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9]DC 한인상인 미망인의 절규 “이렇게 가면 어떻게!”

#돈 없고 못 배운 죄 “아빠 이렇게 가면 어떻게, 돈 없고 못 배운 죄라면 나도 같이 가야지!” 어린 아들 손을 놓고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는 젊은 미망인의 절규는 처절했다. 음산하리만큼 축축히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파헤쳐진 땅속으로 내려가는 관(coffin)은 무심하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법전을 뒤져보아도 ‘돈 없고 못 배운’ 이란 죄목은 없었다. 1984년 초겨울, 흑인 강도의 총탄에 절명한 젊은 한인 상인의 장례식은 그 이후 내가 경찰 생활하며 참석했던 수많은 DC한인 상인들의 참담한 장례식 중 하나였다. 우리는 왜 그토록 위험한 DC 빈민가에서 귀중한 목숨을 담보로 장사했을까? 살인강도가 난무하던 시절 매상에 비해 가게 값 싸고 임대료 싼 곳이 흑인 빈민가였다. 영어 잘하고 배운 것 많으면 미국 직장 다니면 될 일이었지만 영어 서툴고 배운 것 없으면 미국인들이 다니는 직장에 다닐 수 없었고 돈이 없으면 안전한 백인동네에서 장사할 수가 없었다. 선택이란 돈 있고 배운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었다. 그냥 파묻고 싶은 이야기들... 그러나 그것들 역시 우리 역사다. 불편하시더라도 들어주시기 바란다. #찬란한 성공과 끝없는 추락 한밤의 별빛이 찬란한 이유는 별빛이 그 시간에 더 빛나서가 아니라 어둠이 더 짙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며, 모닥불의 잔재(ember) 앞을 우리가 아직 못 떠나는 이유는 그 잔재의 따스함 보다 우리 가슴이 아직 차갑기 때문이 아닐까? 7080시대 우리 이민 역사는 짧았다. 막상 이민은 왔지만 빈손으로 시작한 미국이민 생활 그러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칠흑같은 어둠을 헤쳐 나가는 시기에 수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모르면 부딪치라고 했던가. 그래서 짱돌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 듯 들이받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비극들이 있었다. #Prologue에서 “the story”로 그동안의 스토리들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론에 이르는 여행이다. 우선 이글은 주관적인 글이다. 이해하시기 바란다. 둘째, 어느 글이던 모든 진실을 모두 다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다 말해서도 안된다. 아이러니는 객관적으로 쓰는 글이라고 믿는 대다수의 글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내 생각과 내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 어떻게 객관적 일수 있는가. 그러나 적당히 하겠다. 이전의 글들이 젊은 시절의 낭만적인 체험담을 피력하였다면 앞으로의 스토리들은 토마스하디와 찰스 디킨스 요소가 물씬 나는 자서전 에세이가 될 것이다. 이 에세이는 비극으로 시작해 아마도 비극으로 끝날 것 같다. 에세이 제목이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아닌가. 그렇다면 찐한 아메리칸 스토리를 써야한다. #왜 흑인 사회는 한인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안주나? 미국 어느 대도시, 한인상공 회의소, KAGRO, 그리고 지역 한인회에서 매년 흑인 장학생들을 선출해서 장학금을 지급한다. 한인 상인들이 흑인 강도들에게 처참히 죽어 나갈 무렵 그 어느 흑인 단체에서 한인 희생자 자녀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장학금을 주었던가? 대도시들마다 그토록 수많은 한인들이 강도들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그리고 영안실로 실려갔지만 24년 경찰생활에서 그리고 그후에도 단 한번 한인 강도가 흑인 상인을 죽였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장학금은 피해자 자녀가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한인 단체들 역시 부유한 백인지역사회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전달하지 안았다. 이렇게 흑인지역사회에 관심있고 재투자하니 좀 봐달라는 제스처였다. 미국사회에서 흑인 역사가 한인보다 월등히 오래되었고 또한 비교도 안될 만큼 부유한 흑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워싱턴 포스트 안보나? 그들은 왜 지역사회에 무관심인가? 왜 그 어느 흑인 지식인들과 부유한 흑인 사업가들이 뒤늦은 후발주자였던 한인들을 감싸고 이해하며 이 땅에 정착하는 것을 돕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 섭섭함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7080 시절 우리들 사정은 척박했고 시급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전쟁터였다. # 유대인들이 떠난 자리를 채웠던 한인 상인들 1980년 군에서 제대한 나는 NOVA 대학에 입학한 후 DC 빈민가 마켓에서 일했다. 그나마 위험수당 형식으로 급료가 버지니아보다 높았고, 학생 신분을 고려해주시는 한인주인분의 근무 시간 조절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찰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DC 그 어느 동네에서나 길모퉁이에 동네 마켓이 있었다. 작게는 1000에서 크게는 5000 Sq. Ft.까지 되는 마켓들은 거의 모두 한인 소유였다. 1960년대 흑인 폭동으로 일차 백인 탈출(white flight)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의 반전시위 그리고 히피 문화로 인한 각종 문제로 유대인 상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7-11과 High 등에서 경험을 쌓은 한인들이 채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의 비지니스 know how와 탄탄한 지역사회 기반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백인으로 간주되는 유대인과 달리 흑인들 눈에 비친 한인들은 영어도 서투른 이민자에 유색인종에 그들보다 못한 소수민족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해 짧고 추운 겨울이 싫었던 이유 나의 첫 DC 직장은 North Capitol Street 선상에 있던 “Your Market”이었다. 전체 면적이 500 SQ Ft.도 안되는 비좁은 공간에서, 방탄 유리 저편에서 손님이 요구하는 물건들을 일일이 집어다 주며 방탄 유리 사이로 현찰을 주고 받는 참으로 고된 스타일 이었다. 손님이 단한발자국도 마켓 안으로 진입 불가한 가게에서 6개월정도 일했다. 어린 아이들은 늘 5전 10전이 모자랐고, 술에 취한 ‘와이노’들은 항상 개점 시간에 그리고 문 닫을 시간에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다. 손님이 가게에 못 들어오니 근무 시에 강도 걱정은 없었지만 퇴근시간에 뒷문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두리 번 거리며 주차되어있는 차에 까지 가는 그 몇 분의 시간은 불안의 극치였다. 마켓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해가 짧아진 추운 겨울날이면 두터운 자켓 입은 손님들은 모두 도둑 같아 보였고 총을 숨긴 강도 아닐까 걱정 되었다. 그 가게에는 유난히도 예쁘고 착한 흑인 여학생 하나가 자주 왔었고 큰 유리병에 들어있는 피클이나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사가곤 했었다. 불과 10년후 내가 마약계 형사신분으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녀는 양팔이 마약주사 바늘자국으로 퉁퉁 부어있는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살벌했던 마켓에서 오직 하나 예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 여학생...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잊지 못하는 주인 아줌마의 장조림 반찬 그곳의 일이 너무 고단해서 옮긴 곳이 국회의사당 근처 5번가에 있던 코너 마켓이었다. 주인 부부는 나이가 거의 50대였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외아들이 있었다. 작은 가게 뒤편으로 부엌이 있어서 삼시 세끼를 그곳에서 해결했고 영업이 끝나면 이층으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주무셨다. 그 작은 마켓과 이층 방들이 그들의 삶 전부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점심시간이면 부엌에서 따스한 밥한 그릇에 손수 만드신 장조림 반찬을 준비하시고는 “학생 점심 먹어 내가 카운터 볼게” 하셨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소기름 둥둥 터 있던 그 장조림 맛이 기억난다. 프런트 카운터 옆 벽면에는 동네 손님들의 외상 영수증들이 더덕이 붙어 있었다. 외상 영수증들 마다 이름, 별명 또는 누구누구 할머니 하는 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돈들 떼이면 어떻 하시려고요” 하고 묻자 반 대머리 주인 아저씨가 “학생, 장사 좀 손해도 보고 하는 거야” 하셨다. # “X” 자 서명하던 흑인 할머니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어느 복더위 여름날 주위 사는 흑인 할머니가 오셔서 주인을 찾았다. 흑인들이 무엇을 부탁하려 할 때면 그 모습이 우리 한인들과 아주 흡사하다. 머뭇머뭇 거리며 눈치보고 안된다고 말해도 사정사정하며 매달린다. 할머니는 큰 손자가 감옥에서 출소해서 나왔는데 아쉽지 않은 저녁상을 차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벌써 깔려 있는 외상이 있어서 주인 아저씨가 거부했다. 주인 아저씨는 나름 외상 공식이 있었다. 어느 외상이던 한달이 넘어가면 안되고 한정 액수를 초과하면 안되는 식인데, 할머니이름으로 써있는 외상 영수증이 이미 벽에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마켓에서 죽치고 있는 동안 손님들이 오고 가며 할머니에게 인사했는데, 그녀의 가족사를 아는 눈치들이었다. 마켓을 못 떠나는 할머니가 안스러웠다. 결국 주인 아저씨가 바스켓을 쥐어주며 장을 보라고 하자 월초에 소셜 체크 나오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 오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하며 fat back 과 collard green등을 담았다. 계산을 위해 외상 영수증에 사인을 하라고 펜을 내미니 “X”자만 서명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였다. #외상 영수증들을 넘겨 받고 홀로 문턱을 넘으셨던 할머니 월말이 지나고 월초도 지났는데 할머니 모습이 안보였다. 그렇게 약속 하고서는... 중순경이 되어서 나타난 할머니 손에는 소셜 체크가 아닌 마니 오더(money order)가 들려있었다. 큰 손자가 월초 할머니 앞으로 날라온 소셜 체크에 “X”자 사인하고는 어디에선가 몰래 벌써 써버린 것이었다. 어디서 돈을 만들어 오셨는지 “X” 서명한 마니 오더를 건네고는 한 뭉텅이 외상 영수증을 손에 받아 들고는 가게 문턱을 홀로 넘어 가셨다. 할머니 외상 영수증이 떠나간 빈 벽이 ‘훵’ 했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1-01-17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8]"한밤중 멈추지 않는 가슴통증, 심장마비 같았다"

#나는 천재 스스로 천재라고 한다면 ‘또라이(돌았다의 은어)’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한번은 우스개 소리로 그 말을 했다가 아내에게서 “우리 식구 중에 천재는 없거든”하는 제법 ‘쎈’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내가 좀 남 다르다는 생각은 늘 하고 살았다. 남달라야 한다는 강박감도 있었다. 한 예로 군에 있을 때 중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최고 빨리 승진했다(나이 18살에 병장 계급을 그리고 훈장도 달았다). 중대장이 OCS(Officer Candidate School 장교학교)를 추천하며 당시 8군에 있던 University of Maryland에서 학점을 따라는 조언을 귀담아 안들었던 것이 지금와서는 한탄스럽다. 나이 40이전에 20년 근무하고 장교로 은퇴한 후 연금 받으며 새 사업을 시작해 더 큰 성공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군에서 20살에 제대하고 경찰 생활을 시작해서 볼 것 못볼 것 다 경험하며 살았다. 그러나 진급은 잘해서 젊은 나이에 경감이 되었다. 그리고 뜻밖에 시작한 사업으로 피터지는 고전을 면치못하다 지금에서야 먹고 산다. 그런데 내가 천재라고 아내에게 말한 이유는 내 머리가 좋다고 자랑한 것이 아니고 나라는 사람이 내가 생각해도 좀 특이하다고 한 뜻이었다. 사실 나는 이유 없는 피부병(간지러움증) 그리고 위장병으로 오랜 세월 고생했다. 각종 전문의들을 방문할 때마다 아내는 좀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며 항상 내 정신이 불안정해서 그렇다고 했다. 고육지책으로 정신과 의사도 찾아갔다. 아무 이상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머리 좋고 불안정한 사람들 천재 아닌가? 예를 들면 ‘Beautiful Mind’ 같은 영화 속 인물들 범상치 안은 사람들, 그런 영화에서나 보는 사람들 다 천재던데... #수학을 잘하는 아내 우리 집에는 천재가 없다고 말하는 아내는 정말 수학을 잘한다. 단지 수학 이외에 별반 잘하는 것이 없다. 아쉬운 점은 수학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데 별반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그녀는 일상에서 너무 ‘맹’ 하다. ‘맹’ 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녀가 일반 상식에 취약하고 보편적 사고방식과 동떨어진 행동을 자주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잘한다. 처음 데이트 당시 이런 그녀 모습이 우습게도 그녀의 매력 포인트였다. 말하자면 마릴린 먼로(Marylin Monroe)의 그 ‘맹’한 모습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인들에게 푹 빠졌던 얼간이 남자들의 말로는 때론 비참하다. 그런 아내의 명석한 수학실력은 80년대에 아내가 경제학 할 무렵 USC대학 MBA 교수님이 아내에게 수학박사 학위를 권유할 정도였다. 수학 박사 아무에게나 권유하는 것 아니다. 그런 그녀와 매일 살아야 하는 나는 거의 매일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기 MBA 맞아?” #한밤중 찾아온 가슴통증 20년 전 부동산 시장이 미친듯이 날뛰던 시절 우리는 막차를 탔다. 로턴(Lorton)에 새로 진 큰집으로 이사하고 보니 한 가지가 걱정됐다. 근처에 위급할 때 찾아 가야할 큰 병원이 없었다. 어느 날 새벽 2시에 눈이 떠졌다. 칠흑같은 한밤중에 침대에서 일어나니 왼쪽 가슴이 답답했다. 시계를 보니 깊이 잠이 든 아내를 깨우기가 싫었다. 혼자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가서 숨 고르기를 하며 냉수를 마셔 보았지만 가슴통증과 왼쪽 어깨의 거북함이 멈추지 않았다. 경찰 생활하며 수없이 사람 죽는 모습을 보아왔던 나였기에 덥석 겁이 났다. 심장마비 같았다. 그때 아내가 반은 눈으로 내려오며 “괜찮아?” 하며 걱정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빨리 병원 가겠다며 차 열쇠를 들고 차고로 나갔다. 일촉즉발에 생사를 달리하는 사건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에 아내를 재촉했다. 단 한번도 내 마음에 들게 잽싼 행동을 안하는 아내이건만 그 새벽 만큼은 나름 그녀 발걸음이 빨랐다. #죽음의 문 앞에서 바라본 빨간 병원 사인 열쇠를 빼앗아 쥐며 “내가 운전할게 옆에서 좀 쉬어!”하며 그녀가 운전석에 않았다. “자기야, 페어팩스병원(Fairfax Hospital)으로 가자” 나의 걱정 어린 말에 “좀 조용히하고 눈감고 쉬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하는 그녀의 강경한 대꾸가 돌아왔다. DC지역에서 심장마비 환자 생존율이 가장 높은 병원이 페어팩스병원이라고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는 아내를 깨운 죄책감 그리고 가슴에 전해지는 통증으로 눈을 꾹 감고 큰 숨만 내 쉬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에 떠난 차가 얼마 달리지도 안았는데 아내가 도착 했다면서 시동을 끈다. 눈을 떠보니 어두운 주위와 텅빈 주차장이 아주 생소했다. 그 분주한 페어팩스병원 같지 안았다. 작은 단층 들만 즐비한 동네 쇼핑센터였다. 칠흑 속에 빨강 네온의 ‘병원(hospital)’ 사인이 보였다. #가축병원 앞에서의 황당함 네온사인이 ‘병원(hospital)’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그 앞에 너무나도 선명한 ‘가축(Animals)’이라는 싸인이 보였고 병원 안의 불은 다 꺼져서 캄캄했다. 아내는 영업도 안하는 가축 병원에 나를 실어 온 것이다.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그리고 뒷골이 때렸다. “아니, 자기야 내가 개냐? 고양이냐? 어떻게 가축병원으로 와?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영업도 안 하잖아?” 심장마비가 없는 사람도 심장마비가 걸릴 상황이었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는 너무나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시급한데, 가까운 병원부터 와보려고 그랬지, veterinarian(가축의사)도 의사인데…”하며 너무나 태연하게 대꾸했다. 40년 미국생활, 경영대학원졸업, 35년을 고위 연방공무원 생활한 사람 맞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고 저렇고 대꾸 하다가는 죽겠다 싶었다. 차 열쇠를 빼앗아 텅빈 쇼핑센터 주차장을 급히 빠져나와 30분후에 사람 다루는 병원에 도착했다. #이상한 병원 응급실 응급실로 급히 들어가서 간호사에게 통증을 설명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으니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병원에 도착해서 EKG등 여러 검사를 거치는 동안 약도 안 먹었는데 모든 통증이 사라졌다. 의사와 상담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훨훨 날 것처럼 기분도 좋아졌다. 의사는 아마도 소화불량 같다며 가벼운 처방전을 써주는 것이 전부였다. 난 병원에만 가면 마치 꾀병하던 사람 마냥 아프던 것이 멈춘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치룬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 좌석의 아내가 너무 조용했다. 아내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목이 아플까봐 제쳐주니 잠결에 “응~ 탱큐” 한다. 잠에 취해 있는 아내 모습이 가축병원 앞에서 내가 소리지르며 보았던 그녀 모습과 사뭇 다른 천사의 얼굴이었다. 우리 집에 천재가 없다고 장담하던 우리 와이프, 수학 잘하고 엉뚱한 내 아내는 천재인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녀는 천재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1-01-03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7

#쉬자는 아내, 끝없이 쏘다니는 나 지난 ‘버팔로의 여행’ 내용이 조금 무거웠던지 여러 독자분들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스토리로 전개해 보겠다. 부카레스트(Bucharest) 루마니아에서 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로의 강 여행은 풍부한 눈요기와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했다. 그러나 시각과 미각만 충족시켜주는 여행이 좋은 여행일까? 그러한 여행은 널려있다. 무지막지한 배 선상에 몸을 맡기고 떠나는 바다 여행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과 풍요로운 먹거리를 선사한다. 우리 부부는 서로간 여행의 선호도가 다르고 만족도 역시 온도 차이가 다르다. 아내는 편안한 여행(항상 “좀 쉬자”)을 선호하는 반면 나는 그 무엇인가를 계속 탐구하는 스타일이다. 리버크루즈가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의 취향을 잘 맞 추어주는 여행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7번이나 리버 크루즈를 동행했을리가 없다. 배는 승객들이 잠든 사이에 또다른 도시로 떠난다. 대부분의 낮 시간은 준비된 스케줄에 따라 가이드 관광을 한다. 이런 스케줄 이외에도 바다 여행과 달리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시간에도 나는 강 부두에 정착되어 있는 배를 떠나 끝없이 쏘다닌다. 때로는 아내도 동행하지만 주로 “좀 쉬자” 하면서 홀로 배에 남아 강가 도심을 바라보며 와인을 음미하며 여유로움을 즐긴다. 그렇다 나에게 부재인 것은 아내의 여유로움이다. #모든 남자들을 로맨티스트로 만드는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 내가 선호하는 유럽 여행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홀리데이 시즌의 유럽의 강 여행이다. 하늘에서 흰 눈이 날리면 아내 손을 잡고 분주한 포장마차 앞에서 독일 소시지(Bratwurst)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구루 와인(Gluhwein)을 즐기며 지역 수제품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목각으로 만든 수제품들, 앙증맞은 뻐꾸기 시계, 손 뜨개질한 장갑들을 둘러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구루 와인을 들이키면 목석같은 남자분들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 눈에 사랑하는 이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여행 그런 것이 여행의 진수다. 아름다운 여행지(venues)는 세상에 널려있고 다 찾아 다닐 수도 없다. 어디를 가나 그곳에 서있는 내 여인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이 내 여행의 목적이다. #비운의 동유럽 유서 깊은 루마니아(‘로마의 땅’ 이란 뜻)와 불가리아(불가사람들의 땅)을 이곳저곳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 같은 길을 걸었겠지 생각했다. ‘동유럽의 파리’ 라 불리는 부카레스트는 제국열강들의 시기에 세워진 아르누보(Art Nouveau)와 신고전주의(neoclassic) 스타일 대리석 건물들의 아름다움이 소비에트 시절 공산독재 영향을 받은 브루탈리즘(Brutalism)의 우악스러운 콘크리트 건물들과 불협화음이 작렬하는 도시다. 그 브루탈리즘의 종말은 1989년 독재자와 그의 부인 차우 세스코(Ceausescu)의 총살형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동유럽을 여행하신 분들은 서유럽과 대조되는 큰 문화와 경제 차이를 피부로 실감한다. 우리는 배에 입선하기 전 이틀간 호텔에서 머물며 이 도시를 관광하기로 했다. #5성급 호텔에서 마주친 호객행위 아내와 수많은 세계 도시를 여행하면서도 고급 호텔 내에서 호객행위에 직면한 경우는 딱 두차례였다. 한번은 리오(Rio de Janeiro)에서였다. 그 유명한 Copacabana Palace에서 두 젊은 브라질 여인들이 내 아내 앞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나에게 호객행위를 해서 둘이 도망쳤던 기억이 하나 그리고 부카레스트 Blu Hotel 로비에서 경험한 것이 두번째다. 저녁식사 후 호털로비에서 싱글 몰트 스카치 한잔을 즐기고있는데, 현대 예술적 미의 끝을 보여주는 로비 바에 긴 다리에 짧은 검정 드레스를 입은 미모의 여인이 나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었다. 설마... 나이는 먹었지만 나도 남자다. 노골적인 젊은 여인의 눈빛을 못 알아 차릴 만큼의 숙맥은 아니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응시했다. 옆에 와서 한잔 사라는 것이었다. 제프 오버 하지마.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아내가 나를 떠보려고 쳐놓은 덫 아닐까? 이러다 해외에서 걸리면 끝이야. 제프 조심해! 웃기지 마. 저 여자 지금 턱시도 입은 멋진 남친과 같이 오페라 가려고 대기중 이거든. 꿈도 야무져! 괜히 제임스본드 같은 젊은 아이에게 한대 얻어 떠지지 말고! 이러한 별 쓰잘데없는 망상이 머리 위를 halo(무리) 마냥 붕 떠돌았다. # 모차르트 21번 2악장 그런데 혹시 당신은 그런 허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기억이 있는가? 그 미모의 여인(루마니아 여성 특유의 긴 검은 머리에 우유빛 피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마치 모델이 cat walk 하듯 내 맞은편 가죽 소파에 안착했다. 손에 든 빈 와인 잔이 의미 심상했다. 윤향기의 ‘나는 어떻 하라고’ 가 떠올랐다. 멕켈란 독주가 단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검은 나비 넥타이를 한 친구가 그녀에게 오더니 그녀가 건넨 작은 쪽지를 받아서는 나에게로 건넸다. 오메가 ‘시 메스터’를 착용한 그가 내 술잔 옆으로 명암을 밀어주었다. 그 007을 닮은 친구는 영화 배우 같이 나타났다 영화 배우 같이 사라졌다. 또다시 둘만 마주한 공간. 현실을 대변하듯 호텔 로비 코너에서는 흰머리 노신사가 피아노를 잔잔히 연주했다. 그 피아니스트는 알고 있었을까 이 애잔한 소나타는 영화 ‘엘비라 마디간’ 에서 이룰 수 없는 불륜을 말했음을... 쪽지 인줄 알았던 것은 명함이었다. #Room 몸을 앞으로 내밀어 명함을 보니 어느 대학 아티스트(학생)라 쓰여있다. 그 위로 잉크 펜으로 쓴 글자가 명확히 보였다 “Room # ?”.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지막 남은 위스키 한 모금 을 쭉~욱 들이키고 일어섰다. 그녀가 내 동정을 살필 때 내 눈이 내 손가락 반지를 응시하니 그녀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먼발치에 있는 바텐더에게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빈 와인 잔을 가리키니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룸 차지로 하고 로비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가 살며시 채워진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보냈다. 왜일까, 프로다움에서 나오는 절제된 행동이 멋있어 보이는 것은. #꿈이었던가 7080시절 서울 젊은 여대생들이 호텔등지에서 외국인에게 호객행위를 했다는 기사를 주간지에서 읽으며 시대 한탄을 했던 어른들 기억이 떠올랐다. 15년 전 우리가 방문한 부카레스트는 열악한 경제 모습이 굴절된 사회상으로 나에게 보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내는 나이트 팩을 가면 쓰듯이 얼굴에 붙이고는 “어디 갔었 어?” 하며 묻는다. “응 로비에서 한잔 했어”하고 응답하니 “좀 쉬니까 살겠다, 재미 있었어?”하며 침대 위에 누워 양팔을 뻗었다. “젊은 아가씨가 나를 따라와서 혼났어” 했더니 “아이큐, 아저씨 꿈 깨세요”한다. 꿈이었던가? 나이트 팩 사이로 올라와 붕어 입술처럼 떠있는 아내의 입술.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북한대사관과 엮여있는 듯한 한식당에서 불편한 식사 다음날 아침 부카레스트 박물관을 돌았다. 그중 트래잔 로마황제의 전쟁기념비와 혁명기념비(1989)를 돌며 고대로부터 그들이 무수히 겪었던 외세의 침략과 내세의 혼란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각 출출해왔다. 아내가 “한국식당 있을까?”하며 소녀처럼 웃는다. 어렵게 찾아낸 한식당은 간판도 없는 안가 분위기 물씬 나는 가정집이었다. 시간이 그래서인지 넓은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뿐이었다. 그런데 식당 분들의 표정과 발음이 수상했다. 음식 주문을 하는데 본질에서 떨어진 질문들을 하더니 미국에서 여행왔다고 하니 무슨 직장에서 근무하냐며 적극적으로 물었다. 화장실로 가는 통로 옆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있는데 벽에 김일성 주석과 차우셰스크가 서로 부둥켜 안고 찍은 옛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루마니아에 와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마음은 불안한데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왔다. 급한 마음에 음식을 먹는데 아내가 “30번 씹어! 또 잊어 버렸지! 그러니 밤에 잠 못 자지”하며 또 잔소리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나의 속내를 말하면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어 아무 말없이 30번 씹었다. 증거를 안 남기고자 현찰로 지급하고 나오려는데 주인이 택시를 불러준다. 호텔 로비로 돌아와 현지 북한대사관 주소를 쳐보니 그 식당 근처였다. 위험한 순간을 모면한 사람처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분단 민족의 슬픔이란 이런 것인가? 먼 나라에 여행 와서 한식 한번 하는데 이런 불안감에 떨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슬픔이 밀려왔다. 다음 스토리는 서비아(Servia)에서 만난 어린 여시인이 운 사연을 말하겠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0-12-27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6]왜, 말 못했을까? 더 모진 고난도 내가 막아주겠노라고...

# 반지 없는 손가락 따스하고 짙은 커피향이 떠오르다 차디찬 병원 실내온도에 짓눌려 내려앉았다. 내 손에 있는 반지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었다. 그동안의 의사 공부 그리고 이어진 고된 직장생활에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났나 하는 허무한 생각이 잠시 머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나는 그녀의 여동생 안부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안면에 미소를 지으며 “She is doing fine, you know Jeff, she had a crush on you!(잘 있지, 제프 너 알지, 내 여동생이 너 좋아했다는 거)” 나는 멋쩍어 웃었고 그녀는 내 그런 모습에 미소 지었지만 그때 그 미소는 슬펐다. 그녀가 내 여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 여동생과 연락도 없이 산다고 말하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어머니는 미국에 들어 오셨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온 식구가 다시 미국에 모였으니 열심히 잘 살 거라며 응원해주었다. #경찰관과 여의사 내가 경찰관으로 근무한다고 하며 허리에 차고 있는 총을 슬쩍 보여주니 눈을 크게 뜨면서 요즘 응급실이 총상 입은 환자들로 넘쳐난다며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당시 DC는 ‘마약과의 전쟁’으로 매년 500여 명이 총에 맞아 길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학업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잘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가족들 부양하려 정신이 없던 시절이라 포기했다는 말을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의 병이 심각하니 준비를 잘 해야하고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이 있는 이 병원에서 잘 싸워보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심적으로 그녀가 부담스러울 것이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좋은 의사를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녀 아버님의 과묵했던 표정, 그녀 어머니가 준비해주었던 따스한 음식을 둘러 앉아 손으로 먹던 기억들이 주마등 마냥 눈앞에 흘러 같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 앞 워싱턴 서클을 돌았다. 그런데 왠 일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서클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몇 번이나 돌고 있었다. #잔디밭에 누운 재스민 아버님의 암 투병은 3년에 걸친 서사시 와도 같은 치혈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병에 장사 없다고 강하시던 아버님은 한여름 마른 장작 마냥 비참할 정도로 몸이 빠지신 다음 내 품 안에서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고 몇 년이 지난 1995년 나는 경찰국에서 경감으로 진급하여 모토 사이클 부대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행사도 사고도 많아서 경찰국 오토바이 부대가 늘 바빴다. 그런 바쁜 일정 중에도 잠시 숨돌릴 여유가 생기면 근무시간에 나는 홀로 경찰 모토 사이클을 몰고 헤인스 포인트(Haines Point)로 갔다. DC에서 탁 트인 물가는 그곳이 유일했다. 어느 봄날 조용히 모터 사이클을 타고 지나가는데 강가 공원 잔디밭에 누워서 포토맥 강물을 바라 보는 그녀의 모습이 잡혔다. 재스민 옆에는 작은 피크닉 바스켓과 와인병이 있고 한 건장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증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벗꽃잎들이 볼티모어에서 그녀와 둘이서 맞았던 빗줄기 마냥 봄바람에 하늘을 뒤덮고 바퀴 아래로 낙하했다. “재스민” 그 이름을 홀로 입안에서 불렀다. 그녀가 잔디밭에 누어있는 자태가 한 폭의 프랑스 페인팅 같았다. 그러나 Lara을 향한 Dr. Zhivago의 부름이 차마 입 밖으로 못 나왔듯 재스민의 이름도 내 입안에서 공허이 맴돌았다. 당시 ‘Awakening’ 동상이 있던 모퉁이를 돌아 공원을 나오며 잠시 나마 그녀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본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순간, 오른손으로 모토 사이클 가스를 끝까지 돌렸다. 백 파이프는 차마 다 연소되지 못한 시커먼 연기를 구토하듯 배출했다. 앞 바퀴가 크게 흔들렸다. 턱 밑에 붙어있던 헬멧 보호 줄을 풀고 마음껏 강바람에 취해보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취했던 그 달콤한 나날들이 점점 뒤편으로 멀어져 감이 가슴아팠기에 나는 모토 사이클을 타고 이곳 저곳 헤맸다. 그 사쿠라 꽃잎 휘날리던 날이 내가 마지막 본 재스민의 모습이었다. #‘Unforgiven’ 왜 말 못했을까? 아버지의 빗자루 구타가 있고 난 후 그보다 더 큰 아픔, 더 모진 고난도 내가 막아주겠 노라고... 왜 말 못했을까? 잘난 척하며 용기 있는 척 하며 살아왔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는 삶이었다. 내게 그때 그 순간이 또 다시 찾아 온다면... 이제는 용기 내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다 성장한 내 딸아이들에게 인종과 문화에 관계 없이 너희들이 선택한 배우자 그 누구라도 행복하게만 살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재스민이 내게 남기고 간 그 소중한 웃음들과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들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에게 고백해 말하고 싶다. 용기가 없었노라고. 얼마전 크린트 이스트웃드가 감독 주연한 ‘Unforgiven’ 을 다시 보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청부 살인 업자로 전락한 남자는 두 어린 자식들마저 버리고 또다시 살인에 가담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기 나름 정의를 실천한다. #부활 매일 잠들며 죽는 인간은 다음날 부활한다. 그러나 새롭고 발전된 인간으로 부활하여야만 의미가 있다. 인간의 삶에 깨달음, 속죄(atonement), 그리고 구원(redemption)이 없다면 무슨 의미일까 싶다. 나는 종교가 없으나 예수의 위대함이란 우리에게 부활(resurrection)의 기적을 알려주었다는데 있다. 내가 이해하는 부활이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매일 잠들며 죽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시 부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똑같은 인간으로 부할하는 것이 무슨 의미 있겠는가? 매일 새로운 삶, 발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놀라운 기적을 우리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아버님은 처음 본 그녀가 무엇이 그리도 미워서 빗자루를 휘둘렀을까? 그녀에 대한 편견 그리고 자식에 대한 편파적 사랑 탓이었다. Unforgivable(용서 못할) 사람은 없고 그런 상황만 존재한다. 그녀에게 ‘나, 제프’ 이제 괜찮은 놈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때 그 상황을 용서받고 싶다. #Epilogue 그녀와 만났던 1980년에서 정확히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알링턴에 소재한 유서 깊은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집 바로 옆이 알링턴 역사 박물관이고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기에 나도 이사로 가입했다. 박물관에서는 매년 워싱턴 칸트리 클럽(Washington CC)에서 후원금 마련 볼룸댄스 파티가 있고 두터운 주머니를 풀어 주어야하는 자리였다. 한 젊은 인디언 청년이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마음 훈훈한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지인이 알링턴 역사책이라면서 한권을 내게 선물했다. 와인 잔이 오고 가는 사이에 무료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는데... #이민자들의 역사 그리고… Serendipity 내 눈이 의심 되는 사진이 책에 있었다. 재스민 식구 모두가 큰 픽업 트럭에 올라타서 찍은 한장의 사진이 알링턴의 ‘역사책’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정겨운 식구들의 모습이 빗 바랜 사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사셨던 아버님이 떠올랐고, 동창 과의 주먹다짐이 있었던 Mr. Smith식당, 친구 찾아 달려갔던 Buffalo 여행길이 떠올랐다. 빗속을 둘이서 뛰었던 볼티모어에서의 추억, 병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 돌고 돌았던 워싱턴 서클, 벚꽃 날리던 포토맥강 길, 그리고 병실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 모든 추억들이 마치 사진첩 돌리듯 한장 한장 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와인에 취기가 오른 나를 와이프가 테스라에 실어주었다. 차는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듯 소리없이 고엽들이 휘날리는 길을 달리고 그 위로 밤비가 내렸다. 차 창문을 살짝 여니 어느덧 늦가을이었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0-12-06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5

#아버님, 사랑의 매였나요? 분노의 매였나요? 버팔로에서 돌아온 후 우리 식구는 합심하여 알링턴에 있는 단독주택을 렌트해서 이사했다. 좁은 1룸 아파트에서 코로니얼 스타일(colonial Style) 집으로 이사하니 재스민을 초대해도 덜 쪽팔릴 것 같았다. 큰 오산이었다. 겉보다 내용물(content)이 더 중요 하다는 것을 알면서… 어머니가 아직 한국에 있는 우리 집 속사정을 아는 재스민은 그렇게도 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 그녀가 막상 우리 집 앞에 서자 돌아서서는 옷과 화장을 점검하며 숨을 골랐다. 나 역시 긴장되었다. 그녀에게 말은 안했지만 인도 여자 재스민은 우리 아버지에게는 아들로서 여자친구를 처음 소개시킨 인물이었다. 정문 손잡이를 돌릴 때 그녀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버지는 빗자루로 현관을 쓰시고 계셨다. 내가 어색한 표정과 제스처를 지며 용기내어 “아버지... 제 여자 친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목구멍에서 겨우 나왔다. #빗자루 그녀가 동양식으로 고개를 꾸뻑 숙이며 “Hello sir, My name is Jasmin, so nice to see you, can I help you something?(안녕하세요, 재스민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 와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 그 적막이 정전 때와 같은 불편함, 그리고 아버지의 쪽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가 공포로 엄습했다. 그리고 이어진 도저히 예상치 못했던 돌출사건은 오늘까지도 내 가슴의 큰 상처로 살아 숨쉰다. 갑자기 아버지가 손에 들고 계시던 빗자루를 들어 올려서는 내 머리를 치기 시작했다. “미국에 데리고 왔더니, 이놈이 어디서 깜둥이년을 대리고 와” 나는 손으로 방어하면서 빗자루로 얻어 맞는 고통보다 재스민 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에 당황했다. 재스민 눈이 커지고, 어찌할 바 몰라 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빗자루가 단정한 그녀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 그냥 죽고 싶도록 싫은 순간이었다. 나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서 아버지의 손에든 빗자루를 뺏으려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분노에 싸여있어 검어진 그분의 손에서 빗자루를 놓지않았다. 나는 재스민의 손목을 거머쥐고 밖으로 탈출했다. #“내 살을 탈색, 나 한국여자 될게” 그날 그때 그녀는 아무 잘못없이 한국 남친 아버지에게서 빗자루 세례를 맞고 울고 또 울었다. 항상 맑은 재스민의 눈동자에서 둑이 무너지듯 눈물이 넘쳐 흘렀다. “제프, 내 살을 탈색(breach), 태우면(burn) 되잖아! 나 한국여자 될게” 눈물과 콧물이 범벅인 그녀 얼굴은 처절했다. 복받치는 감정에 그녀의 어깨가 좌우로 비틀댔다. 그러는 그녀 몸을 강하게 부둥켜 안고 같이 울었다. 구타로 받은 몸 상처와 감출 수 없는 수치심,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오고 또 오고 끊임없이 파도 쳤다. 너무 화가 나서 며칠을 집에 안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한 여자친구 집에 얼굴을 들고 다시는 찾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와 헤어지지도 못했다. 인간이란 너무 정이 들면 트라우마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공황상태에 빠져 좀비처럼 생활함을 체험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녀와의 만남 횟수가 줄었다. 그러면서 가끔 길에서 보이는 흑백 커플을 보며 그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한국 친구들에게 그리고 더더욱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그녀를 내 혼자 힘으로 버티어 줄 용기와 힘이 없는 내가 정말 싫었다. 아버지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한 말로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런 아버지가 왜 다른 미국 아버지들처럼 ‘쿨’ 하지 못한지.. 아니 그냥 ‘정상’ 일수 없는지 속상했다. 그녀와 나는 ‘이별’ 이란 말없이 그렇게 헤어졌고, 그렇게 우리들의 만남은 종지부를 찍는듯 보였다. # 아버지... 세월이 흘러 10여 년이 흐른 뒤 나는 스프링필드에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한 가족을 책임진 가장으로 변신해 있었다. 아버지는 지하실 방을 쓰시고 계셨는데, 아침 일찍 기상하셔서 출근하여야 하실 분이 그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걱정돼서 방문을 여니 방바닥에 주저 않으셔서 바닥에 있는 피를 훔치고 계셨다. “아버지 왜 그래” 하며 표정을 살피니 얼굴이 창백하셨다. 밤새 목에서 피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급히 휴가를 얻어 아버지를 모시고 조지 워싱턴대학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온갖 조사가 지루하리만큼 오랜시간 지속됐다. 여러 전문의들이 오가고 저녁이 돼서야 의사 분이 ‘백혈병(leukemia)’ 같다고 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백혈병은 아이들이 걸리는 병 아니냐고 물었더니 의사 분은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고 내일 아침에 피 전문(oncology) 의사가 오면 자세히 물어보라 알려주며 병실을 위층으로 옮긴다고 말했다. 뜬눈으로 병실에서 지새우며 다음날 아침 전문의가 들어와서 백혈병이 아니라고 말하기를 손 모아 기원했다. 병상에 누워 계신 그분에게 혼자 말하듯 말했다. “아버지, 걱정 말아요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오시면 좋은 말씀하실 거예요” #고개 돌린 아버지 아침햇살이 얄궂을 만큼 아름답게 병실로 스며들어왔지만 고대하며 기다리던 의사 선생님은 아침이 다 가도록 병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점심 후 간호사를 대동한 흰 가운의 의사 선생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재스민이었다. 그때까지 방문이 열리기 만을 바라며 그쪽을 응시하고 계셨던 아버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고 고개를 돌리시며 창 밖을 쳐다보았다. 인생사 얄궂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빗자루에 얻어 맞았던 처녀가 의사로 돌아오다니 그것도 아버님에게... 그녀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재스민 답게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잃지 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불러준 내 이름 “Hi, Jeff”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 그 한마디에 눈가가 뜨거워 왔다. 제프안

2020-11-19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4

#토니와 신부 군대 친구 토니는 평범한 중산층 동네에 작은 풀장이 있는 단독 주택에 살고 있었다. 녀석은 불과 일년만에 몸이 엄청 불어있었다. 나보다 작은 키에 살이 붙어서 팽귄처럼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의 가족들과 인사하고 나서 뒷마당에 앉아 근황을 주고 받으며 ‘Pabst Blue Ribbon’ 맥주를 들이키는데, 그의 여자친구가 왔다. 결혼을 하루 앞둔 젊은 여인은 얼굴에 들뜬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얼굴이 손 딱지 만한 그녀 역시 몸은 extra large 헤비급 선수였다. 맘속으로 파스타 좀 줄이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둘러 보니 나와 재스민을 빼고는 모두 X-large 사이즈였다. 그들의 사랑이 풍만 하기를 기원했다. #비수 같이 꽂힌 토니의 말 토니 여동생의 비키니를 빌려 입은 재스민이 풀장을 향해 맨발로 잔디밭을 걷는 뒷모습이 보였다. 세상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 숨이 막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물을 만난 돌고래 마냥 풀장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서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그녀의 두 검은 눈이 나를 찾았다. 그녀의 청순한 눈길에 웃음을 보냈더니 재스민이 오른팔을 높이 들어 답변해 주었다. 그녀의 구릿빛 살결이 찰랑거리는 물결 위로 부서지는 여름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토니가 목 마른 듯 캔 맥주를 꿀꺽 들이키며 물었다 “너 정말 운 좋은 놈이야, 언제 그녀와 결혼 할거냐? (you are a lucky guy, when are you going to marry her?)” 그 말이 비수와 같았다. 결혼은 고사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아버지에게 소개할 용기도 없는 내가 정말 ‘못난 놈’ 정도로 여겨졌다. 대답 대신 답답함을 못이겨 아이스 박스에서 맥주하나 꺼내 들이켰다. #화려한 천주교 결혼식 영화 ‘Deer Hunter’를 연상시키는 결혼식 파티가 이어지고, 나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체크를 그의 결혼 축의금으로 선사했다. 그의 식구와 친구들은 이탈리안 음식과 술에 취해 새벽이 되도록 먹고 마시고 끝내 모두 나가떨어져 버렸다.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함에서 얻을 수 있는 평화와 행복은 그 결혼식에 충만했다. 우리는 가야할 길이 멀기에 조용히 그의 집에서 빠져나와 크리스피크림 커피숍에서 뜨거운 커피로 해장을 대신하며 버팔로에 ‘아듀’를 고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그녀가 지도책을 더이상 안 보아도 된다며 내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며 두 큰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 ‘카바티나(Cavatina)’ 기타 음율이 애잔하게 흘러나와 차안에 맴돌았다. 빠르게 질주하는 내 차가 비상하여 비행기처럼 훨훨날아 그 누구 눈치 안보고 어디라도 날아가서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곳이라면 가서 살고 싶었다. #할리데이 여행, 집으로 귀환 재스민을 그녀의 집에 내려주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드라이브 웨이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부모의 사랑이 어머니의 기다림과 얼굴에 절실히 묻어나왔다. 그녀의 짐을 내려놓고는 인사를 꾸벅하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제스민의 모습이 백 미러에 잡혔다. 그녀는 마치 내게 돌아오라는 듯이 계속 그자리에 서있었다. 우리 집에 오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대로 가부장적이셨고 형은 매일 리커 스토어(liquor store)에서 싸우기 바빴다. 여동생은 고등학생이면서도 세 남자 밥 해주느라 짜증스러워 했다. #You know, timing is everything 그러던 어느 날 재스민을 찾아 존스홉킨스대학에 같다. 기가 막히도록 고풍스럽고 예술적인 대학 도서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그녀를 밖으로 끄집어내니 왜 볼티모어까지 먼 길을 왔냐고 물었다. 같이 점심 먹고 싶어 왔다고 하니 활짝 웃으며 팔짱을 끼며 어디든지 가자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명문대학 바로 근처에 우범지역이 있었다. 그 지역을 피해 작은 식당에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나오려는데 폭우가 솟아졌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창가에서 앉아 있는데 재스민이 조용히 무엇을 전공할 거냐고 물었다. 어릴 때 꿈이 소설가나 영화감독이었기에 그냥 “Liberal Arts(인문학)”하고 답하니 입가에 미소를 지며“can you be more specific(좀더 구체적 이어야지)” 하면서 “You know, timing is everything(알지, 때가 모든 거란 거)”하며 비바람 사나운 밖을 응시했다. 인생에서 그보다 중요한 말이 있을까? 그녀가 말한 그 ‘때’란 의미를 새겨 듣지 않았던 나는 그녀와 달리 35년이 지난 후에야 학사학위를 그리고 40년이 지나서야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때’는 모든 이에게 동일한 그러나 각기 다른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 #빗속에서 빗속을 둘이서 뛰었다. 길 위에 생긴 물 웅덩이들을 피해가며 우산 없이 뛰는 발길이 빨라질수록 우리 옷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젖어 들어갔다. 달리던 중 빨리 도서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방향을 틀어 그 우범 지역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빗속에서도 마약범들과 거지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한 팔을 휘두르며 그들의 접근을 막고 또 한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빗속을 달려 어렵게 도서관 앞에 도착하니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빗물이 흘러 내리는 그녀의 이마와 얼굴을 손으로 훔쳐 주는데, 그녀가 나를 그녀의 품에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내 빰에 흘러 내렸다. 그 순간 그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기필코 아버지에게 인사 시키겠다고 마음 먹었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0-11-17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3

#중고차(Ford Granada) 몰고 떠난 여행 우리의 D-Day는 81년, 메모리얼 휴일을 낀 금요일 아침 버팔로로 떠나며 시작되었다. 당시 벤모(venmo)나 페이 팔(PayPal)은 고사하고 크레딧 카드도 사용안하던 시절 수중에 400달러 정도를 뒷주머니에 넣고 혹시 몰라서 여행수표(American Traveler Check) 몇 장을 속 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기고 떠났다. 떠나기 전 볼스톤(Ballston, VA)에 있던 ‘상록수’라는 24시간 영업하던 한식당에 들러 해장국을 그녀와 같이하고 Amoco주유소에서 지도(Atlas) 하나를 구입해서 대충 뉴욕시티, 보스턴, 그리고 천섬을 관광하고 캐나다로 넘어갔다. 오대호를 끼고돌아 버팔로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출발하기 전 운동화로 차 타이어를 몇번 차 보고 오일과 개스를 점검한 것이 준비의 전부였다. 재스민은 가방과 담요 하나 그리고 베개 두개를 내차에 실으며 두 팔을 번쩍 들어보이며 티없이 활짝 웃었다. 호텔 예약도 없는 보헤미안들의 여행이 시작됐다. #뉴욕타임스퀘어, 마피아 같은 자동차 견인 회사 우리는 고속도로 톨 요금을 아낀다고 Rt1을 타고 올라갔다. 도심만 지나면 Rt1도 고속도로나 진배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뉴욕시 입구에 진입하면서 길들이 넓어지고 복잡해지고 마음이 들떴다.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듯 테이프에서 구성진 니콜라 디 바리 의 ‘마음은 짚시(cuore e uno zingaro)’가 흘러나왔다. 홀란드 터널을 지나 먼저 간 곳이 타임스퀘어였다. 모텔비보다 비싼 맨해튼 주차장 주차비 아끼려고 대충 길가에 주차하고 뉴욕 스타일 콜드 컷 샌드위치를 화창한 봄 햇살 아래 공원 잔디 위에 둘이 앉아 맛있게 먹었다. 마요네즈가 깊은 맛이 있다느니 마스터스가 칼칼하느니 하며 뉴욕 샌드위치 평을 하고 있었는데 겨우내 얼었던 땅 탓인지 일어나 보니 엉덩이가 축축했다. 브로드웨이쇼를 볼 시간도 돈도 없어서 우리는 극장 밖에 붙은 포스트들만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아가타 크리스티의 ‘쥐덫(Mousetrap)’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며 급히 낯 공연 할인표를 구입해 관람했다.(나의 라이브 퍼포먼스에 대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은 예술이란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항상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관람 뒤 주차한 곳으로 돌아오니 차가 없어졌다. 당시 타임 스퀘어는 우범지역이었다. 차 도난 신고를 하니 경찰관이 불법주차해서 차가 토잉 당했다고 설명했다. 차가 도난 당하지 않아서 좋았지만 비싼 토잉비를 현찰로 지불하고 차를 찾아 나오는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닭장 같은 보호막 안에서 내 귀한 현찰을 받아가는 견인차 회사 직원에게 화를 냈는데 재스민은 자신에게도 현찰이 있으니 너무 화내지 말라고 나를 말렸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모습이 의외로 침착했고 또한 부드러웠기에 나의 급한 성격과는 대조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각각 다른 분야에서 일촉즉발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하나는 한순간 귀한 사람을 목숨을 뺐을 수도 있는 분야에 또 하나는 항상 살려야만하는 임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 풀벌레 소리나는 월던 호수(Walden Pond)에서 우리는 기우는 해를 재촉하며 보스턴으로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신문에서나 읽었던 하버드 그리고 MIT 교정을 둘러본 후 어디서 첫 밤을 차에서 지낼건 지 고민했다. 지도책에서 30분거리에 있는 Walden 호수로 직행했다. 19세기 미국 지성의 뒷심(Backbones)이 되었던 헨리 뚜로(Henry Thoreau)가 몇 년을 사색하였다는 바로 그 숲 그 호숫가에 도착해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름대로 온갖 사색적인 이야기들을 재스민과 주고 받다보니 여독이 밀려왔다. 반쯤 닫힌 내 귀에 그녀는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의 편입을 제안했다. 그때는 현실과 너무나 돌떨어진 꿈같은 이야기 같았다. (30년 후 조지워싱턴대학에 복한한 뒤 이 책을(Walden) 다시 읽으며 그 풀벌레 소리의 의미를 다시금 깨우쳤다. 우리는 살아 숨쉬는 한 끊임없이 좋은 소리들을 듣고 산다. 그러나 내 귀를 닫고 살면 아무 소용없다) 뒷좌석에 몸을 비틀고 눕자 눈이 감겨왔다. 그녀는 부드럽게 그녀의 큰 베개를 내 목뒤로 밀어주었다. 비좁은 공간에서도 삶이란 이렇게 편하고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준비없이 떠난 여행, DC 빈민촌에서 매일 전쟁하듯 살아가든 나에게 그녀의 다정한 손길 그리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숲 속에서의 하룻밤. 너무나 오랫만에 느껴보는 잔잔한 행복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천섬(Thousand Islands)과 천가지 이야기들 다음날 아침 ‘천섬’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거진 계곡들과 샴프레인 호수(Champlain Lake) 위에 부서지며 날라드는 따스한 봄바람을 유리창 손잡이를 돌려 달리는 차안으로 받아들였다. 재스민은 운전하는 나를 바라보다 미소지으며 그녀의 발가락을 차 유리창에 살살 비볐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만들어낸 증기가 마치 바다 모래밭에 남긴 발자국 마냥 유리창에 발자국을 남겼다. 이내 증발하여 사라지고 또 다시 남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녀와 나의 슬프고도 기나긴 여정을 예시라도 하는 듯... 재스민은 오른팔을 유리창 밖으로 활짝 뻗으며 달아나는 하아얀 흰구름들을 손끝으로 잡으려했다. 너무나 검어서 윤기 나는 그녀의 긴 머리가 자유를 외치며 차안을 가득 메우다 못견디며 밖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캐나다로 건너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로우랜스 강과 천섬은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었다. 아~ 세상이 이렇듯 아름답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캐나다 국경을 넘기전 미국산 담배를 사려는 캐나다 사람들 차량들이 상점 앞에 줄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캐나다 담배보다 미제 담배 맛이 더 좋고 미국 세금이 싸서 그런 모양이었다. 유토피아 같아 보이는 천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천가지 이야기들이 있겠지, 담배를 저렇게 많이들 사는 것을 보면 다들 행복 하지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상업도시 버팔로에 들어서니 도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찬란했던 영화는 사라지고, 우중충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폐허 마냥 버려져 있었다. 공중전화기에 쿼터(25전) 하나 넣고 토니에게 전화를 거니 반기며 군 동료 였던 스티브는 벌써 도착했다면서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내가 그러는 사이 재스민은 주차장에서 청바지에서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그녀 옷의 단이 풀어져서 내가 서투른 손짓으로 옷핀을 꼽아주다 그만 내 손끝이 찔려 피가 났다.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미안해했다. 모텔 비도 없어 차에서 밤을 지새우고 이쁜 옷 하나 사주지 못했던 이 동양 남자가 그 어디가 좋아서 그녀는 그 고생을 하며 따라 다녔을까? 젊음이란 그런가 보다. 고생도 모르고 좋은 사람에게 눈 멀어서 온몸을 던지는 삶. 그런 재스민 에게 과연 나는 온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2020-11-15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2

#진실된 마음 간직한 여성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잘난척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했다. 이민자이며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데, 타인종을 멸시하며 나 잘난 맛에 취해 살던 때가 있었다. 한인들의 이민 역사가 이제 제법 쌓인 지금도 우리 중심적인 생각에 고착되어 있는 점이 적지 않다. 사랑에 눈먼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성간의 사랑이 인종간의 차별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다소 불편한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내가 만난 그녀는 순금같은 진실된 마음을 간직한 여성이었다. 1980년대초, 그 인도 여성 재스민은 우연히 집 근처(Glebe Road, Arlington, VA)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서로 대학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화도중 데이트 신청을 했다. 이 여인은 매력적이며 지식과 깊은 소양도 갖춘 여성이었다. 첫 인상은 가수 장미화 같이 활발하며 거침없는 행동 그리고 큰 입으로 활짝 웃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그러면서도 ‘초원의 빛’이나 ‘이유 없는 반항’에서 보았던 나탈리 웃(Natalie Wood)과도 같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오래 알고 지냈던 고향 처녀같은 아우라가 존재했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나는 잘 보이기 위해서 없는 돈에 니만 마커스(Nieman Marcus) 백화점에서 발렌티노 넥타이를 사서 메고는 대사관들이 즐비한 매사츄시트 에뷰뉴에 있던 자키스 크럽(Jockey’s Club) 식당에서 양식 식사를 했다. #NOVA 다니던 나, 존스홉킨스 다니던 그녀 우린 서로 식구들이 있는 집을 피해 차, 공원, 극장 등에서 만났다. 그녀와 사귀면서 세상이 달라보였다. 한번은 혹시 집에 누가 들어올지 모르기에 그녀는 그녀 집 화장실에서, 나는 내 아파트 화장실에서 전화기 줄을 길게 뽑아 손에 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통화 중 그녀가 않아 있던 변기 커버가 부서진 사고도 있었다. 달려간 그녀 집에서 확인한 파손된 변기 뚜껑. 우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얼마를 웃었는지 모른다. 곧바로 헤킨저(Hechinger)로 달려가 그녀 부모들이 퇴근해 집에 오기 전 그 변기 뚜껑을 갈아치웠던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자석과 같이 그녀에게 끌렸던 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넘쳐나는 지적임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이비리그 부럽지 않은 존스홉킨스대에 재학중이었고 나는 Nova 단과대학에서 ESL을 수강할 때였다. 대학의 급으로 따진다면 말도 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성품이 하얀 파우더 마냥 고와서 군에서 갖 제대하고 다시 어렵게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나를 진심으로 도우려 노력했다. 그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다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 받아들이기도 해야함을 그때 나는 몰랐다. #가족이란 울타리 그리고 나의 한계 나는 미군 시절 여자친구 2명을 어머니에게 인사시켰다가 거부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우리집으로 데리고 오지 못했다. 그 때는 어머니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다. 홀아버지 아래 살던 우리 꼴이 비참했다. 그러나 생활 환경보다 더욱 쑥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아버님 취향과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그녀를 소개시킬 용기가 안났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아버님은 늘 우리 두 형제에게 한국인들은 ‘인종 개량’(그분의 표현) 해야한다고 가르치셨다. 세계역사상 단일 민족은 모두 망했다고 말씀 하셨다. 다민족 사회인 미국을 최상의 낙원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인종 개량’이란 것이 백인들 하고만 해야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 인정한다. 아버님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런 분에게 내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개방적이었던 인도 식구들 그러한 나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나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다. 매주말 그녀 집에서(Wheaton, MD) 열리는 하우스 디너파티에 나는 자주 참석했다. 그녀의 아버님은 변호사 그리고 어머님은 의사였다. 오빠 둘 중 첫째는 세계 최고라는 존스홉킨스 의대를 졸업했다. 둘째는 엔지니어, 그녀 여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조금 편하게 생긴 여동생이 나를 너무 좋아했다. 그 이유는 차가 없던 그 여동생을 내 똥차로 여러 번 태워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내 차에 올라타면 Steely Dan의 카세트 테이프를 틀었다. 크게 울려 퍼지던 ‘Do It Again’ 듣고 또 들었다. 학구적이었던 그녀 집안 분위기에 나란 특이한 존재가 신선한 바람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녀 부모님들 눈에는 동양인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녀의 부모님, 특히 아버님은 직업 탓인지 과묵한 성품이었다. 그래서 나와 별 대화가 없었지만, 지금 출가한 딸을 둔 나로서 돌이켜 보면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매주 찾아오는 이방인을 잘 인내 해 주셨음에 감사드린다. 그녀 어머니는 의사였음에도 요리 솜씨가 상당했다. 손도 커서 음식이 늘 푸짐했다. #손끝으로 느끼는 음식 맛 처음 그녀 집에서의 식사는 미국에서 고등교육 받고 중상류로 사는 사람들이 방바닥에 둘러 앉아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이 너무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의 거부감은 위생, 비위생의 영역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야만의 행위처럼 느껴졌다. 내 내면에도 인종과 문화 차별이 깊숙이 존재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포크와 스푼을 가져와 식사했다면 우리 사이가 지속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식사 전 손을 깨끗이 씻고 여러 번 그렇게 손으로 식사를 해보니 음식은 입으로만 맛보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손끝으로도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끼는 육질의 맛, 길고 푸석푸석하며 드라이해보이는 바스마티 쌀밥과 노란 또는 황토색의 여러 카레나 향료를 손으로 비비는 조화. 포크나 젓가락에서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다이내믹한 음식 맛임에는 확실했다. 그후 모로코, 이란 친구들과 사귀며 그들 역시 손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인도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은 음식문화임을 확인했다. #내 아버지와 만나고 싶어한 여자친구 재스민은 사교성이 좋아서 우리 형, 내 여동생과 아주 친했다. 그러나 그 친숙한 만남이란 오직 집 밖에서의 만남이었다. 그 당시 나는 캐피탈힐에 소재한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며 노바에서 저녁 강의를 듣고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자주, 길게 이어질수록 그녀가 우리 아버지와의 만남을 원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 피일 미루었다. 솔직히 용기가 안났다. 그러던 중 하나의 대안이 떠올랐다. 노바 다니는 동창들에게 먼저 그녀를 오픈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아버지에게 소개하기 전의 용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조지타운 ‘Mr. Smith’ 식당에서 노바 알렉산드리아 캠퍼스에 다니던 한인 학생 몇 명과 ‘Mr. Smith’ 식당에서 식사 약속이 잡혔다. ‘Mr. Smith’는 일층에 피아노 바 그리고 반 지하 뒤편으로는 오픈 페리오가 여성스러운 식당이었다. 내가 재스민과 같이 식당에 도착하니, 동창들의 얼굴에서 미세한 동요가 느껴졌다. 아니, 몇몇 한인 여학생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한국말만 했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한 남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참았다. 기분이 상해있던 차에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녀석(나는 그를 ‘조자룡’ 이라 불렀다. 용기와 의리의 대명사)이 재스민에 대해서 비웃는 듯한 발언을 한국어로 했다.(아니,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그 녀석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의 안경이 바닥으로 날라갔다. 순식간 아수라장이 됐다. 우리는 식당에서 쫓겨나 뿔뿔이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재스민이 끈질기게 나의 돌출 행동에 대해 따졌다. 아무 말 없이 헤어진 후 집에 오니 편지 한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따라 강남 우편주소를 보니 버팔로에 사는 군동기였던 ‘토니’가 보낸 결혼 청첩장이었다. 이태리계인 그와 나는 텍사스 근무 때 가까운 친구였다. 인도 여자친구를 동창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이런 판에 어떻게 아버님에게 소개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친구와의 싸움 후 기분전환 겸 해서 버팔로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 전화 해서 같이 가자고 하니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는 그렇게 버팔로 뉴욕까지 가는 길고도 먼 자동차 여행(Road Trip)을 하게 되는데 이 경험 때문에 나는 늘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길고도 먼 여행을 같이 떠나 보라고 조언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제프 안

2020-11-15

제프 안의 아메리칸 저니 #1

살다 보니 이길 저길 많이도 헤집고 다녔다. 군자는 대로 행이라 했거늘 큰길 뿐만 아니라 오솔길 그리고 후미진 뒷길까지 온갖 길 위에 서서 때로는 가야할 길을 잃고 미로의 세계에서 헤매기도 했다. 출발점이 제각각 다른 우리 인생 과연 종착지는 어디일까? 인생 일로가 아니었던 나의 인생길 이야기를 하겠다. # “너 미국 왜 왔니?” 이민자란 명패을 달며 미국서 산지 벌써 반세기. 영주권자에서 시민권자, 학생에서 군인과 경찰관 그리고 사업가로의 변신을 거듭하며 살았다. 총각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신분과 삶의 전반적인 모습이 변했지만 내가 왜 이 땅에 왔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적이 별로 없다. 나에게 지난 20년은 세탁업이 주업이었다. 우리 테일러(Tailor) 아낙들의 손 끝은 바늘과 가위로 인해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면, 세탁소 아저씨들의 손과 팔뚝은 불같은 스팀파이프에 입은 화상자국 투성이였다. 그러한 피와 땀은 그 누구 그 무엇을 위한 헌신 이었을까? 오또 비스마르크 (Otto Vismark)는 피와 땀 이외에는 프로션(Prussian) 제국에 바칠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고귀한 제국의 재상도 아니건만 어떻게 애국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만 했는지 본능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민자 이기에 경험했던 애잔한 이야기들, 그래서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었던 날들을 회상하며 그 인생에서 걸었던 여정을 토대삼아 보다 빛나는 미래를 기원하며 이글을 기고한다. # Silver Hill Road (Suitland High School) 고1 영어반(ESL)에서 만났던 일본 여학생은 키가 작고 깜찍했다. 그녀는 내가 얼마전 조지타운 대학원에서 만났던 또 다른 일본 유학생 이전까지는 유일한 같은반 일본 학생이었다. 그녀가 내게 물어본 첫 마디가 “너, 왜 미국 왔니? (why did you come to America?)”였다. 그 질문이 왜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일까? 그리고 대답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리 수월치 않다. 나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미국에 오게되었다. 가발 공장을 하시던 아버님은 미국 회사들과 직거래 하겠다는 목적으로 홀로 미국행을 택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여곡절 끝에 사춘기 우리 삼형제는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나는 TWA(Trans World Airline)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당시 공항에서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유행가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공항이란 그리고 해외 이민이란 떠나서 돌아 오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큰집 식구들이 그리고 상주, 김천에는 외가댁, 대전 그리고 강릉에서도 친지들이 마중 나왔다. 어린아이들 미국 떠나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기이한 현상이 그 때는 무척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만 한국에 홀로 남으시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내 인생도 바뀌게 되었다. 결국 삶이란 수많은 점들의 연결선이다. 나의 이민 결정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그후의 내 삶의 상당 부분이 그때 그 분들의 결정 때문에 내가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많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보니 “너, 미국에 왜 왔니?” 에서 “너, 아직 미국에서 왜 사니?”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 너, 미국에 왜 사니? 세상이 천지개벽되어 미국은 온갖 문제점을 안고 사는 나라로 한국은 급속하게 발전돼 선진국으로 입문한 상황에서 어느 한국 분에게서 들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여러가지 미국 특유의 문제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미국이 다문화 사회여서 소수 이민자에게 편하고 열심히 일하면 미국 꿈을 성취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그 꿈을 실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시대 미국에서 어느 정도만 기반을 잡은 사람이라면 굳이 미국에서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미국 은퇴자들은 생활 경비가 적지만 윤택한 노후생활을 즐기기 위해 멕시코, 중남미 또는 유럽으로 이주하기도 한다. 많은 젊은이들도 여행과 새로운 경험을 위해 해외 직장을 선호하는 추세다. 나 역시 코로나 사태만 거치고나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살고 싶은 생각이다. 그 이유는 모든 다른 한국 분들과 유사하다. 우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이 없고 그동안 발전한 한국의 모습에 감탄도 해보고 싶고 옛추억에 취해보고도 싶다. 그러나 한국에서 영원히 은퇴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 역시 멕시코, 유럽, 미 서부지역 그리고 뉴욕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궁극적으로 어디에 서도 살수 있다는 얘기는 일단 영어권(세계가 영어권이란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어야하고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야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다. # 첫 미국인(First American) 이란 의미 나의 고국은 한국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군 복무하고, 직장생활했으며 처자식과 살아왔다. 더더욱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시민권 선서는 미국 이외의 그 어느 국가에도 충성 불가하다는 서약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역시 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확고한 충성보다 그에 따른 혜택이 목적이었다. 우리 아버님은 격렬한 미국팬이었다. 미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조지워싱턴, 에이레햄 링컨 사진을 방에 걸어 놓고 사셨다. 지금은 사라진 First American Bank에 은행구좌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은행 이름이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영주권 신분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집안에서의 첫 미국 시민권자는 미군에 복무하고 있던 나였다. 시민권을 획득하고 나서도 수많은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을 받으며 그들과 싸운 기억이 많다. 그때마다 미국에서 출생한 미국인보다 이민자로서 시민권을 자의로 획득한 이들이 훨씬 더 애국자들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 선택의 중요성 전자는 출생으로 자동적으로 얻은 특권이라면 후자는 여러 어려움을 넘어 자의로 얻은 점이 확실히 다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타의에 의한 그러나 후자는 자의에 의한 미국 시민권자라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미국의 국부 조지워싱턴을 시작으로, 그 후 7명의 미국 대통령이 영국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1837년 마틴 벤 뷰런이 8대 대통령으로 취임해서야, 미국 태생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민자로서 시민권을 획득한 모든 분들은 워싱턴과 같이 목적 의식이 뚜렷한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국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토대로 여러 직장과 사업을 소개하며 그들의 성공담, 그리고 희비가 엇갈렸던 미국에서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문의: jahn8118@gmail.com

2020-11-05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