽았다. 지리적으로 여러 곳에 매장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사장이 모든 매장을 직접 돌아볼 수 없다. 이러한 특성상 한 사장은 각 지점의 직원들을 신뢰하며 이끌어 가야 했다. 때론 직원에게 매장을 전격적으로 맡겼으나 사업 수완이 부족해 실패한 경우도 있었고, 갓 입사한 직원에게 열쇠를 맡겼다가 제품들을 통째로 도둑맞기도 했다. 한 사장은 "실패도 경험했지만 누군가가 나를 믿었기에 기회를 얻게 된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믿고 기회를 주고 싶다"며 "끊임없이 젊은 직원들을 발굴해 능력을 키우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 사장에 따르면 한 번 입사한 직원들은 평균 5~7년을 일하며, 최근엔 20년을 함께한 직원의 환갑 잔치도 열어 기쁨을 함께 나눴다. 또 한 달에 한 번 각 지점의 매니저들과 모임을 갖고, 제품 교육은 물론 고객 관리 등에 대해 활발히 의견을 나눈다. ◆고객 요구에 귀 기울여=다모아의 또 다른 강점은 고객의 요구에 맞춰 업계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장은 한국 시장에서 인기인 시슬리ㆍSK-Ⅱ 등의 브랜드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수요도 높아지고 있음을 파악했다. 이에 다모아는 지난해 5월부터 그 동안 주로 취급해온 시세이도와 함께 시슬리ㆍSK-Ⅱ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고객들의 수요를 따라 현재 맨해튼 진출도 다시 타진 중이다. 1980년 맨해튼 32가에서 뉴욕 첫 매장을 오픈한 지 약 15년만에 브랜드 고급화를 위해 맨해튼 5애브뉴로 이전했으나 리스 재계약 때 렌트 부담으로 2000년대 초 결국 맨해튼 매장을 정리했다. 한 사장은 "더 이상 맨해튼 시장의 고객들을 외면할 수 없어 다시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고객들의 필요와 눈높이에 맞춘 상품과 서비스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오윤경 인턴기자 dhkim@koreadaily.com ◆다모아=▶1977년 워싱턴주에서 설립 ▶1980년 맨해튼으로 이전 ▶2001년 시세이도 본사로부터 감사패 수상 ▶2011년 시슬리ㆍSK-Ⅱ 딜러십 획득 ▶직원 수: 30여 명 ▶연락처: 플러싱 유니온스트릿(718-539-6999)ㆍ뉴저지주 리지필드 H마트 매장(201-941-9009).

2012-12-09

[성공기업 (30) 시티헌터] 고급 모자 브랜드 하나로 세계 시장을 이끈다

"모자 하나만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사업을 합니까." 박성양(52) 대표는 답한다. "모자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아느냐. 춘하추동, 남녀노소.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쓸 수 있으니 시장의 개척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뉴저지주 칼스타드에 있는 시티헌터는 고급 모자 전문회사다. 춘하추동, 남녀노소를 위해 이 회사가 연간 만드는 모자는 디자인만 1000여 가지. 1994년 시티헌터가 만들어진 이래 패션 모자부터 스포츠 모자까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든 사람들이 계절마다 즐겨 쓸 수 있는 모자를 개발ㆍ제조ㆍ수입ㆍ수출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박 대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을 소중히 여기는 시티헌터의 가치관은 디자인 개발의 중요성을 알게 했고, 가격 경쟁이 심한 모자 시장에서 경쟁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도시를 공략하라=시티헌터 본사에 들어서면 커다란 세계지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또 다른 세계지도는 박 대표 방에도 걸려 있다. 21년 전인 1991년. 맨해튼에서 손에 모자를 들고 직접 걸어 다니며 팔았던 박 대표는 1994년 '브랜드가 경쟁력'이란 생각으로 시티헌터를 만들었다. '도시의 사냥꾼'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도시를 공략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다. 해외로 수출을 할 때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판매망을 확대했다. 현재 시티헌터 브랜드를 단 모자들은 미국은 물론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 등 전 세계 80여 개국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박 대표는 "엄격한 품질 관리와 원단 개발, 매 시즌마다 새롭게 선보이는 다양한 디자인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며 "지금도 색다른 디자인 개발과 직접 썼을 때의 모양과 편안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거로 미래를 본다=시티헌터는 매년 평균 20% 정도 꾸준히 성장했다.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인 모자를 취급하다 보면 '히트 아이템'에 힘입어 계단형 성장을 했을 법도 한데 박 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오른 손을 비스듬하게 세워 완만한 비탈을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했다는 뜻이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서 욕심부리지 않는 법을 배웠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시장의 필요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될 성 부른 아이템이 하나 '터졌다'. 감각을 믿고 대량 주문했는데 욕심이 지나쳤다. 많은 재고를 떠 안아야 했다. 지금도 가끔 눈에 들어오는 아이템들이 있다. 욕심이 100을 넘어 120까지 갈 때도 있지만 70정도를 주문하는데 그친다. 없어서 못 팔 때도 있지만 과한 욕심 부리지 않고 조금씩 성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속도 조절은 필수=내 뜻과 상관 없이 시장 상황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릴 때도 있었다. 2000년대 초 중국의 값싼 물건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고, 9ㆍ11 사태까지 터졌다. 박 대표는 "70~80마일로 달릴 수 있을 땐 속력을 냈지만 30~40마일로 줄여야 할 땐 뒤로 한발 물러나 속도를 줄이고 디자인 개발과 시장 개척에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시티헌터의 차별화된 디자인과 우수한 품질은 결국 소비자가 먼저 알아봤다. 값싼 물건을 찾아갔던 거래처들도 다시 시티헌터의 제품을 찾아왔다. 박 대표는 "각 계절에 맞는 모자들을 계속 개발했고, 독특한 디자인이 시장에서 통했다"며 "과도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속도를 조절하며, 조용하게 시장을 넓혀 나가다 보니 특별히 불경기도 없었다"고 말했다. ◆성공의 비결은 새벽=박 대표는 "새벽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고 강조했다. 새벽엔 생각이 맑기 때문에 사업계획을 세우거나 아이디어를 내기에도 좋다는 설명이다. 시티헌터를 크리스찬 기업이라고 소개한 박 대표는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섬기고 나누는 기업,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회사로 경영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 대표는 현재 대뉴욕지구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과 뉴욕 극동포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시티헌터 ▶1991년 박성양 대표 맨해튼에서 모자 판매 시작 ▶1994년 브랜드 시티헌터(City Hunter) 런칭 ▶1996년 중남미ㆍ유럽 지역 수출 시작 ▶1999년 아시아 지역 수출 ▶2002년 칼스다트 사옥 매입 이전 ▶2010년 아프라카 지역 수출 ▶연간 1000여 가지 아이템 개발 ▶연락처 201-507-9985, www.cityhuntercapusa.com.

2012-12-02

[성공기업 (39) 누리건설] 단단한 시공ㆍ수려한 디자인으로 명성 쌓았다

1일 퀸즈 테라스온더파크에서 열린 올해 퀸즈브롱스건축협회(QBBA) 시상식에서 한 시공업체가 두 개의 건축상(QBBA Building Award)을 수상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주인공은 바로 누리건설. 누리건설이 시공한 하츠데일 H마트와 맨해튼 키푸드는 수많은 경쟁작을 제치고 시상대 위에 우뚝 섰다. 단단한 시공과 수려한 디자인 두 덕목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누리건설과 이상준 사장을 만났다. 사세 확장=건축공학과를 졸업 후 한국과 뉴욕에서 10여 년간 건설회사에 근무해 오던 이상준 사장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건물을 세우고 싶은 생각에 지난 1998년 누리건설을 설립했다. 이 사장은 "처음 설립 후 3~4년은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고용할 형편이 안돼 집 지하실에 설계 도면을 깔고 홀로 설계ㆍ견적ㆍ자재 구입ㆍ현장 관리를 도맡아 처리했다"며 "쌓아 놓은 신용과 노하우가 부족해 어디서 언제 입찰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고군분투하던 이 사장은 중국업체의 염가 공세와 다른 한인업체의 오랜 경험에 대적하기 위해 과감히 디자인 부문에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주어진 도면대로만 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내ㆍ외관을 구현하는 데 도전한 것. 이를 위해 이 사장은 디자인 전문업체 SD90디자인의 신용진 대표와 손을 잡고 디자인 설계 의뢰ㆍ디자이너 교류 등 당시 관행으로선 획기적인 시도를 이어나갔다. 이 사장은 "디자인 측면을 강화하니 서서히 수주가 늘어났다"며 "수주한 건물을 성공적으로 완공하니 자연스레 회사 신용도가 올라갔고, 이 것이 또 다른 수주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선순환이 반복돼 누적된 우수한 실적과 재무 구조를 바탕으로 누리건설은 뉴욕시정부가 발주한 관급공사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며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2008년 초에는 퀸즈 화잇스톤에 자체 사옥까지 구입하는 등 탄탄대로가 이어지는 듯했다. ◆경기침체 극복="2008년은 한인 건설업체들에게 지우고 싶은 한 해였다." 경기에 특히 민감한 건설업은 서브프라임 파동을 직격으로 맞았고, 누리건설 역시 예외는 없었다. 지역 내 소규모 공사부터 관급공사까지 건설 수요가 말라 기존의 영업 전략으로는 수익을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이 사장은 "고육지책으로 상대적으로 미국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한국 대기업 지상사 관련 입찰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끝에 삼성ㆍ신한은행ㆍ한국타이어 사무실 시공을 맡아 경영 위기를 어느 정도 타개할 수 있었다"며 "그 동안 쌓아왔던 신용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이 사장은 QBBAㆍ퀸즈 상공회의소 등이 주관하는 건축 공모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는 한편, 이전에 취득한 뉴욕ㆍ뉴저지ㆍ커네티컷 등 주정부와 나소ㆍ서폭 등 카운티 단위 면허를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신용을 쌓는 데 주력했다. 그는 "건설업계는 그 어느 업계보다 신용이 중요한 곳"이라며 "수주한 건물은 관리 당국과 일체의 잡음 없이 한 번에 완공시키고, 완공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후 관리를 제공한다. 우리가 지었던 건물 중 이번 허리케인 '샌디'로 침수 피해를 입은 곳은 무상으로 수리해 줬다"고 말했다. ◆앞으로 15년=현재 누리건설이 중점을 두고 입찰에 나서는 분야는 수퍼마켓 시공. 이번 QBBA 건축상을 받은 두 작품 모두 수퍼마켓 건물이다. 수퍼마켓 시공은 일반 상업주거용 건물과 달리 고객의 동선ㆍ냉동 시스템 구성ㆍ실내 인테리어 등이 한 곳에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누리건설의 멀티플레이어 기질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사장은 "누리건설을 설립하고 15년 동안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지어왔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누리건설의 이름으로 맨해튼에 고층 빌딩 하나를 통째로 짓는 것"이라며 "내 자신이 못하더라도, 지금껏 나와 함께 일해온 우리 직원들이 해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을 맺었다. 서동수 기자 fdoseo@koreadaily.com ◆누리건설=▶1998년 플러싱 이상준 사장 자택 지하실에서 출발 ▶2001년 노던블러바드 첫 사무실 개설 ▶2008년 화잇스톤 자체 사옥 매입 ▶2012년 9월 현재 위치(플러싱 칼리지포인트)로 사무실 이전 ▶계열사: SD90디자인(서울시 서초동) ▶연간 매출: 1000만 달러 ▶직원 수: 10명 ▶하청업체 수: 40여 업체 ▶수상 내역: 퀸즈 상공회의소 우수 건축상(2003, 06, 08, 09, 10년)ㆍQBBA 건축상(2010, 12년) ▶연락처: 718-762-7007.

2012-12-02

[성공기업 (38) 동부관광] 매년 10만 명 이상 이용하는 한인 여행사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다." 고대 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인생에서 여행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행은 분명 삶을 풍요롭게 하고 견문을 넓히는 마음의 비타민임에 틀림없다. 1993년 플러싱에서 시작한 동부관광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주 한인과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다양한 여행지를 소개하며, 여행업계 트렌드를 주도해왔다. 조규성 동부관광 대표는 "매년 동부관광을 통해 여행을 떠나는 10만명 이상의 한인들과 한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한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뉴욕을 대표하는 한인 여행사로 또 다른 도약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아이비리그 투어로 대박=개업 당시 동부관광은 뉴욕 시내 관광과 워싱턴DC, 나이아가라를 차로 여행시켜주는 소규모 여행사였다. 대부분 미니밴으로 투어를 하던 시절 한인 여행사 최초로 25인승 중형버스를 운행하며 차별화를 꾀했다. 조 대표는 "직접 운전하고 가이드까지 1인다역을 하며 발로 뛰었다"며 "25인승 버스를 내세워 모객을 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다른 업체들과 다른 독자적인 콘텐트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다양함을 추구하는 고객의 입맛에 맞는 상품 개발이 절실했다. 그래서 이듬해 내놓은 것이 바로 보스턴ㆍ뉴포트ㆍ화잇마운틴 여행상품이었다. 명문대학이 모여있는 보스턴을 둘러보고, 호화맨션이 즐비한 휴양도시 뉴포트와 미국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화잇마운틴의 절경을 감상하는 코스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화잇마운틴이 잘 알려지지 않아 초반에는 고객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 대표는 "2명을 데리고도 투어를 가봤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길게 봤다"며 "결국 이 상품이 효자상품인 미 동부 아이비리그 투어 패키지를 내놓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1996년 항공권 판매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미국은 물론 유럽ㆍ남미ㆍ아시아 등 해외여행 상품까지 판매 범위를 넓혔다. ◆투자와 동시에 자선사업=조 대표는 동부관광의 성장 동력으로 투자와 나눔을 꼽았다. 과감한 투자가 여행 서비스와 상품을 업그레이드하고, 결국 고객 만족도도 높일 수 있었다. 그는 "대형버스, 2층 버스 구입과 직업 워크숍 등 투자를 통해 양적ㆍ질적 성장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동부관광이 보유하고 있는 대형버스와 2층 버스, 밴은 총 20여 대. 특히 맨해튼 투어를 위한 2층 버스를 보유한 한인 여행사는 동부관광이 유일하다. 또 매년 워크숍을 통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와 친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조 대표는 "한국에서 관광 오는 한국인들은 한국의 질 높은 서비스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다"며 "상대적으로 뉴욕 지역 서비스가 뒤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 서비스를 직접 경험하고, 동부관광에 접목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동부관광은 커뮤니티 환원에도 적극적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연간 수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자선사업에 지출하는 것은 조 대표의 신념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동부관광은 9ㆍ11 참사 이후 8개월간 뉴욕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서 고비를 맞았다. 그는 "수입이 거의 없어 직원들 월급도 빌린 돈으로 줬다"며 "한 번 힘든 과정을 겪어보니 사람이 있을 때 남을 돕는 게 아니라 없어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2001년 뿌리교육재단의 모국방문과 명문대 탐방 지원이다. 이밖에 소년소녀 가장 미국 연수 지원, 효도관광 등을 펼치고 있다. ◆종합레저타운 준비=동부관광은 올해 홈페이지(www.dongbutour.com)를 모두 개편, 호텔과 패키지 여행을 실시간으로 예약할 수 있도록 했다. 온라인 여행업체인 익스피디아닷컴과 협력해 이 업체가 제공하는 호텔 딜과 동부관광이 제휴한 숙박업소까지 가격 비교와 예약을 할 수 있게 한 것. 브로드웨이 뮤지컬 예약도 가능하다. 또 여행뿐 아니라 리조트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7월 알바니 인근에 있는 샤론 스프링스 온천을 350만 달러에 인수하고 이 곳에 대규모 리조트를 조성할 예정이다. 조 대표는 "온천을 기반으로 호텔, 골프장, 찜질방, 스파 등을 조성해 종합레저타운으로 탄생시킬 것"이라며 "오는 2014년 5월까지 1100만 달러를 투자해 40개 객실 규모의 부티크 호텔과 노천탕, 마사지숍 등을 오픈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투자자를 모집해 3개 호텔을 추가로 개발하고, 각종 편의시설을 세울 것이라는 게 조 대표의 계획이다. 그는 "리조트 사업을 통해 한인은 물론 주류시장까지 파고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동부관광=▶1993년 플러싱에서 설립 ▶1994년 한인여행사 최초로 보스턴ㆍ뉴포트ㆍ화잇마운틴 상품 출시 ▶1996년 항공권 판매 시작 ▶2007년 나이아가라에 350석 규모 한식ㆍ일식당 인수 ▶2011년 샤론 스프링스 온천 매입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본사를 비롯, 맨해튼, 베이사이드, 나이아가라, 서울 등 총 4개 지사 운영 ▶직원수 100여 명 ▶연간 이용 고객 12만~15만 명.

2012-11-18

[성공기업 (37) 이코노보험] 재계약 비율 95%…고객 우선주의로 신뢰 구축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이코노보험 직원들은 9일 오전, 10여 일 만에 처음으로 회사로 출근했다. 지난달 말 동부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 '샌디'로 뉴저지 오피스가 있는 건물이 정전된 지 열 하루 만에 복구됐다. 박명근 대표는 "보험업계에서 활동한지 30여 년만에 샌디와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며 "회사가 있는 건물이 정전되는 바람에 혹시라도 불편을 겪은 고객이 있을까 가장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사무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11일 동안 다른 회사의 사무실, 박 대표의 집을 오가며 힘들게 일한 직원들 역시 전화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고객들이 난감하진 않았을 지를 가장 걱정했다. 이러한 이코노보험의 고객 우선주의가 바로 지난 20년간 회사를 꾸준히 성장시켜 온 원동력이다. ◆샌디가 남긴 것들=1992년 맨해튼에서 설립한 이코노보험은 올해로 개업 20주년을 맞았다. 박 대표는 "다른 어떤 재해 때 보다 클레임이 열 배 가량은 더 많았다"며 한인 사업주들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내비쳤다. 당장 이코노보험부터 10여 일간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 못했다. 29일 샌디가 북상한 뒤 30일부터 정전이 됐다. 무엇보다 회사 전화와 인터넷이 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회사 대표번호를 박 대표의 휴대전화로 전화로 포워딩하고, 직원들은 각자의 휴대전화로 보험사와 연결해 고객들의 클레임을 처리했다. 박 대표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에서 직원들이 정상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애써줬고, 고객들도 불편했을 텐데 이해하고 격려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며 "다행히 인터뷰를 하는 날 아침에 전기가 들어와 사무실에서 차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떠나지 않는 고객들=이코노보험은 고객의 재계약률이 약 95%에 이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고객 우선주의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온 결실이기 때문이다. 보험 갱신을 앞두고 보험료가 크게 오를 경우 직원들은 고객에게 맞는 더 나은 보험이 있는지 알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가격 경쟁을 하기 보다는 고객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줄 수 있는 보험을 소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면 그 차이는 극명히 드러났다. 고객 만족도는 재계약은 물론 신규 고객 확대로 이어졌다. 이코노보험의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들이 지인들에게 스스로 이코노보험을 소개했고, 그렇게 소개받은 새로운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회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박명근 대표는 "금융위기 영향으로 2009년엔 재계약률이 80%까지 떨어졌는데 경기침체로 문을 닫는 회사들이 많아진 것이 이유"라며 "유일한 마이너스 성장을 한 해인데, 지금도 비즈니스를 포기해야 했던 고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20년을 꿈꾸며=이코노보험은 창립 초기부터 빌딩보험이나 사업체의 상해ㆍ화재보험, 종업원 복지 관련 보험 등을 주로 취급해 왔다. 현재 전체 고객 중 건강보험은 40%, 그 외 종합보험은 60% 정도를 차지한다. 박 대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이 20년간 이끌어 온 이코노보험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건강보험 개혁이 완전히 이뤄지면 건강보험 관련 브로커나 에이전트의 수입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이코노보험도 새로운 사업 모델이 필요하다. 자동차나 주택 등 그동안 초점을 맞추지 않았던 개인 보험 분야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큰 회사나 기업체를 대상으로 서비스해 온 노하우가 있어 개인 보험 고객들도 높은 만족도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한인사회 경재력이 커진 만큼 VIP센터를 만들어서 풀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어 "이번에 뉴욕ㆍ뉴저지 지역을 강타한 샌디의 피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아직도 어려운 중에 있는 분들도 있으나 각자가 자신의 보험을 재점검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명근 대표는 현재 뉴저지한인무역협회 회장과 재미주재원클럽 부회장, 대뉴욕지구한인보험재정인협회 이사, 전미보험인협회(PIA) 뉴욕ㆍ뉴저지지부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이코노보험=▶1992년 9월 맨해튼에서 설립 ▶삼성화재ㆍ척보험사 등 대형 보험사 한인 에이전시로 활동 ▶2007년 포트리에 뉴저지 오피스 설립, 본사 뉴저지로 이전 ▶2007년 버추얼 오피스 중국 텐진에 설립 ▶2011년 보험사 트레블러스, 핫포드 등의 상품 직접 거래 ▶직원 수: 10명 ▶2012년 연간 실적(보험료 총액) 약 2000만 달러 ▶연락처: 뉴저지 오피스 201-592-6998, 뉴욕 오피스 212-695-9444.

2012-11-12

[성공기업 (36)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 에어컨 시공사에서 종합 설비회사로 도약

허리케인 '샌디'가 동부지역을 강타한지 나흘째인 지난 2일 오전 7시, 뉴저지 버겐필드에 있는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의 직원들은 새벽부터 하루 일정을 확인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나흘째 정전이 이어지고 있고, 히터 가동을 위한 발전기 연결 등의 문의가 유한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윤모 사장은 "정전이 되면서 발전기 작동이나 히터 연결, 발전기로 인한 전기 문제 등을 의뢰하는 고객들이 많아 무척 바쁘다"며 "지난 10여 년간 '그날 갑니다'라는 고객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서비스해 왔기 때문에 직원들이 밤 늦게까지 뛰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ㆍ플러밍 라이선스 획득=2012년은 여러모로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에게 의미 있는 한해다. 물론 최근 며칠 동안은 허리케인의 후폭풍으로 정신없이 바쁘지만 사실 유한은 앞으로 더 바빠질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회사다. 올해 이 사장이 뉴저지주 플러밍 전문가 자격증을 획득하면서 한인 회사로는 이례적으로 전기ㆍ플로밍 라이선스를 모두 가진 종합 설비회사가 됐다. 지난해 유한에서 파트너로 일하고 있는 저스틴 서 이사가 전기기술자 자격증을 받은 이후 올해 '유한 일렉트릭&파이어 알람'을 만들었다. 전기 분야에서 25년 이상 일해온 전문가를 파트너로 영입했다. 유한 일렉트릭이 생기면서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과 함께 '유한 가족'으로 묶을 모회사가 필요했다. 지난달 유한 종합설비(Yuhan Mechanical Company)를 만든 이유다. 1997년 스물 아홉의 이 사장은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이름을 따서 '유한'이라는 개인회사를 만들고 에어컨을 고치기 시작했다. 15년이 지난 2012년, 유한은 히터&에어컨 시공ㆍ수리ㆍ관리, 전기 전문, 플러밍 전문(설립 예정) 등 3개 회사를 산하에 둔 종합 설비회사로 첫 걸음을 내딛고 있다. ◆백인 시장 침투=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의 경쟁력은 조직화가 힘든 분야에서 체계적인 조직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물론 기술직이니 탁월한 기술력으로 꼼꼼히 일을 처리하는 것은 기본이다. 일반적으로 기술직 종사자들은 개인이나 가족이 소규모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장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 '일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혼자 할 수 없는 시점이 온 것이다. 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행정 업무를 맡아줄 파트너 저스틴 서 이사와 손을 잡고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2001년 개인회사를 법인으로 바꾸고 현장 파견 직원들을 관리하는 사무실 직원을 두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한인은 물론 타민족 시장에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 사장은 "철저한 백인 시장이었는데 가격 경쟁력과 꼼꼼한 일 처리, 업무시간을 넘겨서라도 일을 끝내주는 성실성이 통했고 니치마켓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부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체계적으로 준비한 덕분에 학교나 정부건물의 히터ㆍ에어컨 시공이나 관리를 맡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2004년부터 준비한 전기기술자 자격증을 서 이사가, 올해는 플러밍전문가 자격증을 이 사장이 받으면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직원들이 꿈꾸는 회사=이 사장은 "긍정적인 생각과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연성이 지금의 유한이 있게 했다"면서 "적절한 때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성장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많고, 또한 넓다. 때문에 이 사장은 "유한은 프론티어 정신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기술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려면 로컬 비즈니스로 자리잡아야 하고, 지금은 조심스럽게 중부 뉴저지나 맨해튼으로의 브랜치 확장도 계획하고 있다. 이 사장은 "회사가 계속 발전해야 직원들도 꿈을 가지고 계속 일할 수 있다"면서 고객들을 위해서는 "우리 업종은 일을 잘하냐도 중요하지만 애프터서비스를 얼마나 빨리 해줄 수 있느냐도 중요한데 앞으로도 빠르게 뛰어 고객을 찾아가는 유한이 되겠다"고 덧붙였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1998년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으로 관련 업무 시작 ▶2001년 법인회사 유한 리팅&에어컨디셔닝 설립 ▶2007년 정부사업 입찰 자격(MBE증명서ㆍ퍼블릭 워크 라이선스) 획득 ▶2011년 저스틴 서 이사 뉴저지주 전기기술자 라이선스 획득 ▶2012년 이윤모 사장 뉴저지주 플러밍전문가 라이선스 획득 ▶2012년 홀딩컴퍼니 유한 종합설비(Yuhan Mechanical Company) 설립. 산하에 전기전문 유한 일렉트릭&파이어 알람 설립. 유한 히팅&에어컨디셔닝도 자회사로 편입 ▶연락처: 201-945-9797. www.yuhanhvac.com.

2012-11-04

[성공기업 (35) 아이리스 네일] 업소 성장ㆍ부동산 투자,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7개 지점을 두고 있는 대형 네일살롱 '아이리스 네일'은 경영과 함께 부동산 투자에도 성공했다. 아이리스 네일은 지점을 최대한 분산시켜 경기침체 등 외부 요인에 따른 매출 감소 영향을 최소화 하고, 프로페셔널 한 서비스 마인드로 경쟁이 치열한 네일업계에서 성공을 일궜다. 또 지난 2004년과 2008년 맨해튼 어퍼웨스트 매디슨애브뉴와 한인타운 인근에 리테일 스토어 매장을 인수하면서 렌트 부담을 최소화하고, 임대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부부 합작품=아이리스 네일은 남편 박광해ㆍ부인 박경미 공동대표가 이뤄낸 합작품이다. 맨해튼에서 델리를 운영하며 사업 수완을 키운 박광해 대표와 네일 기술자로 일하며 경력을 쌓은 박경미 대표가 지난 1993년 맨해튼 3애브뉴와 75스트릿에 400스퀘어피트 규모로 시작한 네일살롱이 시작이다. 박광해 대표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의 승패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위치 선정"이라며 "좋은 위치를 잡고 매장을 오픈해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 되 팔아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는 식으로 지점 수와 규모를 늘려나갔다"고 말했다. 박 대표 부부가 지난 20여 년간 뉴욕에 개업한 매장은 17개. 이 가운데 현재 7개를 운영하고 있다. 박 대표 부부는 가장 성공적인 위치 선정으로 어퍼이스트 지역을 꼽았다. 아이리스 네일이 탄생했던 곳도 이 곳이었고, 현재도 두 곳의 매장을 이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다. 나머지 5개 매장은 미드타운과 다운타운, 브루클린 등에 있다. 박광해 대표는 "어퍼이스트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맨해튼 최상류층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가 많고, 경기도 비교적 덜 타 1호점 출발을 이 곳에서 하게 됐다"며 "93년도 개업을 위해 센트럴파크 이스트부터 1애브뷰 지역의 60~96스트릿을 3개월간 직접 걸으며 시장조사를 해 살롱 장소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당시 성업 중이던 네일살롱은 87개. 이 가운데도 렌트가 비교적 저렴한 1~2애브뉴에 살롱이 몰려 있었다. 고심 끝에 렌트는 배 가까이 비싸지만 경쟁업소가 비교적 적은 3애브뉴에 문을 열게 됐다. 예상은 적중했다. 마땅한 네일살롱이 많지 않았던 주민들은 아이리스 네일을 찾았고, 작은 살롱에서 일주일에 5000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살롱 경영에 직접 나선 아내 박경미 대표는 "상류층 고객 공략은 의외로 간단했다.며 .철저한 일대일 서비스와 에티켓이 열쇠였다"고 말했다. 고객이 들어오면 담당자가 직접 입구에서 자리까지 안내해 손톱을 다듬었다. 또 매장 내에서는 고객 앞에서 절대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음식물을 먹는 등 에티켓에 어긋나는 행위는 금지시켰다.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도 발벗고 나섰다. 당시 여성 노년층 고객이 많아 어릴 적 할머니에게 안마해 주는 마음으로 매니큐어를 하면서 어깨를 주물러 줬다. 그는 "고객과 더욱 친근해 지기 위해 했던 마사지가 반응이 굉장히 좋아 상품화했다"며 "아이리스 네일이 미니 마사지 서비스를 시작한 맨해튼 첫 살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터닝포인트=아이리스 네일의 큰 터닝포인트는 지난 2004년 현재의 매디슨애브뉴 선상 81스트릿 인근의 상가 자리를 320만 달러에 매입한 것이다. 박광해 대표는 "매디슨애브뉴는 매상이 안정적이긴 하지만 어퍼이스트 중에서도 렌트 얻기가 어려워 진입이 가장 힘든 곳"이라며 "아예 리테일 매장 자리를 구입해 살롱을 개업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기 이후 다른 지역의 매상은 30~40% 정도 떨어졌지만 매디슨애브뉴 선상에 있는 두 매장의 매출 감소폭은 10% 미만이었다. 이후 2008년에는 한인타운 인근 5애브뉴와 31스트릿 인근에 상가 자리를 400만 달러에 인수해 네일살롱을 개업했다. 건물매입 '효과'는 오히려 경기침체 때 빛을 발했다. 2000년대 초반 네일ㆍ스파업계 대형화 바람이 불면서 몸집을 키웠던 네일 살롱들이 매출감소로 인한 렌트 부담으로 쓰러져 나갔다. 박광해 대표는 "경기침체에도 맨해튼 렌트는 상승을 거듭했다"며 "자체 건물이라 렌트 상승 압박이 없어 살롱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아이리스 네일은 뉴욕을 넘어 한국시장 공략을 준비 중이다. 현재 박경미 대표는 한국의 삼육보건대 피부미용과 과정을 수강 중이며, 서울에 아이리스 네일살롱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역사가 미국보다 짧은 한국의 네일업계에 다년간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다"며 "아이리스 네일의 한국 진출이 제 2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아이리스 네일=▶1993년 맨해튼 어퍼이스트 3애브뉴에 400스퀘어피트 살롱으로 출발 ▶1994년 맨해튼 어퍼이스트 매디슨애브뉴에 2호점 오픈하면서 매년 1~2개씩 확장 ▶2004년 매디슨애브뉴 선상 81스트릿에 있는 18층 건물 중 1층 리테일 매장 매입▶2008년 5애브뉴 선상 31스트릿 인근 8층 건물 중 1층 리테일 매장 매입 ▶현재 운영중인 네일 살롱 7개 ▶직원수=120명 ▶7개 지점 총 연 매출=800만 달러.

2012-10-29

[성공기업(34) Q.R.S] 다양한 네일 팔리시ㆍ아트 제품으로 업계 선도

뉴저지주 페어뷰에 있는 네일팔리시 제조업체인 Q.R.S는 대형 업체들이 잠식하고 있는 네일팔리시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한인업체다. Q.R.S는 시장 진출 7년 만에 동부 지역 300여 개 뷰티서플라이 업체와 대형 네일 재료상을 통해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자체 제작 용기와 독특하고 개성있는 색상으로 여심을 사로 잡은 Q.R.S는 지난해부터 프로페셔널 시장을 공략, 네일살롱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Q.R.S는 150여 색상의 네일팔리시와 70여 색상의 네일아트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플러싱 골방서 탄생=Q.R.S는 지난 2001년 박장환 대표가 설립한 Q 라파 뉴욕(Q Rapha NY)라는 네일아트 제조업체로 출발했다. 위에 정교하게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네일아트는 설립 당시 플러싱의 100스퀘어피트 남짓한 지하 사무실에서 직접 만들어 판매했다. 박 대표는 “한국에서 IMF로 사업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와 배달 일을 하며 모은 자본금으로 Q 라파 뉴욕을 세웠다”며 “아내와 함께 네일아트 생산부터 영업, 배달까지 발로 뛰며 일궜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부터 화가로 활동 해온 박 대표는 예술가의 감각으로 색깔을 제조했다. 네일아트는 수요가 많지 않아 대형 업체들이 생산을 하지 않았다. 또 제조업체들도 대부분 영세해 판매하는 색상이 4~5개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Q 라파 뉴욕은 수십 가지의 컬러로 승부수를 띄었다. 그는 “2년간 1000개가 넘는 살롱을 돌며 제품을 팔았다”며 “일일이 살롱을 방문했던 경험은 시장흐름을 읽고 트렌드를 파악하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경험을 제품 생산이나 마케팅에 그대로 녹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20~30달러씩 제품을 구입하는 네일살롱 시장은 한계가 있었다. 유통채널을 다변화 시켜 제품 판매량을 늘리는 것이 시급했다. 박 대표는 “4년 만에 커네티컷, 조지아, 플로리다 등 동부지역 뷰티서플라이와 네일 재료상 등 50여 군데에 네일아트를 납품하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며 “이 것이 네일팔리시 분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네일팔리시 업체로 도약=히스패닉과 흑인 등이 선호하는 네일아트 시장은 좁았다.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박 대표는 지난 2006년 본격적으로 네일팔리시 생산을 시작하면서 도약을 시도했다. 기존 Q 라파 뉴욕에서 Q와 R을 따고, 창업정신을 잇는 다는 의미로 정신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Sprit’에서 S를 따와 Q.R.S로 업체명을 변경했다. 또 플러싱 사무실을 벗어나 뉴저지주 페어뷰에 생산 공장을 마련해 장소를 이전했다. 네일아트를 만들었던 노하우로 색상을 제작, 첫 해에 총 35개 네일팔리시 컬러를 내놨다. 그 동안 네일아트를 납품하면서 관계를 이어온 네일 재료상과 뷰티서플라이 등을 통해 첫 선을 보인 Q.R.S 제품은 세련된 컬러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 시즌마다 10여 개의 새로운 색상을 선보이며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박 대표는 “색상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유행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판매량은 매년 20~30%씩 꾸준히 늘었지만 Q.R.S를 박 대표가 계획하는 매이저 브랜드로 성장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OPI나 에씨 등 대형 업체들은 자신만의 용기 디자인을 갖고 있다”며 “Q.R.S로 브랜드만의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현재 호리병 모양의 Q.R.S 용기는 박 대표가 전문 디자이너와 함께 2년에 거친 수정 작업 끝에 탄생 시킨 작품이다. 그는 “2009년 완성된 Q.R.S의 용기 디자인은 Q.R.S가 전국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컬러젤 생산·판매도 계획하는 등 끊임없는 발전과 성장을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Q.R.S는=▶2001년 Q 라파 뉴욕으로 플러싱에서 네일아트 제품 생산·판매업체로 시작 ▶2004년 동부 지역 뷰티서플라이와 네일 재료상에 네일아트 제품 납품시작 ▶2006년 Q.R.S로 상호명 변경·뉴저지 페어뷰로 사무실 이전·네일팔리시 생산 시작 ▶2009년 자체 네일팔리시 용기 제작·디자인 특허 취득·5000스퀘어피트로 공장규모 확장 ▶현재 동부 지역 400여 개 뷰티서플라이와 네일 재료상에 납품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2012-10-22

[성공기업(33) 뉴뱅크] 만족·신뢰·봉사·변화를 추구하는 동포은행

'작지만 강한 은행'. 참 어울리는 수식어다. 뉴뱅크는 지난 2006년 9월 29일 '새롭고 편한 동포은행'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립, 지난달 말 여섯 돌을 맞았다. 그동안 뉴뱅크는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해왔다. 지난 6년간의 성공은 각종 숫자들이 보여준다. 이제 뉴뱅크는 한인사회를 너머 뉴욕·뉴저지 지역 커뮤니티뱅크 중 주목 받는 은행으로 자리잡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한근택 행장은 "만족·신뢰·봉사·변화를 행훈으로 삼고 지난 6년을 달려왔다. 앞으로도 차별화된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족과 신뢰의 은행=뉴뱅크는 창립 초기부터 자산을 키우기 보다 작지만 강한 은행을 추구해 왔다. 내실 경영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직원과 고객 그리고 주주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한 행장은 그 중에서도 직원 만족의 중요성을 첫 번째로 꼽는다. 은행 직원들의 만족이란 단순히 보너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너스는 물론 직장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 뉴뱅크는 매주 수요일 직원 티타임을 통해 담소를 나누며 웃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며, 직원들의 취미 생활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지난 봄에는 일부 직원들이 은행 후원으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 행장은 "직원들이 먼저 만족할 수 있어야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고객이 만족한다면 영업 활성화도 자연히 따라올 것이고, 이는 주주 만족, 그리고 신뢰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경쟁력은 신속한 의사 결정=특히 뉴뱅크의 신속한 의사 결정은 대출 영업에서 큰 경쟁력이 됐다. 대출 고객의 융자 여부를 신속히 결정, 원하는 시간에 자금을 지원해 준 덕분에 고객과의 신뢰도 탄탄해 졌다. 덕분에 타민족 시장 개척도 어렵지 않게 풀려갔다. 한번 인연을 맺은 타민족 고객들이 가족에 친구까지 소개해주며 뉴뱅크를 알리는 데 나선 것. 지금은 한인을 넘어 타민족 시장까지 고객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숫자가 보여준다=이렇게 일궈온 뉴뱅크의 성공은 숫자가 보여준다. 창립 후 첫 해인 2007년부터 꾸준히 흑자 경영을 해오고 있으며, 지난 6년간 2억3500만달러(클로징 기준)의 소기업청(SBA) 지급보증 대출로 한인은 물론 타민족에게 자금을 지급해 왔다. 뉴뱅크의 영업력과 이를 통한 수익률은 뉴욕·뉴저지 지역 커뮤니티은행 최고 수준이다. 주주의 자본을 사용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자본수익률(ROE)은 지난 6월말 기준 23.05%를 기록했다. '될 성 부른 나무'를 알아본 기관 투자자들이 투자 제안을 해 올 정도다. 금융평가기관인 바우어파이낸셜은 뉴뱅크를 최고등급인 별 5개 은행으로 평가했다. ◆금융위기의 교훈=물론 뼈아픈 교훈의 시간도 있었다. 2006년 9월 창립 이후 2년 만에 금융위기가 닥쳤다. 창립 은행이 안정을 찾으며 영업에 속력을 내던 시점이었다. 여느 은행처럼 부실 대출이 발생했고, 정리가 불가피했다. 한 행장은 "신생은행은 처음 확장을 하다 2~3년쯤 됐을 때 위축되는 위기를 맞는데, 그 시기가 금융위기와 겹쳤다"며 "은행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직원 연수를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다만 2009년엔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정이 있는 은행=뉴뱅크는 은행의 성과를 한인사회와 나누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부터 순익의 1%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계획을 실천, 한인사회 비영리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제로금리시대에 연 수익률(APY) 6.5%의 휴가적금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수익의 일정 부분을 고객과 나눈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한 행장은 "지난 6년간의 성과는 고객, 직원들이 힘을 모아준 덕분"이라며 "앞으로도 차별화된 금융서비스를 통해 새롭고 변화하는 은행으로 자리매김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뉴뱅크=▶2006년 9월 29일 플러싱(146-01 노던블러바드)에서 자본금 1000만 달러로 창립 ▶2009년 3월 뉴저지 팜라포세이빙뱅크 인수, 포트리지점(1475 버겐블러바드) 개점 ▶2010년 8월 뉴저지 클로스터지점(189 호만스애브뉴) 개점 ▶2009~2011년 3년 연속 뉴욕주 소기업청(SBA)에서 대출실적 금상 수상 ▶2011년 주당 1% 현금 배당 ▶2012년 주당 5% 현금 배당 ▶2012년 6월 말 뉴욕·뉴저지 지역 커뮤니티뱅크 중 자본수익률(ROE) 1위(앰바서더파이낸셜그룹 보고서) ▶2012년 9월 바우어파이낸셜 최고등급 별5개 획득 ▶2012년 8월 현재 자본금 1700만 달러, 자산 1억5012만 달러, 대출 1억516만 달러, 예금 2억2639만 달러, 손익 249만2000달러 ▶연락처: 718-353-9100

2012-10-17

[성공기업(32) 보디퓨어]베이킹소다로 발상전환... 전국구 브랜드 성장

냉장고 속 냄새를 제거하거나 욕실이나 주방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베이킹소다가 고급 스파제품으로 변신했다. 베이킹소다를 주 원료로 한 스파 페디큐어 제품을 개발·판매하는 보디퓨어(Bodipure)는 현재 뉴욕·뉴저지·커네티컷 지역은 물론 전국 고급 네일살롱과 스파 업주들 사이에 인정받는 회사이자 브랜드다. 2000년대 초반, 베이킹소다에 페퍼민트·녹차·우유 등을 첨가, 다양한 스파 페디큐어 라인을 선보이며 하나의 브랜드로 출발한 보디퓨터는 이후 스파 페디큐어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현재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시장을 보다=뉴저지주 페어로운에 있는 보디퓨어는 지난 1999년 윤동진 회장이 세운 스파 페디큐어 제조업체인 'Y Inc.'(이하 Y)가 그 시초다. Y를 설립하기 전 세계적인 세탁·세제 브랜드인 '암앤해머'를 아시아에 수출· 판매 하던 윤 회장은 암앤헤머 제품의 주 원료인 베이킹소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연세제 성분인 베이킹소다는 구하기 쉬울 뿐 아니라 탈취나 세척 효과가 뛰어나다"며 "회사를 설립해 베이킹소다로 보디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페디퓨어 풋스크럽'. 이 제품은 더마톨로지컬 전문 브랜드 등에 납품, 판매됐다. 하지만 반응은 생각보다 시원찮았다. 지금처럼 발 관리가 보편화 되지 않아 풋스크럽을 찾는 소비자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의 문은 다른 곳에서 열렸다. 직원 한 명이 네일살롱에 들고 가서 풋스크럽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 회장은 "풋스크럽이 출시됐던 2000년대 초반, 살롱에서 페디큐어가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며 "하지만 특정 회사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 살롱 업주들의 제품선택 폭은 넓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인 스파들을 중심으로 풋스크럽 납품을 시작했고, 이후 페퍼민트·녹차·실키밀크 라인 등을 차례로 선보이며 다양함을 원하는 고객의 필요를 만족시켰다. 그는 "스크럽에 그치지 않고 오일, 마사지 크림 등 라인을 구성, 네일 기술자들이 고객 발에 있는 노폐물을 좀 더 쉽게 제거하고, 피로를 풀어줄 수 있도록 했다"며 "업계 최초로 녹차를 첨가해 만든 녹차라인이 2003년도에 빅히트를 치면서 뉴욕·뉴저지·커네티컷 시장 점유율을 70%까지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2006년 윤 회장은 제품 생산업체의 이미지가 강한 Y대신 제품 판매와 마케팅을 위한 회사 보디퓨어를 설립해 스파 페디큐어 전문 브랜드로 키워나가고 있다. ◆개발은 계속된다=보디퓨어 성공의 원동력은 기술력이다. 여기에 시장 트렌드를 읽는 안목이 더해져 새로운 컨셉트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윤 회장은 "자연주의와 웰빙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는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라며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유럽을 돌아다니면 아이템을 찾다가 올개닉 컨셉트의 퓨리시마 라인을 탄생시켰다"고 소개했다. 지난 2010년 하반기 출시된 퓨리시마는 10여가지 천연 허브 식물로부터 추출된 아로마 오일로 만들어진 100% 올개닉 스파 페디큐어 제품이다. 자연식물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아로마 테라피를 동시에 제공해 스파 서비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어 일반 제품보다 배로 비싼 가격이지만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밖에 아세톤이 첨가되지 않은 네일폴리시 리무버 등 인체에 무해하고 친환경적인 제품을 출시하며 보디퓨어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또 지난 2010년에는 매니큐어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인체 유해한 화학성분을 제거한 네일폴리시 베리엘 동부 판매권을 획득하고, 아이디어 상품인 케라틴 글러브도 출시했다. 글러브 안에는 케라틴 성분의 손톱 강화제와 마사지 크림이 들어있어 장갑 하나로 손과 손톱을 편리하게 마사지하고 관리할 수 있다. 케라틴 글러브는 지난해 50만 개가 팔려나갈 정도로 큰 히트를 쳤다. ◆온라인으로 한 단계 도약=윤 회장은 "올해와 내년이 보디퓨어의 터닝포인트가 될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최근 온라인 웹사이트(www.bodipurewholesale.com)를 새롭게 구축한 보디퓨어는 판매망을 동부와 서부에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그동안은 전화 주문에 의존했지만 이제 구매자들이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또 온라인 소매판매도 시작할 예정이다. 윤승애 보디퓨어 사장은 "보디퓨어의 스테디셀러 제품인 보디폴리시 제품은 입소문을 통해 이미 아마존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며 "케라틴 글러브나 각종 보디용품 등을 소비자들이 직접 구입해 사용할 수 있도록 온라인 매장을 활성화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보디퓨어=▶1999년 Y Inc 설립 ▶2000년 Y, 보디휴어 브랜드로 페디퓨어 풋스크럽 출시, 페퍼민트 스파 페디큐어 라인 출시, 뉴욕·뉴저지·커네티컷 스파에 납품 시작 ▶2006년 판매업체 보디퓨어 설립으로 스파 페디큐어 전문 브랜드 이미지 강화 ▶2012년 온라인 통해 소매판매 시작 ▶전국 2000여 개 스파에서 제품 사용 중.

2012-10-09

[성공기업(24) 키라쿠야•도돔파] 불경기 뚫고 32스트릿에 터 닦은 한인 사케바

전 세계를 강타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끝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던 때인 2010년 봄. 맨해튼 한인타운 32스트릿 2층에 새로운 업소가 문을 열었다. 키라쿠야(KIRAKUYA). 이름부터 낯설다. 불경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32스트릿이라지만 새로운 식당·사케바가 겁도 없이 2층에 들어서다니. 사람들은 가능성을 반신반의 했다. 2년이 훌쩍 지난 2012년의 여름. 여전히 경기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키라쿠야는 '분위기 좋은 집' '가볼 만한 집' '소개하고 싶은 집'으로 자리잡았다. 메이 조 사장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사용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고객들이 알아봐 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성공의 비결=키라쿠야는 '기분 좋고 즐겁게 먹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다. 한인타운에 말 그대로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2010년 4월 문을 열었다. 컨셉트로 내건 것은 '레스토랑&사케바'다. 코리아타운이다보니 일본 술인 사케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이 없어 경쟁력 있어 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조 사장이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사케 소물리에를 직원으로 채용했고, 150여 가지의 사케를 준비했다. 실내를 고급스럽게 꾸미고, 그릇부터 종업원 유니폼까지 일본에서 공수해왔다. 2층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본래 일본에서도 사케바는 2층이나 지하에 많이 있어 자신 있었다. 키라쿠야의 경쟁력은 변화다. 점심시간에는 실내 분위기를 밝게 꾸미고, 직장인들이 가볍게, 맛있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런치 스페셜을 선보인다. 저녁시간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 연인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즐겁고 기분 좋게 술잔을 부딪힐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다. 메뉴도 철마다 다르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에 맞춰 10여 개의 다양한 메뉴들을 선보인다. 프라이빗 파티나 단체 손님 예약이 들어오면 모임의 성격이나 고객들의 나이, 취향 등에 맞는 메뉴를 구성해 준다. 상대적으로 고객이 적은 월요일 저녁엔 사케 세미나를 개최하고 사케 시음회를 통해 식당을 소개한다. 최근엔 한 웨딩잡지에서 키라쿠야를 소개, 타민족 고객들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 조 사장은 "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요식업을 처음 배웠는데 그 때 느낀 것이 메뉴 변화의 중요성"이라고 강조했다. ◆종업원에서 사장으로=메뉴 개발, 종업원 관리, 식당 경영…. 모두 경험으로 배웠다. 2001년 미국에 온 조 사장은 한식당 종업원을 시작으로 매니저를 거쳐 2007년 이스트 빌리지에 메이스 플레이스 스시를 오픈했다. 처음 일을 배울 때 '내 가게' 만들고 싶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뜻 맞는 동업자와 첫 번째 식당을 열었고, 불경기라고 했지만 초밥집은 잘 됐다. 젊은 사람들이 많은 주변 이스트 빌리지의 특성을 고려해 '싸고 맛있는 집'을 컨셉트로 잡았다. 2009년 바로 옆에 두 번째 식당 '메이 짱 라면'에 이어 2010년 키라쿠야, 올해 초엔 다운타운에 일본식 바 '도돔파(북소리를 뜻하는 일본 의성어)'의 간판을 내걸었다. 종업원부터 시작한 이력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될까. 조 사장은 "장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종업원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너무 잘 아니까 종업원들이 원하는 것을 잘 맞춰줄 수 있는 것은 좋은 점. 하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게 탈일 때도 있다. 조 사장은 "가끔은 사장이 눈을 좀 감아줘야 하는 것들, 모르고 지나가도 좋을 것들이 있는데 너무 잘 보이는 게 단점이기도 하다"며 웃었다. ◆따끔한 조언들=조 사장 본인이 종업원을 해봐서 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업소 오픈이 꿈이지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조 사장은 ▶식당 위치에 맞는 컨셉트 ▶든든한 자본력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거 된다' 싶어도 식당의 위치나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조 사장은 가게 오픈 전에 한 달은 거의 그 동네에서 지낸다. 주 소비층, 인근 거주자들의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1년은 족히 버틸 수 있는 자본력도 중요하다. 처음 오픈한 집은 쉽게 이익이 나기 힘든데 자금이 부족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직원들에게도 짜증을 많이 낼 수 있다. 영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때론 빠른 포기가 돈을 벌게 해줄 수 있다. 처음 스시집을 열 때 고급 컨셉트로 갔지만 동네 성격에 맞지 않았다. 3개월만에 접고 싸고 맛있는 집으로 바꿨다. 올해 초 오픈한 도돔파도 미국식 바였다. 주변 경쟁이 심해서 단호하게 접고, 잘할 수 있는 일본식으로 바로 바꿨다. 조 사장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 답답한 마음에 또는 자만심에 섣부르게 일을 먼저 벌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다"고 조언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키라쿠야=▶2007년 이스트빌리지에 '메이스 플레이스 스시' 오픈 ▶2009년 유기농 라면전문점 '메이 짱 라면' 오픈 ▶2010년 레스토랑&사케바 '키라쿠야'(www.sakebarkirakuya.com) 오픈 ▶2011년 스시·라면 업소 매매 ▶2012년 다운타운에 일본식 바 '도돔파'(www.izakayadodompa.com) 오픈 ▶직원 수: 30여 명 ▶연락처: 212-695-7272.

2012-10-01

[성공기업(23) 스파벨레스] 유명인들 즐겨 찾는 맨해튼 최고급 네일업소

디자이너 캐빈 클라인, 헐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 앤 헤서웨이, 보이밴드 조나스 브라더스의 공통점이 있다. 맨해튼에서 손·발톱을 다듬거나 마사지로 피로를 풀고 싶을 때 '스파벨레스'의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1997년 맨해튼 어퍼이스트에서 네일살롱 '블루미 네일'에서 출발한 한인 네일·스파 스파벨레스는 현재 맨해튼에서도 '핫'한 곳으로 꼽히는 첼시와 웨스트빌리지에 5개의 직영점이 있다. 스파벨레스는 철저한 직원·서비스 관리,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일반 살롱과 차별화된 메뉴 구성으로 유명인들이 찾는 뉴욕 최고급 스파로 자리 잡았다. 스파벨레스는 지난달 상표권을 회득하고 현재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모집 중이다. 이홍철 대표는 "지금까지 직영점을 포함해 총 20여개의 네일·스파살롱을 열었다"며 "위치 선정부터 직원 트레이닝 등 스파벨레스의 서비스와 노하우를 모두 제공한다"고 밝혔다. ◆부부의 합작품=스파벨레스는 공동대표인 이홍철·이명주 부부의 합작품이다. 이민 온 후 퀸즈와 롱아일랜드에서 네일 기술자로 일했던 아내 이명주 대표는 1990년대 우연한 기회에 맨해튼 네일 살롱에 취업했다. 맨해튼 시장은 지금까지 일했던 곳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가격흥정을 하던 고객 대신 위생관리에 신경 쓰는 고객들을 보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맨해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고 지저분한 네일살롱 대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살롱을 세우겠다는 꿈이 생겼다. 이후 남편과 함께 네일살롱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살롱에 묶여있는 아내 대신 직접 품을 팔며 위치를 보고 살롱을 꾸미는 것은 이홍철 대표의 몫이었다. 100군데 넘게 보고 고른 곳은 상류층들이 몰려있다는 어퍼이스트의 94스트릿과 매디슨애브뉴에 있는 건물. 아내의 살롱 컨셉트에 맞추기 위해 97년도 당시 한국에서 38만 달러를 들여 1500스퀘어피트 규모의 살롱을 최고급 장비와 인테리어로 꾸몄다. 청결에도 신경 섰다. 사용한 도구는 철저하게 소독하고, 왁싱용 스틱은 절대 재활용하지 않았다. 또 틈만 나면 살롱을 청소해 깔끔함을 강조했다. 이홍철 대표는 "당시 대부분의 살롱들이 규모가 작고 좀 지저분해도 장사는 됐다"며 "그런데 목돈을 들여 시설에 투자하니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우려는 적중했다. 고급화를 위해 다른 살롱에 비해 2~3배 높은 가격을 책정했지만 찾는 이가 너무 없어 초반 6개월간 인건비와 렌트 내기도 빠듯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네일살롱을 찾던 고객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상승기세를 모아 지난 2006년도까지 블루미 네일을 8호점까지 키웠다. 이홍철 대표는 "네일살롱 자리를 정하고, 블루미 네일로 가게를 셋업해 운영하다 팔고 새로운 살롱을 오픈하는 식으로 확장했다"며 "하지만 살롱을 팔면서 '블루미'라는 이름도 함께 팔리게 되는데 살롱의 품질과 가격관리는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블루미를 믿고 오는 고객들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블루미라는 이름을 버리고 직영으로 운영하던 4개 살롱 명칭을 스파벨레스로 바꿨다. ◆또 다른 도전=네일살롱 이미지가 강한 블루미 대신 스파벨레스로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이 대표 부부는 10여 년간 블루미를 운영하며 한계를 느꼈다. 새로운 수익 창출원이 필요해 스파 아이템을 접목했다. 스파벨레스라는 이름도 스파 이미지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이명주 대표가 직접 지었다. 하지만 평생을 네일에 집중해왔던 터라 스파 서비스로 뛰어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명주 대표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직접 발품을 팔며 조사하고, 보디 마사지와 페이셜 마사지 등을 직접 받아보며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각종 약재를 볼에 넣어 마사지하는 '타이 허발 볼 마사지' 같은 아이템은 일반 스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서비스"라고 말했다. 페이셜 마사지는 라이선스가 있어도 스파벨레스 자체적으로 1년간 마사지사 교육을 따로 시킨다. 2인 1조로 페이셜 마사지 과정을 이수해야 고객의 얼굴을 직접 만질 수 있다. 이명주 대표는 "스파 관련 매출은 2006년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5개 매장 가운데 2~3개 매장은 전체 매출에서 네일보다 스파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거나 비슷하다"며 "네일 뿐 아니라 스파 산업도 시장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고객에 귀 기울여라=스파벨레스의 또 다른 강점은 새로운 아이템으로 업계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주 대표는 "패션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바로 네일 트렌드"라며 "네일 서플라이 업체에서 보내주는 신제품 안내서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지만 고객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얻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3년 전 스파벨레스에서 처음 시작한 컬러젤 서비스와 스티커처럼 손톱 위에 붙이는 밍스 네일은 고객이 준 아이디어다. 지금은 뉴욕 어디를 가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서비스였다. 이명주 대표는 "타주 고객이 밍스네일과 컬러젤을 하고 왔다. 신기해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로 관련 상품을 주문해 서비스를 시작했더니 고객들이 살롱을 물어 물어 찾아왔다"며 "고객이 원하는 것이 곧 트렌드"라고 말했다. ◆스파벨레스=▶1997년 맨해튼 어퍼이스트에서 네일살롱 '블루미'로 시작 ▶2006년까지 총 8개 블루미 살롱 오픈 ▶2006년 직영점 4개 살롱 '스파벨레스'로 상호 변경 ▶2008년 웨스트빌리지 6애브뉴에 직영점 오픈 ▶2009년 맨해튼 네일살롱 최초로 컬러젤 서비스 시작 ▶2012년 스파벨레스 상표권 획득 ▶5개 매장 총 직원 수 150명 ▶연락처: 917-607-1599;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2012-10-01

[성공기업(19) 광수종합건설] 10여 년 만에 신용과 기술력 인정받는 건설업체로 ‘우뚝’

2001년 작은 건설업체로 출발한 뉴저지주 잉글우드의 광수종합건설은 지난 12년 간 500여 건이 넘는 공사를 맡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대표적인 한인 공사업체로 인정받고 있다. '정직'과 '신용'을 철저하게 지켜온 것이 광수건설의 성장 비결이다. 송광수 대표는 "건설은 정직한 분야다. 제대로 건축을 했는지는 완공된 건물이 증명한다"며 "이제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약속된 시간 내에 제대로 건물을 짓는 회사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용으로 성장=창업 후 광수건설이 반드시 지켜온 것은 공사 비용과 공사 기간의 정확성이다. 송 대표는 한국에서 9년 간 서울특별시 건축과에서 인스펙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직하게 산출하고 공사 기간을 정확히 산정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고 밝혔다. 송 대표는 "업체 간의 경쟁 때문에 너무 싸게 비용 견적을 냈을 경우 중간에 문제가 생겨 공사 기간이 늦어지는 일이 많다"며 "최초 약속과 다르게 공사가 늦어지면 필요한 시기에 건물을 사용하지 못해 고객에게 큰 손실을 주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청업체와의 관계에도 신용을 바탕으로 한 것도 기업 성장의 요인이 됐다. 전기·배관 등 분야의 하청업체들이 일을 제대로 해야 예정된 시간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송 대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약서대로 하청업체에도 공사 대금을 정확히 지불했다"며 "그들도 우리를 믿고 책임감 있게 일을 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제대로 지어진 건물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창업 초기 주택 리모델링을 주로 해 왔던 광수건설은 현재 주택, 상용건물, 오피스 빌딩, 공공건물 등의 건물 신축·증축·리모델링 등을 하는 종합건설회사로 발전했다. 송 대표는 "맡았던 공사들을 예정된 기간 안에 완벽히 마무리하니 의뢰 분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고객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성장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전문 공사기술 확보 주력=광수건설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전문 기술 확보다. 서버룸이나 음향시설 등 전문적인 시공 기술이 필요한 공사들을 성공적으로 해오면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 연구소와 같은 첨단 설비가 들어서는 건물의 공사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건물 리모델링 분야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05년 뉴저지주 해켄색의 한 신발 매장을 리모델링 하면서 철망으로 된 펜스를 내부 디스플레이 용도로 사용하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꾸며 지역 일간지 레코드에 소개되기도 했다. 송 대표는 "신기술 습득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공사들을 하나씩 성공리에 마무리하면서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며 "갈수록 수요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친환경, 에너지 절약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 기술 확보에도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발사업 진출=그간 쌓인 신용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광수건설은 개발 사업에도 적극 진출하고 있다. 광수건설은 지난달 25일 중부 뉴저지 뉴브런스윅 럿거대 인근에서 200년이 넘은 유적지 건물의 개발 사업 승인을 받았다. 유적지 건물 개발은 규정이 매우 엄격해 기술력이 없으면 힘든 분야로, 옛 모습을 보전하면서 첨단 설비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공사 기술이 필요하다. 광수건설은 지난 2009년부터 건물 조닝 변경 등 행정적인 부분의 컨설팅까지 도맡아 결국 최종 공사 승인까지 받아냈다. 올해 말부터 공사가 시작될 예정으로 1층은 쇼핑몰로 꾸며지고, 2~3층은 학생용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손 대표는 "2014년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옛 모습을 그대로 보전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주상복합 건물로 새롭게 변신시켜 한인 건설회사의 기술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광수건설은 레오니아 그랜드 애비뉴 선상의 대규모 상가 건물 공사도 진행 중에 있다. 송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투자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한인 건설업계도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봤다. 그는 "한국 기업들의 미국 진출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오피스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른 건축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정직과 신용이라는 초심을 지키면서 좋은 건물을 계속 지어 최고의 한인 건축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광수종합건설=▶2001년 뉴저지주 레오니아에서 시작 ▶2003년 상용건물 공사 분야 진출 ▶2009년 뉴저지주 잉글우드로 본사 이전 ▶총 공사건수 500여 건 ▶주요 사업분야: 주택·상용 건물 신축, 증축, 리모델링, 설계, 토목 ▶연락처 201-206-8609. 서한서 기자 hseo@koreadaily.com

2012-10-01

[성공기업(31) UMS•업솔루션] 카드 결제에서 원스톱 데이터 프로세싱으로 진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카드프로세싱회사로 유명한 유나이티드머천트서비스(UMS)는 단순히 신용·데빗카드 결재만 대행해주는 회사가 아니다. 시작은 카드프로세싱이었지만 신기술 개발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지금은 비즈니스 운영에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관리해주는 원스톱 데이터 프로세싱 기업으로 성장했다. 제이 윤 대표는 "우리 회사의 경쟁력은 인벤토리도 아니고 결국 사람"이라며 "기술력과 사람에 대한 투자가 없었다면 지금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남보다 5년 멀리=뉴저지주 해켄섹에 있는 UMS 본사 입구에는 지문 인식 기계가 벽에 붙어 있다. 손바닥을 찍으면 본인의 출퇴근 시간이 자동으로 인사과(HR)에 전달된다. 종이를 일일이 기계에 넣어 '찰칵' 소리를 내며 찍는 방식은 이미 구식이 된지 오래다. 1994년 설립된 UMS의 초창기 경쟁력은 빠르고 정확한 '한국어 서비스'였다. 회사 내에 심사·콜렉션·리스크관리·고객관리·헬프데스크 등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신용·데빗카드를 받는 업주들이 카드 단말기를 사용하며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한국어로 신속하게 처리해줄 수 있다. 동시에 기술 개발에 큰 비중을 두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카드프로세싱과 POS(판매정보관리)의 접목 가능성에 눈을 뜨고, 2005년 관련 부서를 조직했다.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2009년 형제회사로 분사, POS를 중심으로 한 IT전문회사 업솔루션(Up Solution)이 탄생했다. 시장을 내다보는 능력은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지금은 UMS보다 규모가 훨씬 큰 카드프로세싱 회사들도 업솔루션의 기술력을 자사 제품에 접목시키기 위해 파트너십을 맺기 원할 정도다. UMS의 성공은 주류사회가 먼저 인정했다. 2011년과 2012년 연속 Inc매거진이 선정한 '2012년도 미국 내 급성장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은행 및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는 톱200에 들었다. ◆직원 화합이 사훈=윤 대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했다. 기술력이나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다. 회사 로비와 윤 대표의 방에는 인화(人和)라는 큰 액자가 걸려있다. 직원들의 화합이 회사 경영에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 속에서 사훈으로 정했다. 윤 대표는 "18년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 때를 넘기고 나면 회사의 외형이 커져 있었다"며 "결국 그때 같이 있어줬던 직원들이 열심히 뛰었고,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 덕분"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내 마음속엔 또 다른 인화가 있다"며 "내 마음대로 하려면 안되더라. 사람 인 대신 참을 인(忍)을 써서 나한테 적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IT서비스 한 곳에서=UMS와 업솔루션의 기술 개발의 혜택은 결국 업주들에게 돌아간다. 비즈니스 운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자료를 관리해주는 원스톱 데이터 프로세싱 서비스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물론 매장이 여러 개인 도소매 회사들은 효율적인 재고 관리와 인사 업무를 통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윤 대표는 "투자에 집중했던 시기의 결실을 이제 맺고 있고 있어 내년에는 보다 활발하게 서비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카드프로세싱회사에서 데이터 프로세싱회사로 성장한 만큼 각 비즈니스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로 차별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UMS·업솔루션=▶1994년 UMS 설립 ▶2005년 POS 개발팀 조직 ▶2006년 뉴저지주 해켄섹 사옥 매입 ▶2009년 POS전문 IT회사 업솔루션 설립 ▶2010년·2011년 Inc매거진 선정 '미국 내 급성장 기업' 2년 연속 선정 ▶직원 130여 명 ▶2011년 매출 6000만 달러 ▶연락처 800-260-3388, www.unitedmerchant.com, www.upsolution.com.

2012-10-01

[성공기업(18) AK스파] 미·베트남 업체 아성 깨고 네일장비에 한인 마크 붙였다

2000년대 초반 미국과 베트남 제품이 판을 치던 네일살롱 장비시장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진 한인업체가 있다. 페디큐어 스파와 살롱 가구, 각종 장비 등을 개발·판매하는 AK스파가 그 주인공이다. 테리 김 대표가 지난 2002년 설립한 이 업체는 한인 네일살롱 업주들에게 ‘살롱텍’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살롱텍은 AK스파의 페디큐어 제품 브랜드 이름이었는데 앞으로는 AK스파로 통일할 예정이다. 1인 기업으로 시작한 이 업체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기반으로 설립 10년만에 미국시장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유럽, 남미까지 14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가능성을 보라=김 대표가 네일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1990년대 초, 한인 종사자가 유난히 많은 네일살롱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기구는 대부분이 미국과 베트남 제품이었다. 워낙 고가인데다가 사후 서비스도 형편없었지만 제품선택에 별다른 대안이 없어 한인 업주 대부분이 울며 겨자 먹기로 특정 회사의 제품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수년간 네일재료상에서 세일즈를 하다가 96년도에 네일재료 도매상 ‘유니큐’를 차린 김 대표는 시장상황을 보고 “합리적인 가격에 아이디어를 더한 장비를 직접 개발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살롱장비를 판매하면서 네일살롱 업주들을 자주 만났고, 아내 역시 네일살롱을 운영하고 있어 장비문제로 애를 먹는 업주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와 제품 컨셉트는 있었지만 혼자서 제품을 개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다행히도 한국에서 디자인회사 ‘옐로우서브마린’을 운영하는 옛 친구와 뜻이 맞아 손을 잡기로 했다”며 “AK스파가 제품의 아이디어나 컨셉트를 내놓으면 옐로우서브마린이 디자인과 제작을 하는 식으로 외주를 주고 있다”설명했다. 김 대표의 예상은 적중했다. 설립 3년만에 출시한 스파조이가 대 히트를 쳤다. 자동차 도장방식으로 마무리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외장, 인체공학적 디자인, 휴먼터치 마사지 기능의 의자, 파이프 없는 제트기능으로 월풀을 가동시켜 위생적이기까지 했지만 가격은 기존 제품보다 30%나 저렴하게 내놨다. 그는 “그 동안 품질에 비해 비싼 가격에 페디큐어 스파를 구입했던 업주들의 갈증이 컸다”며 “기술 부분은 업그레이드됐지만 오히려 가격은 낮춰 박리다매식으로 고객을 공략했다”고 말했다. 스파조이는 2005년 출시 이후 2010년 절판될 때까지 약 2만 대가 팔려나갔다. AK스파의 성장동력은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있다. 경기침체로 한인 경제가 휘청거렸지만 트렌드를 읽고 내놓은 상품들로 오히려 회사는 더욱 성장했다. 그는 “센서스 연구조사를 토대로 한 보고서를 보니 지난 10년간 네일살롱에서 손톱과 발톱을 다듬는 미국인이 배로 늘었다”며 “네일살롱 개념이 익숙해진 베이비부머 다음 세대들은 이제 어린 딸과 살롱에 와 손·발을 관리 받는다”고 말했다. 여기에 착안해 내놓은 제품이 바로 2009년 선보인 미니조이다. 쿠션과 월풀이 세트로 된 미니조이는 성인용 페디큐어 스파 위에 간편하게 제품을 얹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김 대표는 “네일산업은 20여년 밖에 안된 젊은 산업”이라며 “네일 서비스를 받는 연령층도 계속해서 어려지고 있는 데다가 점점 다양한 연령층에서 보편화 되어가고 있어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이어 “고객의 니즈와 네일업종 종사자의 편리함을 만족시키는 제품을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이 AK스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AK스파에 따르면 현재 뉴욕·뉴저지·커네티컷 네일살롱 장비 시장에서 AK스파의 시장점유율은 50%에 이른다. 또 3개주 외에 전국 300개 대리점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AK스파가 내놓은 제품 중 말 그대로 시장에서 ‘히트’를 친 제품은 전체의 15~20% 정도 밖에 안 된다. 보통 한국에서 진행되는 제품 1개당 평균 연구비는 한화로 2억원 정도. 적지 않은 비용이라 시판한 제품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회사가 입는 타격도 크다. 하지만 비싼 강습비를 치르고 맛본 실패의 경험들은 오히려 AK스파에 약이 됐다. 그 대표적인 제품이 바로 페디큐어 스파인 ‘임펄스’다. 2003년 AK스파가 야심 차게 내놓은 첫 작품 임펄스는 출시와 함께 1500여대가 팔려나갔다. 의자에 물통 하나 올려져 있던 식의 기존 제품들 속에 고급스러운 외장과 디자인의 임펄스는 업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하지만 대만에서 수입해 온 의자가 불량으로 판명되면서 시중에 팔렸던 제품을 전량 회수했다. 김 대표는 “당시 사업 노하우가 많지 않은 탓에 깜빡 속아 불량의자를 수입하게 됐다”며 “결국 불량의자가 장착된 임펄스에 대한 항의가 들어왔다. 제품을 회수하고 업주들에게 환불을 해주거나 크레딧으로 돌려줬다”고 말했다. 임펄스를 개발하며 맛본 쓴 경험은 이후 스파조이를 출시할 때 큰 교훈이 됐다. AK스파의 효자상품으로 불리는 소닉터치도 실패에서 얻어진 산물이다. 김 대표는 도매상을 하던 시절 함께 네일학원도 운영했다. 네일학원은 결국 문을 닫았지만 소닉터치도 이 곳에서 일하며 착안해낸 제품이었다. 아크릴 손톱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보통 1시간 가량을 아세톤에 손을 담가두어야 한다. 하지만 소닉터치를 이용하면 단 15분만에 손톱을 떼어낼 수 있다. 소닉터치로 아세톤에 열을 가하면서 동시에 미세한 진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학원은 경영난으로 닫았지만 그 경험이 제품을 개발하는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소닉터치는 세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치며 지난 10여년간 6만 여대가 팔려나갔다. ◆AK스파=▶2002년 롱아일랜드 포트워싱턴에서 설립 ▶2006년 페디큐어 스파 에프터서비스 전담반 구성 ▶2008년 롱아일랜드 플레인뷰로 이전·플러싱에 쇼룸 개장 ▶직원 수 18명 ▶대표 히트상품=스파조이·미니조이·퍼스트클래스·유리조이·워터조이·소닉터치 ▶파이프 없는 제트 월풀·은나노 월풀 등 6개 특허 보유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2012-07-05

[성공기업(17) 솔로몬보험·IUA·이-베네핏 솔루션] 스무 살 성년의 해 맞은 한인 보험업계 리더

솔로몬보험이 스무살 성년을 맞았다. 1992년 평범한 보험 에이전트로 플러싱에서 첫 발을 내디딘 솔로몬보험은 20년이 지난 현재 두 개의 형제회사와 자체 건물을 보유한 연간 실적(보험료 총액) 5700만 달러의 회사로 성장했다. 솔로몬보험은 전문화를 위해 1998년 보험 도매회사 인터네셔널 언더라이팅 에이전시(IUA)와 2007년 건강보험 전문 이-베네핏 솔루션(e-Benefit Solution)을 별도로 설립했다. 초창기 3명이었던 직원은 현재 45명으로 늘었다. 특히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회사의 주요 사업 중 하나로 정하고 16년째 매년 경로잔치를 개최하고 있다. 3개 회사 대표를 맡고 있는 하용화씨는 “전 직원이 도전정신으로 열정을 갖고 달려온 덕분에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훌륭한 인재들을 영입해서 2·3세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일류 기업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성공 전략은 다변화=하용화 대표는 올해 3개사 실적 목표를 총 8200만 달러로 잡았다. 15년 전인 1997년의 50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던 것과 비교하면 열 배 이상의 성장세다. 하 대표는 성공 키워드로 ‘다변화’를 꼽았다. 시장의 다변화, 상품의 다변화가 솔로몬보험을 한 단계 도약하게 만들었다는 것. 다변화에 맞춰 분야별 전문성을 강화한 것도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처음 솔로몬보험은 화재·상해보험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로 출발했다. 당시 하 대표를 포함한 솔로몬의 직원들은 보험사 직원을 넘어 ‘문제 해결사’였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직접 찾아 다니다 보니 법을 몰라서 또는 영어를 잘 몰라서 난감해 하는 업주들이 많았다. 영문 편지를 읽어주고, 때론 전화로 항의도 하고, 업주 자녀의 삼촌이 돼서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함께한다는 동반자 정신이 고객들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설립 6년만에 도약의 기회를 만났다. 한 미국 보험회사가 자신들의 상품을 팔아보겠냐며 보험 도매를 제안한 것이다. 1998년 인터네셔널 언더라이팅 에이전시(IUA)를 설립, 개인이 아닌 보험 브로커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시장 다변화를 위한 첫 출발이었다. 2007년 또 다시 기회가 왔다. 직원 수가 많은 지상사들의 보험을 맡으면서 건강보험 시장을 보게 된 것이다. 건강보험을 전문으로 하는 이-베네핏 솔루션을 설립했다. 솔로몬보험 내 한 부서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전문성을 살려주기 위해 독립 회사를 만들었다. 솔로몬보험 내부적으로도 스페셜리스크·기업·개인 등을 담당하는 3개 부서로 나눠 각 팀들의 전문성을 높여가고 있다. 하 대표는 “개인도 회사도 하루에도 수 없이 기회를 만나지만 준비된 자만이 이를 잡을 수 있다”며 “혹자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끊임 없는 노력과 준비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금융위기에 성장하다=2008년 터진 금융위기는 보험업계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경기가 급락하면서 대형 보험사들이 ‘우리 상품 좀 팔아달라’며 도매 보험사들을 찾아오는 상황이 벌어진 것. 업계에선 이를 소프트 마켓이라 부른다. 소프트 마켓은 준비된 회사에겐 기회였다. 솔로몬은 이미 IUA를 통해 보험 도매를 시작한 이후라 소프트 마켓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다양한 상품으로 무장한 뒤 한인 시장을 넘어 중국계와 유태인 등 타민족 시장을 공략했다. 한인 특유의 빠르고 효과적인 서비스는 타민족 시장에서 더욱 잘 통했다. IUA의 실적은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로컬 한인 기업을 주 고객으로 하는 솔로몬보험의 경우 올해 성장 목표치가 5% 인데 반해 도매를 하는 IUA의 목표치는 50%다. 그만큼 가능성 있는 시장에 발을 디뎠으니 승부를 내겠다는 각오다. IUA의 대니 이 매니징 디렉터는 “뉴욕 내 2만 개의 보험 브로커 회사가 있으나 현재 우리가 거래하는 곳은 300~400개에 지나지 않는다”며 “시장 규모를 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고,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현재 IUA의 직원 중 반은 타민족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하 대표는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사람 한 명을 잘 썼을 때, 회사가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지금도 직원 교육과 인재 영입은 하 대표가 각별히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특히 보험 분야는 물론 관련 법률 부문은 전문 인재의 등용이 더욱 중요하다. 한인 기업 규모가 커지고 지상사들의 미국 진출이 활발해 지면서 그에 맞는 맞춤형, 고급형 보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객들에게 더욱 정확한 서비스를 위해 공인손해보험 언더라이터(CPCU) 자격증을 보유한 인재를 영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 대표는 “앞으로 생명보험 분야와 재보험 분야로도 진출할 계획이며 대형 보험사의 지분 참여를 통한 투자도 생각하고 있다”며 “우린 지금도 사람이 필요하다. 능력과 열정이 있는 인재들과 함께 보험 분야에서 성공한 이민 1세로 기록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솔로몬보험=▶1992년 솔로몬보험 설립 ▶1998년 보험 도매회사 IUA 설립 ▶2002년 아시안아메리칸기업개발센터(AABDC) ‘올해의 우수 아시안 기업인 50인’ 하용화 대표 선정 ▶2003년 보험료 총액 1000만 달러 돌파 ▶2006년 뉴저지 지점 설립, 보험료 총액 2000만 달러 돌파 ▶2007년 이-베니핏 솔루션 설립 ▶2008년 첩그룹 개인재산상해보험 중개 계약 ▶2009년 경제주간지 크레인스뉴욕 소개 ▶2011년 베이사이드 사옥 매입·이전, 3개사 총 보험료 총액 5700만 달러 기록.

2012-06-27

[성공기업(16) 뉴지구 트레이딩] ‘히트상품 제조기’ 명성 떨치는 한인 대표 가발업체

1978년 할렘에서 작은 미용잡화점으로 출발한 뉴지구 트레이딩은 현재 미국은 물론 남미와 유럽, 아프리카 등 전세계 30개 국에 가발을 판매하는 대형 도매업체로 우뚝 섰다. 지난 30여 년간 꾸준한 성장을 지속해온 뉴지구는 70년대 한국 수출의 주력분야였던 가발산업에 집중해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소매점에서 흑인을 상대로 가발을 판매하다가 이후 도매로 영역을 넓히면서 다양한 신제품 개발과 공격적 마케팅으로 미국 가발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할렘에서 소매점으로 시작=뉴지구는 1세의 노련함과 1.5세의 참신함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좋은 예다. 창업주인 이민 1세 홍종철 회장과 그 뒤를 이어 홍 회장의 사위인 1.5세 김현준 최고경영자(CEO)가 업체를 이끌며, 완벽한 세대교체로 회사는 한 단계 도약했다. 뉴지구의 출발점이 된 할렘의 미용잡화점 ‘위그타운’은 홍 회장이 이민 후 처음 시작한 사업이었다. 한국에서 가발공장을 운영했던 그는 이민 후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할렘의 메인스트릿으로 불리는 125스트릿에 간판을 걸었다. 당시 치안이 좋지 않아 대낮에도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할렘에 매장을 오픈한 것은 홍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주변에서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흑인 수요가 많은 가발을 팔기 위해서는 흑인이 많은 동네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5년 후 맨해튼 브로드웨이 상가로 진출, 본격적으로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가발분야에 전문성을 살려 직접 개발한 브랜드 ‘러블리 컬렉션’을 중심으로 모자와 머리핀 등 각종 잡화를 판매했다. 이후 1993년 사위 김현준씨가 입사하면서 가발·잡화 도매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김 CEO는 “당시 브로드웨이 대부분의 도매업체가 가발과 잡화 등을 판매해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과감하게 잡화 분야를 포기하고 대신에 기존 가발 아이템에 미용기기와 파마약, 케미컬 등 미용재료를 추가해 헤어·뷰티에 전문성을 살렸다”고 말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만해도 99센트 숍이나 기프트숍 등에서 헤어제품을 판매해 뷰티서플라이 개념이 활성화 되지 않았었다. 김 대표는 “한인 소매점들에게 뷰티 제품을 직접 소개하며 납품했다. 반응이 좋아 거래하던 소매점들이 전문 뷰티서플라이업소로 업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며 “실제로 거래하던 소매점도 배로 늘었다”고 말했다. ◆히트상품 제조기=홍 회장은 직접 업주들을 만나 세일즈를 하며 경험을 쌓은 김 CEO에게 1998년 가발구매를 맡겼다. 미용재료도 취급했지만 가발분야에 주력했던 만큼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미리 트렌드를 읽어야 하는 가발구매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작업이었다. 김 CEO는 “먼저 소매점에서 판매되고 있던 러블리 컬렉션의 인식을 조사하고, 브랜드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후 브랜드명을 ‘할렘125’로 바꾸고 품질과 패키징을 업그레이드해 고급화 전략을 폈다. 또 홍 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지속적인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김 CEO는 “중국에 있는 공장을 방문하던 중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머리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짧은 길이의 헤어 익스텐션’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며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명성을 굳힌 H-27피스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당시 시중에 판매되던 헤어 익스텐션은 8인치부터 시작했다. 익스텐션을 이용해 긴 머리를 연출할 수 있었지만 다양한 스타일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H-27피스는 1~3인치 헤어 익스텐션이 각각 9피스씩 총 27피스로 구성돼 있다. 이 제품은 일반 소비자들도 많이 찾았지만 미용사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다. 6~7시간씩 긴 머리를 붙이고, 땋는데 걸리던 것을 1시간 정도로 단축할 수 있어 수고를 덜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품은 출시 이후 한 달에 15만 개씩 팔려나갈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미지 마케팅에 투자=뉴지구에도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2006년 김 CEO가 홍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아 취임한 후, 회사의 조직 개편과 브랜드 이미지 강화를 위한 마케팅에 투자를 늘렸다. 그는 “현재 미국 가발도매상은 200여 개 정도로 그 중 한인가발협회에 등록된 업체만 28군데”라고 말했다. 미국 가발 시장에서 한인 업체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유태인이나 백인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가발업계에서 더욱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발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김 CEO는 과감하게 뉴지구의 미용재료 판매를 중단했다. 또 각종 미용쇼나 엑스포에 참가하고, 판촉물을 제작하는 등 매출의 10%를 마케팅 비용으로 재투자했다. 이밖에 디자인팀과 제품개발팀, IT팀을 조직해 각 분야의 전문성을 높였다. 김 CEO는 “그 동안에도 디자인, 제품개발을 해왔지만 별도의 팀을 구성한 것은 처음이었다”며 “이제 그 조직 개편의 결과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매출이 전년비 150% 이상 성장했으며, 올해도 매달 신기록을 달성하고 있다는 것이 김 CEO의 설명이다. 매출 성장은 지난해 출시한 인모와 인조모를 섞어 만든 제품 ‘키마 클래식’이 견인했다. 가격은 인모의 절반도 안되지만 품질은 인모 가발에 뒤지지 않는다. 뉴지구는 올해 안에 다양한 디자인의 키마 제품을 출시해 월 500만 달러 매출을 기록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뉴지구상사=▶1978년 맨해튼 할렘에서 미용잡화 소매점으로 시작▶1985년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지구트레이딩’ 도매 업체 설립 ▶1986년 ‘러블리 컬렉션’ 가발 브랜드 런칭 ▶1993년 가발과 미용재료 판매를 접목, 한인 뷰티서플라이 업계 최초 도매 회사로 출범 ▶1999년 우드사이드로 본사 이전, ‘지구 트레이딩’에서 ‘뉴지구 트레이딩’으로 이름 변경 ▶2000년 할렘125 브랜드 런칭 ▶2005년 맨해튼 직영도매 매장 ‘헤어모션’ 독립 운영 시작 ▶2006년 김현준 CEO 취임 ▶2011년 키마 클래식 출시. 김동그라미 기자 dgkim@koreadaily.com

2012-06-18

[성공기업(15) 아이러브(iLuv)] 앞선 모바일 주변기기로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뉴욕시 맨해튼에서 1인 기업으로 시작한 아이러브(iLuv)가 모바일 주변기기 시장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 1997년 맨해튼 46가의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한 아이러브는 당시 기술 경쟁에 치중했던 전자제품 시장에 소비자 중심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로컬 기업으로는 드물게 가전 분야에서 성공을 한 사례로 평가된다. 하지만 아이러브가 그 이름을 세계로 알리게 된 것은 지난 2005년 잘 나가던 전자제품 분야를 과감히 축소하고 모바일 주변기기 전문기업으로 탈바꿈한 도전에서 비롯됐다. 롱아일랜드 포트워싱턴의 아이러브 본사를 방문, 최근 많은 기업의 목표가 되고 있는 ‘혁신’이란 이미지를 일찌감치 실천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아이러브의 성공 비결을 들었다. ◆소비자 중심으로 성공=아이러브의 모기업인 제이윈은 1997년 맨해튼에서 창업주 저스틴 김 사장의 1인 기업으로 출발했다. 대기업들만의 경쟁 무대로 여겨졌던 전자제품 시장에 작은 1인 기업인 제이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란 독특한 컨셉 때문이었다. 제이윈(jWIN)이란 기업명은 ‘단지 내가 필요한 것(Just What I Need)’란 문장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DVD·비디오 플레이어, 오디오 등 제이윈이 내놓은 제품들은 가격 거품은 빼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독특한 기능을 첨가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뉴욕시 전자 제품 도·소매상들을 고객으로 만들게 된다. 브라이언 양 아이러브 세일즈·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제이윈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제품으로 포터블 DVD를 꼽았다. 양 부사장은 “대기업 제품보다 가격은 저렴하면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화면이 회전되는 스위블 기능을 탑재해 소비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뜨거웠던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뉴욕의 작은 로컬 기업이었던 제이윈은 창업한 지 10년도 되기 전에 전국적인 판매망을 보유한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제이윈의 포터블 플레이어, 홈시어터, LCD TV 등은 메이시스 등 미국 내 유명 백화점에서 판매됐고 1999년부터 시작된 멕시코 등 해외 수출은 2005년에는 전체 판매의 30%까지 이르게 된다. ◆성장을 위한 혁신= 전자제품 시장에서 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한 제이윈은 2005년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아이러브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이하 아이러브)’라고 새롭게 기업명을 변경하면서 모바일 주변기기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 무모한 도전이라는 우려도 상당했으나 김 사장과 임원진들은 모바일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펠릭스 김 사업개발부 차장은 “소바자가 원하는 혁신적인 제품은 언제든지 통한다는 믿음이 회사 내에 존재했다”며 “오히려 내부보다는 그간 회사와 거래해왔던 바이어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브는 그간 전자제품 분야에서 쌓아왔던 기술력을 모바일 주변기기에 접목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품 개발에 회사 전체 인력의 30%를 집중시켰으며 케이스·음향기기·케이블 등 제품별로 전담 개발 부서를 독립적으로 운영해 전문성을 높였다. 독자 개발한 ‘jAura’ 음향 기술은 고급 스피커 음질과 비교했을 때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다. 또 2008년에는 당시로는 생소했던 무선송신 기술인 ‘블루투스’를 이용해 모바일 기기용 스피커를 개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 부사장은 “아이러브가 3~4년 전부터 시도한 기술들을 최근에야 사용하는 기업들도 있다”며 “항상 앞서가는 기술과 디자인을 담은 제품 개발을 고민하는 것이 회사 직원들의 일상”이라고 말했다. 2012년 6월 현재 아이러브는 하이파이 오디오시스템, 휴대용 멀티미디어 기기, 노트북용 휴대용 스피커, 스마트폰 주변 기기 등의 분야에서 총 500여 제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애플과 계약=아이러브의 변신은 2005년 ‘아이팟’으로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애플사와 주변기기 계약을 맺으면서 인정 받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는 유명 업체 ‘스테이플스’와 ‘베스트바이’에 아이팟 주변기기 제품을 납품했다. 2007년 미가전협회(CES) 혁신상을 수상한 것은 아이러브의 인지도를 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는 신호탄이 됐다. 아이팟에 담긴 영상을 7인치 화면에 볼 수 있게 한 기기인 ‘i1055’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평가 받으며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아이러브는 2012년까지 CES로부터 21개 제품이 혁신상을 받았다. 또 올해에는 2개 제품이 ‘iF디자인 어워드’를, 4개 제품이 ‘레드닷 디자인상’을 받는 등 세계 최고 권위의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제이슨 박 마케팅 매니저는 “모바일 주변기기 기업에서 혁신과 디자인 부분에 이렇게 많은 상을 받은 곳은 없다”며 “아이러브의 성장은 제품만 훌륭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2005년 모바일 주변기기 회사로 탈바꿈한 뒤 아이러브는 매년 50% 가까운 성장을 거듭했다. 금융위기 시절에도 흑자 행진을 계속한 아이러브는 2012년 6월 현재 직원 수가 200명까지 늘었으며 해외 수출은 2005년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아시아 등 70여 국가로 뻗어나갔다. 올해는 세계 시장 매출액을 전체의 50% 선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양 부사장은 “앞으로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맞춰 태블릿PC 주변기기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라며 “기술과 디자인을 보다 고급화 해 세계적 기업으로의 입지를 굳게 다질 것”이라는 목표를 밝혔다. 서한서 기자 hseo@koreadaily.com ◆아이러브=▶1997년 맨해튼에서 전자제품 개발·판매 기업 ‘제이윈’으로 시작 ▶1999년 퀸즈 우드사이드로 본사 이전 ▶2005년 ‘아이러브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로 이름 변경하고 모바일 주변기기 개발·생산▶2005년 롱아일랜드 포트워싱턴으로 본사 이전▶2007~2012 21개 제품 CES 혁신상 수상▶2012년 iF디자인상· 레드닷 디자인상 수상

201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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