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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석-윤시내 부부의 북유럽 자유여행-③] ‘노르웨이를 한눈에’ 관광상품

스톡홀름에서 오슬로행 기차는 오전 10시반 출발해 오후 5시 넘어 도착한다. 스칸디나비아 3국과 핀란드까지 네 나라를 한 달 안에 나흘 동안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철도권(Rail Europe Pass, 1인 235달러)을 사용했는데, 예약요금을 따로 내야 했다. 이번에도 호텔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택시비 50달러)에 있어 좀 마음이 언짢다. 오슬로의 무료도보 안내 집합장소는 중앙역 호랑이 조각상 앞이다. 스톡홀름에서 집합장소를 찾지 못한 적이 있어 일찍 서둘러서 메트로를 타고 간다. 약 30여 명이나 되는 여행객이 모였는데, 여자 안내원의 마이크 없는 육성 설명을 듣는다는 것은 확실히 무리한 일이다. 대강 듣고, 명소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슬로 교외 열린 공원을 찾아,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세계 최강의 목선, 프램(Fram)이 전시된 박물관에 들어간다. 프램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번이나 북극과 남극 탐험에 사용되었으며, 세 번째 항해에서 탐험가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아문센과 선원들을 태우고 세계 최초로 남극에 이르렀다.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 없이 얼음뿐인 북극과 남극 탐험의 기록을 보며, 한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그 나라의 국민성과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에서 버스 타고 시내로 나온 뒤 다시 전차로 갈아타고 비겔란 공원으로 간다.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 200여 개가 전시된 비겔란 공원은 한 조각가의 작품을 설치한 공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다고 한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중앙로 좌우로 세워진 작품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 한 단면을 포착, 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아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환희하는 어머니, 포옹하는 남녀, 새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소녀, 그리고 너무 인기가 높아서 팔이 부러지고 얼굴도 훼손된 것을 고쳐놓은 ‘화가 잔뜩 난 소년’ 등 진지하고 사실적이며 섬세한 표정이 그냥 지나쳐가기 미안스러울 정도이다. 공원에는 조각품뿐만 아니라 원형의 분수, 배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냇물, 넓디넓은 운동장이 있어서 햇빛이 늘 그리운 이곳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거닐고 운동하고, 음식을 차려놓고 풀밭에 둘러 앉아있다.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모노리뜨(monolith)는 비겔란과 그의 조수들이 조각한 각양각색의 사람 121명이 서로 엉키고 또 엉켜서,서로의 어깨와 머리와 가슴을 짚고 계속 위로 14미터 올라가는 탑이다. “이 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비겔란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것은 나의 종교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무슨 뜻일까. 언뜻 모호하게 들리면서도 한편 수긍이 가는 대답이기도 하다. 노르웨이 관광 상품에 ‘노르웨이를 한눈에’(Norway in a Nutshell)란 것이 있다. 오슬로에서 기차 타고 미르달을 거쳐 플램으로 간 뒤 거기서 배를 타고 피요르드를 2시간쯤 구경한 뒤 버스와 기차로 버겐까지 가면서(전체 약 13시간)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풍경, 즉 산과 호수, 폭포와 피요르드, 산골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1인당 약 240달러).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은 좋지만 온종일 기차-배-버스-기차로 갈아타면서, 게다가 짐까지 끌고 다니다 보면 피로해서 좋은 경치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남편과 상의해 우리는 플램에서 하루 쉬고 유명한 송네 피요르를 다녀오기로 했는데, 마침 관광철이라 플램 호텔은 만원이어서 호스텔에 가까스로 예약했다. 미르달-플램 가는 기차는 가파른 산길(20km)을 1시간 걸려서 가는데 중간에 키요스 폭포를 구경시켜주려고 잠시 쉰다. 기차역 바로 앞의 골짜기 사이로 귀가 먹먹한 폭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도 속이 후련한 장관이려니와, 주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문득 바위에 나타났다 한순간 폐허가 된 오막살이 집 뒤로 사라졌다 하면서 폭포에 얽힌 전설을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다음 날, 송네 피요르를 항해하는 오전 8시 배에 올라탄다. 시간도 이르고 날씨도 우중충해서 큰 배에 탄 사람은 모두 이십여명 정도이다. 아무도 없는 갑판에서 나는, 옹기종기 붙은 집들이 오른쪽 해안에 나타나면 오른쪽으로 가서 사진 찍고, 기가 막힌 절벽이 짙은 청회색으로 바다에서 솟아올라 있으면 왼편으로 가서 사진 찍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서 신바람이 난다. 물은 고요하고 산은 높고, 물 위에 비친 산은 더욱 깊고 높다. 유네스코가 인류 자연유산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버겐 호텔은 시내 중심에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짐을 방에 던져놓고 근처 생선 시장으로 나간다. 인천이나 부산 생선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며 주로 즉석 음식과 생선 알을 관광상품으로 내놓는 곳이다. 우리가 기웃거리니까 남자 직원 한 명이 “어서 오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한다. 그 인사에 끌려 천막 아래 식탁에 앉아 꼬치구이와 연어를 시켰는데 맛은 추천할만하지 않다. 버겐은 12세기부터 약 200년간 노르웨이의 수도였으며, 오슬로로 수도가 옮겨간 뒤에는 19세기까지 발트해와 북해 해상무역의 중심이었던 역사 깊은 항구이다. 상인들이 지은 목조건물들은 1702년 화재로 없어지고 다시 옛 모양으로 재건한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로에게 의지하듯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달콤한 냄새로 행인의 발길을 잡는 베이커리와 장난감 가게, 기념품 가게, 카페들이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건물 안에서 장사에 바쁘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가 살고 일하던 집, 트롤하우겐(요정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이 버겐 시외에 있다 하여 관광안내소에 갔더니, 안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번호표를 뽑아 들고 2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 나이 또래라면 우물쭈물하더라도 처음 부분은 따라 부를 정도로 잘 알려진 곡, ‘솔베지의 노래’가 그리그의 곡이다. 그리그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사랑은 유난하여 버겐 곳곳에는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 트롤하우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북구산 소나무로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이 아치를 이루며 서늘한 그늘을 던지고, 햇볕 가득한 정원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발하였다. 일체의 소음을 피해 작곡에만 전념하려고 본관에서 떨어져 나와 지은 작업실은 문만 열면 발밑이 바로 바다이다. 트롤하우겐 관람과 더불어 약 30분간 피아노 연주가 있는 집은 요정들이 사는 것처럼 지붕이 뾰족한 삼각형으로 생기고, 실내 무대 뒤는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연주자 머리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이번 연주회의 피아니스트는 최근에 무슨 상을 탄 유명한 사람으로 연주에 앞서 곡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는 친절을 보여준다. 그리그는 교향곡 같은 큰 곡보다는 자그마하고 아늑한 장소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여 듣고 즐길 수 있는 피아노 소곡을 즐겨 쓰고 가곡도 100여 곡이 넘게 작곡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곡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 성악가 니나였으며, 그와 니나는 바닷가 큰 바위 속에 함께 잠들어 있다고 하여 음악회가 끝나고 찾아가 본다. 바닷물 찰랑대는 소리와 나뭇잎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와 좀 전에 들은 피아노의 여음과 생전에 인정받아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 한 예술가의 생애는 허공 속에서 합쳐진다.

2017-09-29

오명석~윤시내 부부의 북유럽 자유여행-②

탈린에서 스톡홀름 가는 배에는 저녁 식사가 두 번(5시30분과 8시30분, 1인 33유로)이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택해 식당에 가니 지정된 자리로 안내해 준다. 서두르지 말고 맛을 음미하며 조금씩 먹으라던 여행전문가의 충고를 떠올리며 포도주와 훈제연어로 시작한다. 47년째 같이 살아온 부부 사이에 꼭 해야 할 말이 남아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마주 앉아서 화난 사람처럼 말없이 먹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얘기들을 흘린다. 음식비평가인양 이 청어는 어떻고 저 소시지는 어떻고, 케이크는 뭐가 제일 맛있을까 하면서, 45달러어치를 먹으려면 아직도 한참 더 먹어야 할 텐데 하며 웃는다. 다음 날 새벽 갑판으로 나오니 해안은 물안개가 뽀얗게 깔려있고, 나무에 둘러싸여 빨간 지붕만 보이는 오막살이, 그나마도 없는 작은 바위섬, 길게 물살을 남기는 흰 돛단배 등이 손에 잡힐 듯 지나간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 로런스 강의 ‘천 개의 섬’보다 훨씬 더 길고 넉넉하며 아늑한 해안 풍경이다. 선착장에 기다리고 있던 초로(初老)의 택시 운전사는 20년 전 이란에서 이민 왔다며 악센트 있는 영어로 스웨덴 칭찬에 입이 마른다. 사람들은 관대하고 친절하며 사회는 안전하고 국민 모두 건강보험이 있고 교육은 대학까지 무료라고. 세금을 많이 낸다고 불평하지만 세금 낸 돈으로 아이들 교육했다고 생각하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니라며, 자기는 스웨덴을 사랑한다고 한다. 헬싱키 숙소가 허름했기 때문에 스톡홀름에서는 약간 웃질인 베스트 웨스턴(아침 포함 약 160달러)을 골랐는데, 와보니 주변이 쓸쓸하고 좀 외떨어진 곳이다. 여행 중에는 숙소가 늘 그 도시의 방향과 거리의 기준이 되는데, 숙소를 시외로 정했기 때문에 스톡홀름 도시 안의 지리가 명확하게 머릿속에 잡히지 않는다. 다음 날 10시에 있는 무료도보 안내 (Free Walking Tour) 집합장소를 찾아 헤매다 결국 놓치고 말았다. 북구 최대의 도시 스톡홀름은 반듯하고 웅장하며 격조 높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당당하게 서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높은 시계탑과 붉은 벽돌의 시청 건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청으로 손꼽히며 내부 안내를 받을 수 있는데(100 크로너, 약 13달러) 간단한 한글 안내서도 있다. 매년 12월10일 노벨상 수상식과 축하 만찬이 이곳에서 열리며, 만찬 후 무도회가 열리는 ‘황금빛 방’은 거대한 벽이 스웨덴 역사를 묘사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다행히도 무료도보 안내 그룹과 마주치게 되어 안내자의 양해를 구한 뒤 합류한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 중 하나는 도시에 얽힌 숨은 역사를 듣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 앞에서는 18세기 말 왕권 강화를 위해 의회와 맞섰던 구스타브 왕 3세가 가면무도회 중 바로 이 극장 앞에서 암살당했다는 것이며, 한 은행 앞을 지나가면서는 은행에 들어온 강도가 여직원 서넛을 비좁은 금고실에 인질로 가뒀는데 며칠 지나자 인질 중 하나가 강도를 마치 보호자인 양 두둔하게 돼 그런 심리 현상을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이라 한다는 것이다. 또 라울 월렌버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유대인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한 외교관으로 스웨덴의 쉰들러라 불리는데,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당한 후 종적이 묘연하여 그를 기리는 공원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졌다는 것 등이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를 맞아 스톡홀름은 공휴일이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귀한 햇볕을 즐긴다. 바닷가에 있는 티볼리 공원(무료)에는 화관(花冠)을 머리에 쓴 아가씨들과 손자에게 솜사탕을 사주려고 기다리는 할아버지, 튀긴 강냉이 한 바구니 놓고 먼저 먹으려 장난치는 아이들과 롤러코스터가 바다 쪽으로 추락하듯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가슴 졸이는 구경꾼들로 흥겹다. 도시 한편에 이런 놀이공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오밀조밀하게 놀이기구를 설치한 것이 이채롭다. 티볼리 공원에서 한참 섬 안쪽으로 들어가면 세계 최초의 야외 박물관 스칸센이 나온다.(입장료 100 크로너) 30만 제곱미터의 넓은 대지에 스웨덴 전통 가옥들이 재현되어 있고, 옛날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빵집, 약방, 소주 만드는 양조장, 대장간 등이 있다. 약방에 들어가 보니 조그만 서랍이 수십 개 벽에 붙어 있고, 약초를 써는 칼과 저울도 있어서 마치 한약방에 들어온 기분이다. 좁은 바지, 하얀 주름이 달린 꼭 끼는 윗도리를 입은 반백(半白)의 남자는 실제로 직업이 약제사인데, 옛날 복장을 하고 방문객을 맞아 설명하는 것이 좋아 자원봉사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자연산 약초가 약의 주원료였지만 이제는 화학 재료가 90% 이상인데, 아스피린은 아직도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성분을 원료로 사용한다고 하여 깜짝 놀란다. 간단한 점심을 사서 야외 벤치에 앉아 먹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햇빛을 시기해서인지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 매일 소나기가 한, 두 차례 지나갔다. 비가 그치자 넓은 잔디밭 한편에 설치된 무대에 스웨덴 전통의상을 입은 남녀 악사들이 나와서 노래하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역시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가 빙 둘러선 구경꾼들에게 중앙으로 나오라고 하자 어린이, 젊은이, 노인 모두 중앙으로 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오리, 돼지, 토끼 흉내도 내며 빙글빙글 돈다. 음악이 바뀌자 이번에는 장대에 달린 색색의 헝겊을 잡고 서로 엇갈려 가며 돌아간다. 우리가 메이폴(Maypole) 춤이라 부르는 민속춤이다. 햇볕은 따갑고 춤과 노래는 흥겹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스톡홀름에는 한국 식당이 두엇 있는데 한 군데는 공휴일이라 문을 닫고, 다른 한 군데에 미리 전화를 걸어 영업하는지 확인한 후 찾아간다. 여기서도 3일 시내 교통권을 사 아무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어 좋다. 같은 거리라도 모르는 길은 더 멀고 혹시 잘못 가는 게 아닌가 싶어 행인에게 묻고 또 물어 겨우 찾는다. 이른 저녁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는데 식탁에는 김치찌개 냄비가 화로 위에 놓였고, 반찬도 몇 가지 차려져 있다. 주인이 나와 인사를 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자기는 35년 전에 공부하러 왔다가 눌러 앉았노란다. 영업이 잘 되느냐고 물으니, 요새 한국에서 북구라파 여행이 최고 인기라서 하루에 수백 명이 올 때도 있고, 오늘도 예약한 손님들이 좀 있으면 오기 때문에 미리 상을 차려놓았다고 즐거운 비명이다. 헬싱키보다 스톡홀름은 물가가 비싸다. 커피는 한 잔에 7달러,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고 뜨거운 물을 한잔 달라고 해도 1달러 넘게 내야 한다. 하기야 뜨거운 물도 전기 써서 덥혀야 하고 종이컵도 사려면 돈이 드니까 뜨거운 물 한 잔 값을 받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그런데도 야박한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풍족한 미국에서 살아서 우리가 공짜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2017-09-15

[오명석·윤시내 부부의 시베리아~몽골 횡단 기차여행-③] 눈 없는 시베리아 벌판

이르쿠츠크 기차 정거장에서 늙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경위는 이러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같이 일어나서 택시 불러 타고 이르쿠츠크 역에 6시 반에 도착, 기차 시간표 게시판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모스코행 001번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철도(www.rzd.ru) 웹사이트에서 내가 직접 표를 샀으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인데 틀렸으면 어떡하지? 가슴 졸이며 예약 프린트한 것을 살펴보니 분명히 ‘08.06’이 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날짜, 즉 6월 8일이란 소리고 출발시각은 오후 4시다. 러시아는 날짜 적는 방법이 미국과 달라서 여행계획 짜는 내내 날 혼란시키더니 기어코 한 방 맞았구나! 드디어 4시가 되어 모스코행 기차에 올라탄다. 두 사람만 쓰는 1등 칸이다(1인당 약 2만5000 루블). 이 독방에서 3박 4일을 보내야 한다. 사실 기차여행에서는 다른 승객들과 어울려서 얘기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고 떠들썩하게 지내야 하는데. 더구나 잔뜩 기대했던 와이파이가 없으니 시간을 무엇으로 메울까? 이르쿠츠크를 정시에 떠난 기차는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기운차게 달린다. 남편과 나는 우리가 상상했던 시베리아와 지금 창밖에 펼쳐지는 시베리아 사이의 괴리에 어리둥절하고 어처구니없고 몹시 실망스럽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콧수염에 고드름을 달은 오마 샤리프가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를 신고 비틀거리며 걷던 끝이 없던 눈 덮인 벌판, 우리가 기대했던 시베리아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춥지 않아서 여행하기 가장 좋다는 6월을 택해 시베리아에 왔으면서 눈 덮인 황량한 시베리아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기대며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저기 눈이 시리도록 고운 초록의 들판과 한 치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곧고 하얀 백양나무 둥치와 검푸른 잎으로 하늘과 해를 가린 소나무의 깊은 숲과 마치 동화책 속의 가난한 나무꾼 집처럼 작고 허름한 나무로 지은 집들과 무언가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는 한 뼘 남짓한 텃밭을 보라.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어디에도 있는 것.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는가. 실망스러움을 접고, 지난 5개월간 틈틈이 읽은 시베리아 횡단 기차 여행 안내서 중에서(서병용저, ‘이지 러시아’ 와 ‘Trans-Siberian Handbook by Bryn Thomas’)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더듬어 본다. 첫째, 러시아 기차에서는 승무원이 최고 권위자이므로 승무원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둘째, 어떤 기차역에서는 그 지방 음식과 과일 등을 파는 행상이 있음으로 식사 해결을 위해 그들을 잘 이용할 것. 셋째, 돈은 전대에 넣어 배에 차고, 사람 많은 데서는 백팩을 앞으로 멜 것. 넷째, 함부로 미소 짓지 말 것.(러시아 사람들은 이유 없이 미소 짓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다섯째, 식당에 갈 때는 잘 차려입고 갈 것. 여섯째, 식사 후 팁. 팁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이 점 알쏭달쏭하다. 첫째, 기차 승무원. 우리 일등차의 승무원은 키가 약 150㎝, 몸무게는 약 65kg(?), 무릎이 아픈지 하얀 붕대를 한쪽 다리에만 감고 있어서 레슬링 선수를 연상시키는 다부진 체격의 중년여자이다. 승객이라곤 우리와 옆방 내외뿐인데 저 승무원의 직책은 뭘까. 우리가 추측하기는 우선 사모봐르(Samovar)의 불을 계속 지펴서 설설 끓는 물을 항상 준비할 것, 기차가 정차하기 전에 화장실을 조사해서 안에 사람이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할 것.(왜냐하면 기차가 정차하면 화장실 문이 잠기므로 까딱 잘못했다가는 화장실에 갇힌다) 기차 복도의 커튼을 닫을 것. 바깥 풍경을 보는 것이 기차 여행의 중요한 이유이므로 나는 한사코 복도의 커튼을 열어놓는데, 내가 잠시 한눈 판 사이 커튼은 영락없이 닫혀있다. 둘째, 정거장에서 먹을 것 사기. 큰 역에서는 행상들이 딸기, 앵두, 닭 다리, 소시지, 구운 생선 등을 파는데 우리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앵두 한 봉지 사고, 상점 유리창에 붙어있는 한국 라면 봉지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다. 따끈하고 얼큰한 라면을 훅훅 불어가며 먹고 나면 속은 확 풀리고 배는 두둑하고 잠시나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 나는 신라면 두 개를 (하나에 175루불, 3불이 넘지만 지금 값 따질 때가 아니다) 들고 기차로 오면서, 끓는 물이 항상 있음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얼마 후 뱃속이 출출해지자 지금 먹으면 딱 좋겠다 싶어 물을 가지러 일어나다 말고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세상에 바보도 이런 바보가 있나. 컵라면을 사야지 맨 라면을 샀으니 끓는 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셋째, 돈 간수하기. 우린 전대도 없으려니와 돈도 몇 푼 안 되어서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사람 많은 곳에서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안내원이 자꾸 주의를 주면 마지못해 백팩을 앞으로 메었다가 금방 제자리로 돌리곤 했는데 아무 사고도 없었다. 넷째, 함부로 미소 짓지 말 것. 이 점 참 지키기 어려웠다. 특히 기차 승무원에게는. 승무원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기억하고 있어서 물을 가지러 갈 때, 화장실에서 나올 때, 정차한 기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 때, 승무원과 마주치면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었고, 승무원의 무뚝뚝한 눈초리를 받으면 아차! 하고 놀라기 일쑤였다. 다섯째, 식당에 갈 때는 잘 차려입고 갈 것? 천만의 말씀. 잘 차려입고 가는 식당에 가보지 못해서인지 우리가 점심, 저녁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잘 차려입으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여섯째, 팁. 팁은 잘 몰라서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했다. 1980년 후반 소련을 여행한 분이 여행 도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대수랴 싶어서 괜히 부자 티를 내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구겨진 옷이나마 깨끗한 거로 갈아입고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식탁은 좌우로 열 대여섯 개 되는데 손님은 하나도 없다. 웨이츄리스가 가져온 메뉴를 보니 점심으로 Option A 와 Option B가 있다. 서로 비슷비슷한 음식이기에 하나씩 달라고 했더니, Option B는 없다고 한다. 이상하다. 손님이나 많으면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첫 손님인듯한데 Option B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린가. 같은 날 저녁, 다시 식당차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역시 손님은 우리뿐이다. 맛도 별로 없고 값만 비싼 식당차를 러시아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는 듯하다. 저녁 메뉴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보-쉬 수프와 굴라시가 있어서 얼씨구나 하고 주문했더니, 보-쉬 대신 닭고기 수프, 굴라시 대신 소고기 스튜만 있으니 그걸 먹으라고 한다. 아이스크림만 해도 맛이 수십 개나 되는 미국에서 40년이 넘게 살고 나니 선택하라고 엄연히 써놓고서도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 답답하고 허위스럽고 얕잡아 보고 싶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내일이면 모스코에 도착할 테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문의: seenaeyoon@gmail.com

2017-08-21

오명석·윤시내 부부의 시베리아~몽골 횡단 기차여행-④

모스코: 붉은광장의 위용(偉容)과 빅토르 초이 추모의 벽 센터럴파크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고키파크’ 이름 모르는 두 청년의 친절 잊혀지지 않아 100세를 앞둔 어머니가 가끔,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하고 의아해하시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세월의 빠름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6월11일 이른 아침 시베리아 횡단의 종착역 모스코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꼭 그러했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여행안내서는 개인적으로 러시아 여행을 할 경우 러시아 고유 문자, 키릴(Cyrillic) 알파벳을 배울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적어도 건물, 박물관, 지하철역, 길 이름 등을 읽을 수 있어야 목적지를 찾아갈 것이고, 북구의 여러 나라와 달리 러시아인은 영어에 익숙지 않아 행인의 도움을 기대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새로운 언어를 배울 나이인가. 알던 것도 잊어버릴 판인데. 그래도 길 이름 정도는 읽어야 되겠기에 부엌 칠판에 키릴 알파벳을 써놓고 오가며 외우려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몇 달을 공부해서 겨우 안 것은 키릴어 몇 단어 정도다. 다행히 한인 여행사 ‘백야 나라’(www.100yanara.com) 에서 정기적으로 투어를 하고 있다. ‘모스코 심장투어’(일인당 약 6만원)는 붉은 광장, 우즈펜스키 성당, 성 바실리 성당 등을 온종일 걸어 다니며 보여주는 것이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려서 우산 썼는데도 어깨, 팔, 다리가 흠뻑 젖고 춥다. 안내자는 남편 따라 왔다가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는 중년 여인이다. 빗속에서도 열심히 설명해주고 성실하게 안내해준다. ‘부활의 문’을 통해 붉은 광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넓디넓은 광장 끝에 모스코의 상징 성 바실리 성당이 달력 속 그림처럼 또렷하게 서 있다. 외부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실제는 열개 성당이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서로 대조되는 색깔과 다양하고 정교한 무늬로 장식된 양파 모양의 지붕과 첨탑은 마치 퍼즐처럼 오밀조밀 꽉 짜여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안내자는 러시아 정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성화(icon)라고 한다. 성당 크기에 따라 성화가 세줄 혹은 다섯 줄로 전시되어 있으며, 중앙에 왕의 문(King’s Gate)이 있는데 미사를 드릴 때 사제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서 집전, 신자들은 미사 자체를 볼 수 없다고 한다. 가톨릭 성당과 달리 의자가 없어서 신자들은 서서 기도한 후 성화에 입을 맞춘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머리에 미사포를 쓰고 성화에 입 맞추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경건하고 아름답다. 우즈펜스키 성당(성모승천 성당)은 다섯 개 황금빛 원형 지붕과 간결한 선과 흰색 외벽이 어우러져서 단아함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반 3세가 따따르 칸의 법전을 여기서 찢어버리고 250여 년의 몽골 지배하에서 벗어난 역사적인 장소이며, 그 후 로마노프 왕조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이다. ‘모스코 환상투어’(일인당 약 6만원) 역시 걷거나 시내버스와 모스코 강 유람선을 타고 모스코 외곽을 보는 것인데 안내자는 젊은 청년이다. 바리스타로 국제대회에서 상도 받고 한국에서 돈도 잘 벌고 유명했지만, 미국 대신 모스코로 유학 오게 됐노라고 한다. 우리가 전철을 잘못 타는 바람에 집합장소에 20여 분 늦게 도착했는데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대조국전쟁 기념관’에 전시된 디오라마(diorama) 설명을 실감 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당시 소련의 접전상황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디오라마 그림들은 소련이 치른 치열한 전쟁에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모스코강 유람선을 타고 지친 다리를 쉬는 사이 모스코 국립대학, 그리스도 구세주 성당 등이 흘러간다. 19세기 말, 44년 걸려 지은 성당은 스탈린의 명으로 파괴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될 듯하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들어갈까 말까 해 방문을 포기하겠노라는 안내자의 결정이 고맙다. 모르긴 해도 내부는 지금껏 본 성당들과 비슷할 테니 밖에서 저 황금빛 아름다운 지붕이 먹구름 낀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울 명동 거리와 흡사한 아르바트 거리는 보행자 전용 도로이다. 기념품 파는 상점들, 카페, 푸시킨 부부가 살던 집, 거리의 예술가들로 활기차고 재미있다. 푸시킨은 변함없이 러시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의 싯구로 우리에게도 친근하다. 아르바트 거리 끄트머리쯤에서 안내자는 “이제 지금까지 숨겨온 보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 한 채가 넉넉히 들어갈 만한 지저분한 공터를 가리킨다. 한쪽 벽은 읽을 수 없는 낙서로 가득하고, 젊은 남자 얼굴이 그 안에 있고, 벽 아래 나무상자 위에는 시들은 꽃송이들이 널려있다. 저 사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는 안내자의 질문에 우리 그룹 사람들은 대답을 못 한다. “아, 빅토르 초이를 모르시는군요? 그럼 빅토르 안은 아시나요?” 하고 그가 다시 묻자, 러시아로 귀화한 스케이트 선수 아니냐고 누가 대답한다. 안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현수가 러시아 이름을 빅토르로 정한 것은 아마 저 사람 때문일 거라고 한다. 1962년 한국계 러시아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르 초이는 어려서부터 작곡을 했고, 4인조 록밴드 키(Kino)를 만들어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던 공산주의 시절이라 지하에서 키노 밴드의 음악을 녹음했고, 그의 음악은 테이프 복사판으로 전국에 퍼졌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가수였으나 늘 가난하게 살았으며, 유명해지기 전 그가 하던 일, 즉 아파트 지하실에서 보일러에 불을 때는 화부(火夫) 일을 계속하였다. 교통사고로 28세에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사인을 의심했으며, 추모하는 글을 누군가 이 벽에 쓴 이후 27년이 지난 오늘까지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있는 팬들이 찾아와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글을 벽에 쓰고 꽃을 바친다고 한다. 한 예술가의 짧은 인생은 그의 핏줄 속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애절하다. 모스코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키 파크(Gorki Park). 오래전 베스트 셀러였던 스파이 소설의 제목이 ‘고키 파크’이어서 어딘가 음침하고 무섭고 위험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직접 와 보니, 모스코강 옆에 자리 잡은 공원은 뉴욕 센트럴 파크 못지 않게 넓고 자유롭고 아름답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거나 웃통을 벗어부친 남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탁구를 하고, 어린 소년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비틀거리며 달리고, 백발의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다. 맑게 갠 여름날의 저녁 한때를 가족과 함께 즐기는 것은 러시아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둘째는 이름 모르는 두 청년의 친절이다. 열흘을 전화 없이 살고 나서 모스코에 도착하자 역 구내 잡화상에서 심(SIM) 카드를 사 넣었는데(약 900 루불) 통화가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 전문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스무 살 안팎의 앳된 청년 둘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다른 손님을 맞는 틈틈이 한 시간도 넘게 번갈아가며 손보아주었다. 깨어진 선입관과 이름 없는 러시아인들의 친절. 사진에는 없는 추억이다. (계속)

2017-08-11

[오명석·윤시내 부부의 시베리아~몽골 횡단 기차여행2] 이르쿠츠크와 바이칼 호수

여행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뽑으라면 나는 단연 기차여행을 첫째로 뽑는다. 이 바쁜 세상에 비행기로 날아가면 단 서너 시간 걸릴 곳을 3일씩 걸려 기차로 가는 것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간과 경비로 따지면 그 말은 맞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고 경제적이다. 그러나 여행을 어디 시간과 돈이 좌우하게 하는가. 은퇴해서 있는 것이라곤 돈 안 되는 시간과 바람뿐인데. 시베리아-몽골 기차여행의 첫 출발지 울란바트로에서 저녁 8시35분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탄다. 이틀 밤을 기차에서 자야 하는데 1등석은 없고 2등석은 4인용이라 침대가 좌우 이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고심 끝에 거금을 들여 침대 넷 있는 칸을(110달러x4=440달러) 몽땅 사기로 했다. 하루 저녁쯤이야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과 한 방을 같이 쓴다 하여도 이틀 저녁을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기차에 타고 보니 역시 잘한 결정이라 싶다. 의자에 마주 앉으면 무릎이 거의 맞붙을 만큼 협소한 방인데, 할 말도 없는 사람 얼굴 빤히 바라보고 앉아있는 고역을 어떻게 치르며, 잠자리에 들기 전 옷은 어떻게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려면 누구든지 이층 침대에서 사다리 짚고 내려와야 하는데 잠귀가 유난히 밝은 남편이 그 시끄러움을 어찌 견딜 것인가. 짐을 선반에 올려놓고, 의자를 펴서 침대를 만들고, 세탁해서 유리 종이에 싸서 준비해놓은 눈같이 희고 반들반들한 시트를 꺼내 잠자리를 만든 뒤, 책과 화투를 꺼내 탁자에 놓는 것으로 준비는 끝난다. 이 순간부터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할 일은 전혀 없다. 길이 막혀도, 날씨가 궂어도, 세계 어딘가에서 테러가 일어나도 나는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런 일들을 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게는 이제부터 오직 기차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길 일만 남아있다. 그리하여 울란바트로에서 저녁에 출발한 기차가 1113km(약 700마일)를 가는데 장장 36시간이 걸린다. 가는 시간보다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정거장에서 안내방송 한마디 없이 6시간씩, 3시간씩, 시간이 정지한 듯 꼼짝없이 버티고 서있다. 위험은 아랑곳없이 철로를 여기저기서 마구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러시아 접경 도시에서 여권 조사하는 관원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했다고 분개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인의 불만에 귀 기울이며, '때 되면 가겠지' 이르쿠츠크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고 마음 편하게 먹는다. 어느새 이틀 밤이 지나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우리 숙소는 ‘마마호스텔(Mamahostel)’. 나이 60을 바라보는 러시아 여인이 140년 된 집에서 운영하는 허름한 여인숙이다(하룻밤 1500루블, 약 30달러). 아침으로 밀전병, 메밀죽, 커피 등을(500루블), 저녁으로 맛있는 수프(보-쉬)와 생선과 감자와 채소(1000루블) 등을 판다. 특히 메밀죽은 여기서 처음 먹어본 건데 푹 삶아서 부드럽고 구수하며, 보-쉬국은 기름기가 없고 약간 털털한 맛이 우리 우거짓국을 연상시켜 주어서 둘 다 러시아의 대표 음식으로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 쉬어가는 곳인데, 그 이유는 근처에 바이칼 호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3박4일 일정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광수 작 ‘유정’의 주인공 최석과 남정임 두 사람이 사회와 주위 사람들의 오해와 지탄을 받고 홀연히 고국을 떠나 얼어붙은 형극의 땅 시베리아로 간 뒤 종적을 감춘 곳이 바로 바이칼 호수이다. 1950년대에 사춘기를 겪은 내게 바이칼 호수는 슬프고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의 종착지로서, 황막하고 처절한 겨울 경치와 더불어 신비로운 베일에 가려진 호기심의 대상이다.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 있다는 바이칼 호수의 백미는 호수 안에 있는 올혼(Olkhon) 섬이라고 여행안내서마다 방문을 권장한다. 이르쿠츠크에서 7시간 걸리는 곳이라 당일치기는 어렵다 해서 하루 잘 수 있도록 집을 떠나기 전 예약을 해두었던 터라 다음 날 아침, 안내원 맥스가 차를 갖고 왔다. 맥스는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체격의 36세 러시아인이다. 아직 미혼이고 나타샤라는 여자 친구가 있으며, 혼자 된 아버지는 멀리 사는데 사람이 살다 죽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걱정하지 않는다고 무심히 말한다. 일 년에 반, 여름과 겨울 관광철에 여행안내원으로 일하고, 나머지 반은 여행을 다니는데 차는 집에 두고 무임승차(hitch hiking)를 해서 간다고 한다. 위험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러시아인은 자리가 있으면 기꺼이 여행객을 태워주고, 자기도 길 가다가 엄지손가락 신호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태워준다고. 맥스는 바이칼 호수를 세상의 낙원이라고 말한다. 물은 깨끗해서 호수의 물을 그냥 마셔도 배탈 안나고, 공기 맑고, 나무는 울창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자연. 천국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 태어나고 자라서 성숙한 사회인으로 사는 고향을 진심으로 속속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내 마음 속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문득 소나무 숲 아래에 진분홍 꽃수풀이 펼쳐진다. 시베리아 진달래다. 꽃의 크기가 좀 작은 반면 색깔은 진분홍으로 더 짙다. 올혼 섬이 천국임을 다시 한번 인식시켜주려는듯 진달래 꽃숲은 한동안 계속된다. 욕심 같아서는 올혼섬이 더 이상 관광객들을 위해 호텔을 짓고 길을 닦고 식당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7시간을 투자하여 오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모습 그대로의 자연을 이익으로 배당할 수는 없는 일일까. 호수라고 말은 들었지만 믿기지 않을만큼 넓고 또 넓은 물은 깨끗하고 잔잔하며 맑은 햇살 속에서 짙푸른 색과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바람이 솔잎 사이를 빠져나가며 솔향기를 보내주고, 물결은 모래사장을 잠재우려는듯 살살 토닥거리며 그러면서도 바위를 부셔서 모래로 만들고 있다. 십년을 단위로 치는 우리 삶과는 비교조차되지 않는 시간이 여기에 있다. 참, 올혼섬에서는그곳 특산물 생선, 오물(Omul)을 꼭 먹어보라고 했는데, 오물을 파는 곳도 없고 섬 부근에는 어선도 없어 맥스에게 물어보니, 너무 많이 잡아서 물고기 씨가 마를까봐 정부에서 잡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전날 바이칼 호수의 항구, 리스트비양카(Listvyanka)에 갔다가 거기서 오물을 맛보길 정말 잘했다.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화덕 근처에 관광객들이 몰려 있어서 가 보니 생선을 훈제하고 있었다. 혹시 오물인가싶어, “오물?”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인다. 한마리에 100루블. 두 마리는 많겠고 한 마리만 사서 따끈한 것을 들고 식기 전에 먹으려고 근처 풀밭에 앉아 둘이 나눠 먹었다. 아주 잘 훈제가 되어서 살 한점 묻지 않고 가시가 발라진다. 간간하고 순한 맛이다. 이르쿠츠크에 돌아오니 밤 열시가 넘었는데도 해는 아직 높히 떠있고 시민들은 강변을 거닐며 백야를 즐긴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 모스코바 가는 기차를 타려고 기차 정거장에 갔는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엉토당토 않게 황당한 실수를 내가 저지른 것을 알고 당황하고 부끄럽고 화가 치밀어서 아무나 붙잡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실수였기에? (계속)   ▷문의: seenaeyoon@gmail.com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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