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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 10년 대장정의 마무리

대한민국 최고 흥행의 역사를 기록한 영화 〈명량〉과 2022년 여름 최고 흥행작 〈한산: 용의 출현〉을 이은 세 번째 작품이자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그린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12월 마침내 공개를 확정했다. 이로서 지난 10년 간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온 김한민 감독 이하 스탭들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명량〉을 기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업계의 의견이 많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웅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세계 해전 역사상 손 꼽히는 전투를 스크린에 옮긴다는 것에 대해 실현 가능성과 실현 불가능성 사이, 의견이 분분했던 것. 그러나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시작으로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시리즈, 세 명의 캐스팅이라는 획기적인 기획을 영화로 완성해냈다.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이 훌쩍 넘는 여정의 마지막 작품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노량 해협의 겨울 바다에서 살아서 돌아가려는 왜와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는 조선의 난전과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를 압도적 스케일로 펼칠 것을 예고한다.   〈명량〉의 최민식, 〈한산: 용의 출현〉의 박해일에 이어 이번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배우 김윤석이 노량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연기로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한 인물을 두고 서로 다른 배우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그 캐릭터를 해석한 경우 역시 한국 영화 사상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가 최초의 케이스다. 최후의 전투를 앞둔 이순신 장군 역으로 분한 김윤석은 좁고 깊은 노량 해협에서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현명한 장수, ‘현장’(賢將)의 모습으로 몰입해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현장감과 함께 그간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을 선보일 예정이다. 여기에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스펙터클한 재미와 더불어, 왜와의 전쟁을 끝내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압도적 스케일로 스크린에 재현해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전투를 더욱 성대하게 채울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최후의 전투의 현장으로 돌아가 관객들에게 장엄한 승리의 전투의 쾌감을 선사할 것이다.  프로젝트 이순신 이순신 장군 3부작 프로젝트 이순신 3부작

2023-12-22

[열린 광장] 울돌목, 소녀상이 거기 있었다

다시 여행이 일상화되고 있다. 지난번 한국 방문 때 목포를 찾았었다. 서울서 KTX를 타고 2시간30분이면 목포에 도착한다. 시에서 운행하는 일일 관광 버스를 탔다. 유달산으로 간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커다란 이순신 동상이 서 있다.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가파르고 일대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서 가이드가 멀리 남동쪽의 바다를 가리켰다. “저곳이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입니다”. 지금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가 놓여있었다. 저곳에서 그 기막힌 전투를 했었구나. 잠시 생각이 400여년 전으로 돌아갔다.   울돌목은 남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좁은 해협이디. 남해안 쪽 여러 섬 사이의 물이 울돌목을 통해 서해안으로 흐르는데 좁은 해협이 물 높이의 차이를 만들어 빠르고 세찬 해류가 흐른다. 이순신은 이 좁고 거친 해류를 이용해 겨우 13척의 배로 333척이나 되는 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5명인데 비해 왜군의 피해는 격침 31척, 파손 후 도주 90여척, 전사자 8000여명이었다. 이전 원균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은 같은 함대 300여 척을 가지고 거제도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게 대패하여 배는 모두 침몰하고 겨우 12척이 도망갔다. 병사 수천 명이 전사하고 수군은 완전히 궤멸했다. 이때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다시 3도수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이름뿐이었다. 그는 호남지역을 돌며 군사들이 버리고 간 무기를 수습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병사들을 모집했다. 보성지역에서 200여명의 젊은이가 자원한다.   조정으로부터 다시 명을 받는다. 수군을 포기하고 모집한 군사들과 같이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성 관아에서 그 유명한 장계를 쓴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바다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적은 한달음에  호남을 돌아 한강으로,대동강으로 가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싸움으로 원균이 빼앗겼던 제해권을 다시 찾고 왜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끊임없는 조정 대신들의 모함과 선조의 견제로 백의종군 해야 했던 그의 비통함과 그래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결기를 저 무심한 바다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기보다 사익추구에 몰두했던 대신들과 왕의 무능이 국난을 초래했던 역사에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다시 마음이 유달산으로 돌아왔다. 가이드가 산기슭을 돌아 내려가다 흑갈색의 소녀상 앞에 섰다. 늦가을 스산한 바람에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그늘진 곳에 있는 무표정한 소녀를 보는 순간 마음 저 안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소리쳤다. 누가 저 소녀를 이렇게 외로운 곳에 세워  두엇을까? 나라가 약해서, 주위에 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천리 타향 낯선 곳에 끌려가 몹쓸 일을 당하다가 죽어서도 저렇게 외롭게 버려져 있구나. 깨끗한 추모관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슬픈 역사가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할 수는 없을까?   지난 역사가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하루였다. 최성규 / 베스트 영어 훈련원장열린 광장 소녀상이 울돌목 울돌목 소녀상이 조선 수군 이순신 동상

2022-10-06

[역지사지(歷知思志)] 폭염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유럽 곳곳에서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유럽 언론에서는 올 7월이 1757년을 넘어설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1757년 7월은 유럽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기록된 해다. 가장 심한 폭염을 겪은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1757년 7월 파리의 평균 기온은 섭씨 25도.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다음은 역시 폭염으로 유명한 2006년 7월의 섭씨 24.8도다. 파리만큼은 아니었으나 역대급 더위로 비명을 지른 영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당시 무더위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작가 호레이쇼 월풀은 “유리잔의 4분의 3이 뜨겁다”며 “향후 몇 년간 올해(1757년) 여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무더위와 관련해 인상적인 언급을 많이 남긴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난중일기』에서다. 1594년은 인내심으로 유명한 그도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7월 28일·양력)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7월 31일)”고 토로했다.   지난 2월 한국기상학회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나온 기상자료를 분석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끌었다. 거의 매일 일기를 남긴 1593일 중 무려 1551일을 날씨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 해전사뿐 아니라 기후사에도 자취를 남기게 됐다. 유성운 / 문화팀 기자역지사지(歷知思志) 폭염 유럽 역사상 역대급 더위 이순신 장군

2022-07-20

[기고] 워싱턴의 ‘거북선 퍼레이드’

전국시대의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세를 몰아 대륙 정복의 야욕을 품고 20만의 병력과 50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해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던 조선은 전투 태세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지상전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행주산성이나 진주성 등 몇몇 방어전을 제외하면 거의 전멸 상태나 다름없었다. 개전 18일 만에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해 명에게 황급히 원군을 간청한다.     명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며 전세가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자, 명과 일본 간에는 지루한 강화회담이 5년 동안 진행된다.     결국 1597년 결렬되고 왜군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면서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전쟁은 계속된다.     육지와는 달리 한산해전의 대승으로 한껏 고무된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삼는다.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재침하자, 이순신은 이를 적 격멸의 기회로 삼고 왜군의 교두보인 부산포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경상 우수사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대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왜군의 꼬임에 빠져 전투에서 전멸 당한다. 이순신이 공들여온 무적함대는 하루아침에 괴멸되고 만다. 이에 놀란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복직시켰으나 살아남은 전력은 고작 병사 120명과 함선 12척 뿐이었다.     133척의 적의 대 함대와 대결하는 운명의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임한다. 일본 배 31척은 격침되고 겨우 살아남은 적은 간신히 패주한다. 총탄에 맞은 것을 숨기고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한산대첩, 노량해전과 더불어 충무공은 생전에 21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꺼져가는 나라를 구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영국의 해전사 연구가인 조지 알렉산더 밸러드 제독은 그의 저서 ‘해양이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비상한 전술을 구사하여 전투에서 항상 승리했다… 영국사람으로서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위대한 해군사령관임에 틀림없다.”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궤멸시킨 1905년의 사건에 놀란 밸러드는 3년간이나 일본에 체류하면서 배경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를  만난 자리에서 ‘롤 모델’이 누구냐고 물었다. 당연히 넬슨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고는 “나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순신에게는 훨씬 못 미친다. 이순신이 제독이라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고 대답했다.     이순신은 넬슨이 27척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33척을 물리친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단 12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 함대를 섬멸했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하던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리더십에 힘입어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 수군의 영웅적 활약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한낱 굴욕적인 패배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을 가능케 한 이면에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거북선’이라는 강력한 전투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거북선은 기존의 주력함인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지붕을 판자로 덮어 방어력을 높이며 포문을 배가했고 좌우 16개의 노를 사용해 기동성이 매우 뛰어난 공격형 전투함이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즈음해 워싱턴DC에서는 ‘거북선 퍼레이드’가 펼쳐진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감회가 무량하다. 라만섭 / 전 회계사기고 퍼레이드 워싱턴 거북선 퍼레이드 이순신 제독 이순신 장군

2022-05-16

[독자 마당] 국민을 위한 정치

임진왜란 7년, 이순신 장군을 적재 적소에 임명한 조선의 왕 선조의 탁월한 선택이 나라를 지켰다.     ‘무신은 순위를 따지지 않고 채용한다’는 원칙을 적용해 종6품이었던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 전라 좌수사에 임명했다. 무려 7계급 특진이었다. 장군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는 반만년 역사에 드물게 나타났던 불후의 명장이었다.     ‘상처로 모래알을 품은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 시련 없는 성취는 없다.     인도의 정치가 마하트마 간디의 묘비명을 생각해 본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성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간디는 이 7가지가 사회에 만연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분단 국가이면서 휴전상태여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또다시 분쟁의 불씨가 터질지 모르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     국제사회와의 연대는 필수다. 신뢰와 정의, 자유를 기반으로 우리나라를 세우고 안보정책을 제정립하며 지혜롭고 우수한 인재를 적재 적소에 배치해 나라 안 살림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또한 우리 주적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준비된 국방력, 훈련된 일꾼, 재정적 뒷받침으로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혈맹으로 맺어진 미국과의 협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 앞으로 우크라니아뿐 아니라 세계 안보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중국, 북한과 국경이 인접해 있고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을 노리고 있다.     새 정부에 희망을 두고 기대한다. 새 대통령의 공약처럼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정치로 더욱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바란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국민 정치 정치 노동 이순신 장군 정읍현감 이순신

2022-03-24

“이순신 장군을 존경합니다”

이순신 미주교육본부(이사장 김대영)가 제 5회 충무공 이순신 알리기 대회 시상식을 가졌다.   김대영 이사장은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 '충효의 정신'을 배우며 뿌리 교육을 확고히 하고, 각자 사는 곳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알리는데 주역으로 성장하며 활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대회를 개최했다”면서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의 국격을 높여 주고 우리 한인 학생들이 정체성을 바로 알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번 대회 홍보를 위해 전세계 약 1600여개 한국학교에 연락했으며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캐나다, 멕시코, 미국 등 약 110여명의 학생들이 응모했다.     이중 57명의 학생이 장학금과 상장을 받았다. 주최 측은 코로나로 대면 수업수업을 못하고 인터넷 수업을 하는 학교들이 많아 올해는 참석하는 학생이 저조 하였으나 특별히 버지니아에 열린문 한국학교 학생들이 작년에 1명 상을 받은 것에 비해 올해는 많이 참석해 최우수상 등을 휩쓸었다.   한편, 이순신 미주교육본부는 교사를 대상으로 '제2회 교육 안 공모 대회'를 개최한다.   응모 마감은 2월 10일이고 교육안 쓰기 마감은 4월 15일이다.  김옥채 기자 kimokchae04@gmail.com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 이순신 미주교육본부 충무공 이순신

2022-01-16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하)

9월7일에는 정탐인 임준영으로부터 적선 13척이 어란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9월9일에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탐라(제주도)에서 기증받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중양절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다. 해전 하루 전인 15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을 명량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옮기고, 장졸들을 모아 놓고 그 유명한 명언으로 군사들의 마지막 결의를 촉구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 꿈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승리를 예감하며 확신에 찬 과감한 작전 지휘를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위에 든 그의 최고 명품 경구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치열한 혈전을 앞두고 부하 장졸들의 결의를 다지고자 내린 군령이었지만, 이 경구는 그 의미와 적용의 폭이 대단히 넓어 오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죽자 살자 열심히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이란 뜻으로 널리 쓰고 있음을 교육자들은 알아 둘 일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 9월16일 이순신의 일기는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관찰병)이 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을 주목해 보면 ‘명량 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이 진 치고 있는 물결이 잔잔한 우수영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명량의 거친 물결과 소용돌이를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 듯이 기술한 종래의 작품과 영상물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참조: 해군사관학교 명량해전도) 이순신도 곧바로 13척의 판옥선단을 이끌고 맨 앞장서 133척의 일본함대를 맞이했으나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이순신의 기함 혼자서 130여 척의 적선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다른 판옥선들은 칠천량 참패로 공포감을 미처 이기지 못한 데다 열 배가 넘는 적선을 보니 기가 질려 물결에 할 수 없이 떠밀려 간 듯이 멀찍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가장 염려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쯤 혼자서 맹렬히 독전하던 이순신은 적에게 공격 기회를 주게 될까 봐 뱃머리를 돌려 부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초요기라는 깃발을 흔들어 오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다가온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에게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으나 또한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마”하니, 그들도 마음이 급하여 앞으로 돌진하였으나 곧 적에 포위당하여 이순신 기함이 달려가 구해 준다. 뒤에 처진 다른 판옥선들도 이순신 기함 혼자서도 맹렬한 화력으로 잘 버텨 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연달아 달려와 돌진한다. 이때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안골포(진해) 해전 때 투항해 온 일본인 병사 준사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바다에 떠 있는 일본 장수의 시체를 가리키며 “마다시(馬多時), 마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 마다시란 전의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별명으로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봉장이 되었으나 동생 또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려 적군들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토막 내게 하니 이 광경을 본 적들의 기세가 꺾이고, 그 틈을 타 맹공을 퍼붓자 적들은 전의를 잃고 31척의 함선만 격파당한 채 후퇴했다. 이로써 이순신은 불가사의의 부활전을 승리로 마감하여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또다시 구해 낸다. 구루시마 형제는 원래 해적 출신 형제 수군 장수로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우두머리였던 셈인데, 형제가 나란히 조선 수군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지은 죄에 따른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한편, 이순신은 하루 전 장병들을 독려하며 전했던 그의 명언 ‘필사즉생’을 몸소 실천하여 어렵게만 보이던 승리를 달성하는 살아 있는 교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셈이다. 또 다른 경구 ‘일부당경’은 명량해전 4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 이순신이 구상한 비상한 전략, 3차원적 병목(Battle neck) 저지 지리전 개념을 겨우 2차원 평면적 명량해협의 폭으로 부족한 해석을 내리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폭이 좁은 명량해협(현재 진도대교가 있는 지역)을 해전지로 택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수군의 약점을 지리적 특성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지리전 개념에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선이 수백 척이라 하더라도 폭이 불과 300여 미터인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서서 차례대로 항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을 지키고 있는 막강 화력의 조선 판옥선이 통과해 나오는 대로 격파해 버리면 승산이 있다는 구상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이순신 연구가들이 모두 공감을 하는 바이지만 명량해협이 폭만 좁은 것이 아니라 수심이 1.9 미터밖에 되지 않아 배 밑이 V 자 형인 일본 선박의 통과가 어렵다는 이순신의 입체적(폭과 깊이) 저지 개념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유는 해전 직전 일본 선단 200 척이 명량 입구까지는 도착하였지만, 이순신의 일기대로 명량을 통과해 참전한 일본 선박은 133척에 불과했고, 이들은 모두 크기가 작고 전투력이 약한 협선뿐이었다. 막상 전투력이 강한 일본 대형 선박인 아다케선 약 70척은 수심이 얕은 명량 수로를 통과할 수 없어 입구에 묶인 채 결과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찌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이순신은 명량의 폭과 깊이 두 방향의 입체적 병목현상을 비상한 전술로 구상하고 그렇게 성공하였지만, 자기 자랑을 극히 삼가는 겸손한 분이어서 이 구상을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연고로 우둔한 후손들이 이순신의 천재적 전략 구상을 절반 이하로 깎아내려 평가했다는 죄스러움이 앞선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절대 열세의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끈 총체적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한마디로 그 승리 요인은 군·관과 지역 국민의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는 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국민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숨어 지내던 백전 경험의 옛 부하 장졸들이 자진해서 속속 복귀하여, 판옥선은 13척뿐인데 오히려 노련한 장병들이 충분하여 판옥선 당 인적 전투력은 패전 이전을 능가했다. 더하여 절에 있던 승려들이 다수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힘을 더했다. 10월 하순의 바닷바람은 추위를 더하여 먹을 식량과 추위를 막을 의복이 문제였으나 이는 살 곳을 찾아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든 이삼백 척의 피난 선단이 통제사가 없으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자진해서 식량을 거두어 먹이고 옷을 주어 입혔으니 명량해전의 이순신 수군은 거지군대였다. 결론적으로 명량해전은 하나의 위대한 지도자와 통합의 리더십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표본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끝)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2017-11-14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상)

1597년 정유재란의 해 음력 9월16일(양력 10월25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목 울돌목에서 벌어진 13척 대 133척의 압도적 열세의 조?일 대혈전은 여러가지 면에서 진기록을 남기며 조선 수군에 기사회생의 승리를 안겨 준 불가사의한 해전 드라마이다. 우선 이 해전의 배경이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5년이 넘게 이어지는 동안 한번도 패한 일 없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조선 수군의 삼도수군 통제사직이 선조 임금의 오판으로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면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여 비롯된 결사 비상 응급 해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 ‘결사 비상 응급’인가? 믿음직스럽기만 하던 160여 척의 막강 판옥선단이 사라져 맨손으로 수백척 일본 수군을 맞아야 하니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요, 지난 5년여 이순신 수군의 철벽방어로 막아냈던 일본군의 물자보급 생명선인 서해 북상 해로(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양과 평양에 군사와 물자를 공급하는 필수 해로)를 막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비상이며, 밀려오는 일본 수군을 막을 준비를 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으니 응급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의 위기 상황속에서도 침착하고 단호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니 힘써 살펴 볼 일이다. 이제, 7월 16일 원균의 칠천량 참패로부터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대첩까지 정확히 두달간의 이순신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597년 정유년 7월 18일 새벽, 초계(합천)에 있는 권율 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노량으로부터 달려 온 이덕필과 변홍달(이순신의 외가쪽 사람)로부터 이틀 전 16일 새벽의 칠천량 참패와 옛 전우 통제사 원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전사 비보를 듣고 통곡한다. 곧이어 도원수가 찾아와 대책을 구했으나 정확한 상황을 몸소 확인하지 못한 이순신이 자기가 직접 해안가를 답사하여 상황을 확인한 뒤 대책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하자 도원수 권율이 쾌히 동의했다. 이순신은 그날 오후 지체없이 9명의 수행 군관을 거느리고 길을 따난다. 여기서의 이순신의 교훈은, 5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목숨 걸고 남해를 굳건히 지켰건만 선조 임금은 자기를 파면하고 고문까지 한 후 백의종군이라는 불명예 처벌을 내려 원망스러울 수 있었으나 지체없이 어려운 과제를 자원하여 맡아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한 점. 즉 <본질 추구의 정신>과 <신속 위기 관리의 자세>이다. 그리고 오직 나라만을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이순신을 신령님도 가련하게 여겨 돌보는 탓인지 난중일기 곳곳에 신의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이야기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8월 2일의 일기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기록하였는데 신통하게도 다음날 8월 3일 진주 정개산 손경례의 집에서 선전관 양호로부터 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는다. 이날 오후 이순신은 길을 떠나 두치에서 섬진강을 건너 석주관을 거쳐 구례에 도착했는데 한나절 후 남원성 공격에 나선 일본 수군 주력부대인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도라와 고시니 유키나가 부대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북상하였으니 한나절 차이로 길이 어긋나 마치 이순신이 하늘의 도움을 받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8월 9일의 일기에는 낙안 읍성 도착 장면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이 5리밖까지 나와 환영한다’하였고 오후에는 낙안을 떠나 10리쯤 왔는데 ‘늙은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비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한다.’고 촌민들의 감동적인 이순신 복귀 환영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백성들이 하늘처럼 믿는 통제사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어사 박천봉으로부터 선조의 수군 포기 권고를 받는다. 요지는 싸움배 판옥선이 다 없어진 마당에 수군유지가 불가능하니 해전을 포기하고 초계 권율 수하로 돌아가 육전에 참여 하라는 지시였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싸워 볼 희망이 있다는 단호한 결의로 오히려 임금을 위로 설득한다. 명량으로 덮쳐오는 200여 척의 적군 앞에 겨우 열두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아직도’ 열두척이나 남아 있으니- 라고 극단적 긍정의 표현을 쓴데서 포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본질을 추구하는 초인적 <이순신 긍정의 사고 방식>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8월 18일, 초계 원수부를 떠난지 꼭 한달 만에 고흥반도의 회령포에 도착해 바다를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다를 지킬 수군대장이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한달만에야 겨우 바닷가에 도달했다면 그동안의 그의 행적이 궁금해 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대형 목선인 판옥선 한 척에 필요한 인원은 노를 젓는 격군 80명, 활을 쏘는 사부와 화포를 발사하는 화포장 등 약 50명을 합하여 130여 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물자로는 무기인 활과 화살, 화포와 화약과 군사를 먹이고 입힐 식량과 의복의 조달이 필수였다. 당시 해안 지역의 상황은 청천벽력같은 조선 수군의 완패 소식에 해안 백성들이 서둘러 내륙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무인지경이 되어 이순신이 구하는 수군 재건을 위한 인원 및 물자 수집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은 부득이 인가가 있는 내륙을 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하동, 화개, 구례, 곡성, 옥과, 낙안, 보성, 장흥, 군영구미 등 내륙을 순방하고 회령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19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그가 끌고 온 10척의 판옥선을 인수받는다. 배설은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되어 원균 지휘의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원래 겁쟁이인데다가 적세가 어마어마하고 원균의 전술이 미덥지 못하여 자기 수하 10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여 한산도 통제영에 들려 쌓여 있던 군량과 물자를 불태워 창야전을 시행하고 서진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드라마 같은 생생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설은 비록 절체절명의 전투 현장을 이탈하여 사형을 당할 군법을 어겼으나 한산도 청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고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중 10척을 제공하여 나라를 구하는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짖궂은 데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배설은 판옥선 인수인계 현장에도 병을 핑계대며 나타나지 않아 스스로 명을 재촉하였으니 타고난 운명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나 할까? 그 후 배설은 고향 선산에 숨어 살다가 종전 다음 해인 1599년 3월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 당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순신보다 3개월을 더 살았으니 끝내 아이러니의 주역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8월 20일 이진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다음날 21일부터 23일까지 이곳에서 지병인 속병이 도져 토사곽란으로 인사불성에 이른다. 23일에는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고 28일에는 장도로 옮겼다가 다음날 29일에는 진도 벽파진으로 다시 옮긴다. 그리고 달을 바꿔 9월 2일에는 배설이 끝내 도주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고 한탄한다. (계속)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2017-11-06

만화책 이순신 모금 성공리에 마감 “한마음으로 뭉쳐준 한인들에 감사”

“고맙다, 시카고 중앙일보” 한달만에 2만5천불 모금 만화책 이순신 작가 온리 콤판 “후원금이 끊겨 중단 위기에 놓였던 만화 이순신을 다시 그릴 수 있게됐습니다. 시카고 중앙일보의 위력에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만화 시리즈 ‘이순신:전사와 수호자(YI SOON SHIN : Warrior and Defender)’의 저자 온리 콤판(사진)이 1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콤판은 지난 5월 13일 본사를 방문해 만화 시리즈 ‘이순신:전사와 수호자’의 12권 중 8번째 책을 작업하다 후원이 끊겼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후원액 목표는 9천600달러였으나 본지에 콤판의 도움 호소 기사가 게재된 뒤 15일만에 2만5천달러가 모금됐다. “한마음으로 뭉쳐준 한인들에 감사” 만화책 이순신 모금 성공리에 마감 작가 온리 콤판, 본지에 감사 전화 목표액 2.5배 넘어 “미국인이 그린 이순신 만화책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은혜 잊지 않고 전 세계에 영웅 이순신 장군을 알리기에 힘쓰겠습니다.” 지난달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을 펴내고 있는 시카고 출신 만화가인 온리 콤판(Onrie Kompan·32)이 한인사회에 재정 지원을 호소<본보 미주판 5월 14일 2면 보도>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주제로 한 만화책 작업을 시작한 지 6년째가 된 그는 만화 시리즈 ‘이순신:전사와 수호자(사진·YI SOON SHIN : Warrior and Defender)’ 12권 중 8번째 책을 작업하다 후원이 모두 끊겨 소설 펀딩 사이트를 개설하고 제작비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된 지난 1일 목표액이었던 9천 600달러를 훌쩍 넘은 기금 2만5천 달러가 모였다. 콤판은 1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한인을 비롯한 한국 팬들의 지원에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지난 달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모금 운동에서 좋은 결과로 다시 인사드릴 수 있어 기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특히 한인 그리고 한국 팬들의 지원이 적극적이었다. 한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이순신 장군을 그릴 수 있게 된 만큼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만화를 만들어 전 세계에 이순신 장군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기사를 보고 연락오신 분들도 많았고 특히 10곳이 넘는 출판사에서 출판 제의를 받았다. 현재는 1곳과 이순신 시리즈 완간과 지난해 연기됐던 한국어판 출판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이순신 만화책이 북미 지역에서 4만부가 넘게 팔렸고 올해 안으로 5만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일본 수군 130여척을 격퇴한 명량 해전의 내용이 담긴 8번째 책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감동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kim.minhee@koreadaily.com

2015-06-17

만화책 ‘이순신’ 연재 중단 위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감명을 받고 그의 일생을 주제로 한 만화책 작업을 시작한 지 벌써 6년이 된 지금, 후원이 모두 끊겨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한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을 펴내고 있는 시카고 출신 만화가인 온리 콤판(Onrie Kompan·32·사진)이 12일 본사를 방문, 시카고 한인사회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 지난 2005년 우연히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본 후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를 읽으면서 공부했다는 콤판은 지난 2009년 ‘이순신 전사&수호자(Yi Soon Shin Warrior and Defender)’라는 12권 만화 시리즈 중 24 페이지짜리 첫 권을 출간했다. 최근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척을 격퇴한 명량 해전을 주제로 한 8번째 책을 작업하다 후원자의 개인적인 이유로 더 이상 후원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 지난해 11월 출판 예정이었던 만화책 한국어판 작업은 지난 8월 한국 출판사가 갑자기 출판을 거부하며 무기한 연기됐다. 콤판은 “최근 안 좋은 일이 연이어 생기면서 한동안 가만히 있기만 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책을 더 이상 연재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킥스타터 웹사이트(kickstarter.com)를 통해 지난 24일부터 모금운동을 시작한 콤판은 6월 1일까지 9천600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3천132달러의 기금을 모은 상태다. 콤판은 “한국의 정서, 문화 등을 잘알지 못해 이순신재단을 비롯해 영화 ‘명량’ 고문으로도 활동한 한국역사 교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큰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난 이 작업을 멈출 수 없다. 그들의 사랑과 관심에 보답하는 것은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나에겐 이순신 장군 일생을 그리는 작업이 전부이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또 내가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내가 사랑하는 일이다. 최근에는 미 전역 미국 고등학생, 대학생들로부터 만화책을 통해 이순신 장군을 알게 되고 한국에 대해 알게 됐다는 연락을 받으며 큰 보람을 느낀다.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12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보란 듯이 다시 일을 하고 싶다. 재정이 확보되면 6월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한인들이 나에게 마지막 희망이다. 나에게 12척의 힘이 되어주길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순신 만화책 후원은 킥스타터에서‘Yi Soon Shin’을 검색하면 된다. 김민희 기자 kim.minhee@koreadaily.com ▶이순신 만화책 후원하러가기

2015-05-13

[창간 35주년 특별 인터뷰] 만화책 ‘이순신’ 작가 온리 콤판

영화 ‘명량’은 소름 돋는 감동 총 12권 시리즈 중 6권째 출간 3부작 이순신 만화영화도 제작 나일스AMC서 3차 연장 상영 중 “이순신 장군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임진왜란의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책을 보면서 독자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을 펴내고 있는 시카고 출신 만화가이자 온리 프로덕션 프로듀서 온리 콤판(Onrie Kompan·32·사진)은 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알게 된 뒤 삶이 바뀌었다”며 “왜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만화책을 만드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순신 장군을 대해 알면 누구든 그의 용기에 감동할 것이다. 나는 그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5년 우연히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본 후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를 읽으면서 공부했다는 콤판은 지난 2009년 ‘이순신 전사&수호자(Yi Soon Shin Warrior and Defender)’라는 12권 만화 시리즈 중 24 페이지짜리 첫 권을 출간했다. 시카고 소재 콜롬비아 칼리지에서 소설 창작 학위를 받은 콤판은 자신의 첫 창작물로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컬러 만화를 제작한 것에 대해 “드라마를 보며 그의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아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2008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따라 충남 아산, 경남 진해 등을 방문했다. 드라마는 임진왜란을 중점으로 다뤘지만 나는 전쟁 영웅 뿐만 아니라 인간 이순신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그를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모든 것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출간 초기에는 각 컨벤션을 돌아다니며 책 홍보를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적 판매 부수가 3만2천부가 넘는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이 더욱 와 닿았다”고 말했다. 지난 달 15일 통영한산대첩축제를 맞아 한국을 방문한 콤판은 서울에서 영화 ‘명량’을 관람했다. 콤판은 “자막없이 영화를 봤지만 소름 돋을 정도로 감동했다”며 “사실 지난 2012년 영화 프로듀서들로부터 내 만화책을 영화 홍보 자료로 사용해도 되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흔쾌히 그렇게 하도록 했다. 영화의 성공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기쁘다. 또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를 보면서 이순신 장군을 멋지게 표현한 그들의 노력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삶 자체가 드라마”라고 표현한 그는 “전 세계에서 모인 청년들과 함께 3부작의 만화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만화책 시리즈 중 6권이 출간됐고 11월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앞으로 100만부를 돌파하는 것이 꿈이다. 어떤 이는 허황된 꿈이라고 하겠지만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꼭 성공하겠다. 한인들의 격려와 관심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달 15일 나일스 AMC(301 Golf Mill Ctr, Niles, IL 60714)에서 영어 제목 ‘The Admiral’로 개봉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은 오는 11일까지 3차 연장 상영에 돌입했다. 김민희 기자 minhee0715@joongang.co.kr

201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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