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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사연 칼럼] 예수와 유다 그리고 함석헌①

예수는 과연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의 의중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예수는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무력과 유혈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계획하는 과격한 유대인 민족진영으로부터 점차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킬 민족지도자, 잠재적 메시아로 열렬한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그런 면에서 친로마파인 기득권층의 유대인과 로마 식민주의 정권에서 예수를 경계하고, 그의 언행으로부터 권력 도전, 체제 전복의 위협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예수의 언행은 종교인으로서는 ‘너무 정치에 간섭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고, 반면 사회혁명가, 잠재적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종교적’인 냄새를 풍겼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유다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해 봄으로써, 예수가 과연 순수한 종교사상가였는지, 아니면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정치적 행동가였는지의 여부를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서역사가들은 유다가 로마 식민정권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유대인 독립운동단체인 열심당(Zealots)의 열광적인 회원이었거나, 최소한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열심당은 일제강점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비슷한 단체다. 한국의 광복군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심당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애 외에 로마 식민정권에 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는 독립운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役事)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민족주의에 유대교의 종교신앙이 함께 합쳐진 과격한 정치, 종교적 지하조직이 열심당이다. 유다는 과격한 행동주의자였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와는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로마 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비록 유다만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오직 갈릴리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다를 회계로 임명한 것이 시선을 끈다. 이것을 197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풀이하면, 재야 조직원 중에서 오직 유다만이 유일하게 호남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단체에서 중책을 맡은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돈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신뢰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얼렁뚱땅한 아무 사람한테나 자기들의 돈을 맡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회계직이 유다에게 금전적 욕구를 불러일으킬 유혹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전지전능한 예수는 그를 돈을 관리하는 자리에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다 자신도 돈 몇 푼 훔치는 데 관심이 있는 좀도둑 근성이 있었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전도자인 예수를 쫓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착취로부터 식민지 이스라엘의 빈곤과 사회문제에 대해 의식이 예민한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스승 예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유다가 예수의 뒤를 따라다닌 동기는 종교적 동기나 금전적 동기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적인 동기와 사회, 정치적 동기라는 것이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2017-11-07

[함사연 칼럼] 프로메테우스 함석헌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지상의 미개한 인간이 지적 성장을 계속하여 불(火)을 만들어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본 천제(天帝) 제우스는 깜짝 놀랐다. 그대로 두면 그동안 올림포스 산에서 신들만이 향유해 온 신성불가침의 특권이 침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제우스가 곧 헤파이스토스를 하계(下界)에 보내 지상의 불을 모두 꺼버리자 지상은 다시 암흑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고 올림포스산에서 등심초(燈心草)를 꺽어들고 하늘에 올라가 태양신의 불수레에서 불을 지펴 지상에 전해준다. 이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영어발음: 프러미시어스)는 ‘구원자’ 혹은 ‘구세주’의 뜻을 갖게 되었다. 바로 ‘Promise’의 어원이다. 나는 함석헌사상연구회(함사연, The National Institute of HahmSeokhon’s Philosophy)의 활동을 통해 터득한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에 바탕한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최근 극한적 위기를 맞고 있는 나의 조국 한반도를 ‘야만’에서 구제할 수 있는 프라미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야만에 조종(弔鐘)을 울리려면 우리는 고정관념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전혀 새로운 미답의 트레일을 찾아 나설 용기가 있어야 되겠다. 함석헌은 외쳤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평화의 길을 마다하고 피를 탐하는 악의 축, 이젠 19세기적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 전 인류가 손사레를 쳐야 한다. 우리의 ‘프로메테우스’ 함석헌은 철학이자 이념일뿐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는 결코 하믈렛처럼 주저하지 않았다. 하믈렛에게는 주저의 장애물이 그의 마음 심연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함석헌에게는 장애물이 항상 그 밖에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성과 이상이라는 두 감시자가 있었다. 함사연은 지난 14일 10.4 남북공동선언 10돌 기념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이 선언이 조속히 실천되어 우리의 소원 통일이 성취되길 기원했다. 한국전 정전이후 65년이 넘도록 1천만 이산가족의 애환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야만이다. 인적교류는 물론 심지어 서신교환마저 차단되어 있는 이 야만에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하겠다. 하믈렛은 끝없는 우유부단의 사슬로 묶인 과거의 포로였다. 우리 민중은 하믈렛에서 출구를 찾아 스스로 설정한 주저의 포박, 그 굴레에서 출애급 해야 한다. ‘골디우스의 매듭’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우리의 가슴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안주(安住)에의 노예, 그것이 진짜 우리를 노예화 한다. 사랑의 종교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냉담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의 작가이고 철학자인 헨리 도로우는 “이 신화(기독교의)는 기적에의 동의, 순종, 그리고 운명적 비굴로 인간을 세뇌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종교는 여호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금권을 모시고 있는 것 같다. 함석헌은 외쳤다. “과거의 야만에 종지부를 찍자!” 이선명/함사연 연구원

2017-10-18

[함사연 칼럼] 종교와 폭력

함석헌은 국가폭력과 약육강식의 가치가 휩쓸던 시대를 살았지만, 그 자신은 각 개인이나 민족 사이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종교를 발견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시한 그였기에, 그 이웃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사랑해야할 종교적 의무를 느꼈다. 그래서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다”라는 시각에 그는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늘 읽기를 좋아하던 『도덕경』도 그 핵심은 정치가에게 주는 철학가 혹은 종교인의 조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자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은 비폭력의 상징인 어린아이, 여성 그리고 물로 대표 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약함이다. 물은 낮은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만물에 생명을 보급한다. 어떤 생명도 물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노자에게 있어서 약은 곧 강이 될 수 있다. 함석헌은 이렇게 도덕경을 통해서 약으로 강을 제압하는 법, 비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방법을 습득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나, 한 시대의 고민을 상실한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무익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일지라도 함석헌에게는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 재적용되지 않고는 그저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의 종교관과 세계관도 고정관념을 깨고, 시대의 변동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해갔다. 함석헌은 비폭력원칙을 주장한 종교 사상가로서 각 종교는 서로 보완적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종교를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이 종교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었다. 이런 인간애와 더불어, 여러 종교에 대한 포용성이 서구기독교와 동양사상을 융합하게 한 근원적 원동력이었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언어와 표현으로도 해석과 설명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그 종교는 보편적 종교,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참 종교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일과 비종교적인 일,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모든 일이 종교적인 일이고, 모든 일이 비폭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종교적 신앙심과 인간애가 바로 종교와 비종교, 절대자 하느님과 상대자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타종교를 배척하고 종교적 우월주의를 주장했을 때, 그는 타종교인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 인류공동체를 염두에 둔 인종, 국가, 종교,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고 이상주의자였다. 그가 특별히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했던 것은 생기발랄한 인간의 직관과 종교적 신앙심이 현학적 혹은 고정된 교리로 화석화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주요강국의 철저한 자국이익중심주의외교, 무력외교를 지켜보면서, 폭력이 없는 세상을 실현하는 길은 함석헌 뿐 아니라 인류모두가 추구해야할 진정하고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는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2017-09-27

[함사연 칼럼] 종교와 사회

격동의 20세기를 몸으로 겪으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는 함석헌에게 단순히 종교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사회·정치적 계몽운동, 훌륭한 문화의 본보기, 민족발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조국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근본적 매개체로써 젊은 시절 기독교적 종교윤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혹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적 정치이념을 선택해야 할 것이냐 고민했을 때에도, 결국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더욱 효율성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덜 효율적인’ 기독교를 택한다. 그는 자신이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패배자가 되거나 비효율적인 길을 택하게 되더라도 비폭력의 길을 선택했다. 정치적 의미에서건 혹은 종교적 의미에서건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하나의 관점이나 주의만이 허용되고, 이 하나의 시각만을 전체가 받아들이도록 폭력적인 방법이 강요된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함석헌은 이런 면에서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의 대변자였다. 낱낱의 개성이 폭력적인 권력 횡포에 의해 탄압받지 않고 보장,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 그였기에 그는 한 종교가 폐쇄성, 독단성을 갖지 않도록 경고하기도 한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 종교로써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p.36) 이렇게 그는 기독교를 ‘선택된 사람(選民)’들만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버림받은 씨알의 종교로 보았다. 그렇기에 폭력을 앞세운 정치깡패를 서슴없이 동원한 기독교정권(자유당) 하에서, 소외된 비기독교인을 위해 그는 ‘대선언’(1953)을 발표한다. 이 ‘대선언’은 기독교 정권 아래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종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종교적 입장을 신앙 고백으로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욱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서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비폭력을 중요시한 함석헌은 ‘종교’를 절대 계의 일이 아닌 상대 계의 일로 보았다. 그래서 종교 없이 그가 절대자나 진리를 배울 수가 없었지만, 그 종교가 그의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종교라도 거기 하느님을 가두어 둘 만큼 클 수는 없다고 그는 느꼈다. 그는 인간을 철저히 유한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절대자의 이름을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그런 것이 단지 무한한 존재에 대한 유한자의 자기합리화, 정당화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유한적)기관도 하느님(무한적인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진리란 모든 사람을 위해 각 사람의 종교, 비종교 여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했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2017-09-12

[함사연 칼럼]함석헌의 ‘밤토실’과 민주주의

내가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엄마의 친정집에 가서 즐겁게 지내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신 도시로 변했지만 나의 고향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화성은 당시 시골의 정겨운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나의 기억에는 지금도 마치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세잔느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엄마의 친정은 나의 어린 시절을 소담한 자연 속의 추억으로 나의 삶을 풍부하게 수 놓아 준다. (난 정서적으로 외갓집 이라는 ‘외’를 거부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정겨운 옛 시골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엄마 친정집 뒷산에는 밤나무가 있었다. 난 이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를 맨 손으로 만지다가 찔린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던 사촌오빠가 깜짝 놀라 “밤송이엔 가시가 많으니 만지지 말라”고 야단을 치시던 기억이 난다. “어린 애가 겁도 없이 밤송이를 함부로 만지다니….” “알았다, 알았어. 아! 함부로 만지면 아프다. 조심해야지.” 그리고 난 나중에 그 날카로운 가시 속에 숨은 달콤한 밤의 맛을 알게되었다. 두 개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 즉 가시 속에 감추어진 밤송이가 하나의 진솔한 맛을 연출하는 자연의 조화, 그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어린 나는 자연 세계의 신비를 깨달았다. 그리고 숨겨진 어떤 진실을 깨닫는 순간 어린 난 엄청 행복했다. 그리고 그 달콤한 맛을 보기 위해 비록 밤송이에 찔리더라도, 아니 그 아픔도 감수하고 밤을 따러 뒷동산이 오르곤 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면서 사회문제, 정치문제, 그리고 역사의 전개 과정 등에 눈을 뜨면서부터, 지금은 거의 20여 년 넘게 사회정의와 평화운동에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나는 요즘들어 가시로 뒤덮힌 밤송이 속에 숨은 민주주의의 진실을 연상해 보면서 무언가 새로운 ‘도’를 깨닫는 쾌감을 느낀다. 요즘 들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시국이 말이 아니다. 이 때 서서히 “내 친척도 물 고문을 당해 죽을 뻔 했는데…”, “내 삼촌은 버마 폭발 사건 때 돌아 가셨는데…” 이렇게 이런저런 안타까운 이야기가 슬슬 나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밤송이보다 더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 닿는다. 결국 이들은 달콤한 민주주의 알밤의 맛을 보기 위해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까? 그리고 나만이 맛보는 그 달콤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달콤한 알밤의 맛을 보게 해 주기 위해 고추가루 고문, 물 고문, 성고문, 치옥스러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잃었지. 정말 이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셨구나! “은주야! 조심해! 찔리면 아파! 오빠가 장갑 끼고 발로 까 줄께” 하시던 내 사촌오빠에게 이젠 내가 그 말을 할 때가 왔다. “내가 먼저 찔릴께. 여러분들은 모두 그냥 기다려. 내가 그 달콤한 맛을 보게 해 줄께.” 이제 나의 밤토실은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정권교체 됐다고 이젠 그 밤토실의 달콤한 맛이 모두에게 보장되었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바른 해답은 곧 책임과 실천의 방정식 속에 숨은 밤토실이 아닐까? 바로 함석헌 선생님의 ‘밤토실’ 이라는것을!

2017-08-30

[함사연 칼럼]씨알사상과 신천옹 함석헌

씨알이란 사전적 의미는 ‘종자 또는 새끼를 잉태하고 있는 알’이다. 한 톨의 밀알과 한 알의 겨자씨는 스스로 죽어 몸통을 썩혀 생명을 싹틔운다. 따라서 씨알은 생명을 확대 재생산하고, 하나 속에 전체를 내포하고 또 전체 속의 하나로 존재한다. 함석헌 선생은 씨알을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며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에 서서 사유하고 생각하는 존재 즉 사람을 뜻하며,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라고 규정 짓고 있다. 씨알 사상은 그의 스승 다석 류영모 선생이 1956년 겨울 YMCA에서 유교 경전 대학(大學)을 강의하던 중 ‘친민(親民)’의 ‘민’자를 ‘씨알’로 풀이하는 데서 그 뜻을 깨쳐 더욱 체계화해서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씨알 사상 곧 민중사상이 태동하게 된 시기는 서구 민주주의 사상 특히 기독교의 만민 평등사상의 유입과 제국주의 침탈이 본격화된 조선 말기이다. 극도로 부패, 무능한 봉건적 계급사회에 대한 저항과 물밀 듯이 유입된 서양문명에 대응한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동학과 민족주의 사상이 급속하게 농민 민중 속으로 퍼져 드디어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학은 우리민족 고유의 전래사상인 인내천(人乃天), 홍익인간(弘益人間)사상이 근간 이념이며, 후에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등 민족종교로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홍익인간(사람에게 널리 이로움을 펼친다) 사상은 서양의 자유 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사상과도 본질이 다른 바가 없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다. 3·1 독립운동은 청년 함석헌에게는 인생의 분기점이자 혁명기였다. 평양고보를 그만두고 민족학교인 오산학교로 옮겨 남강 이승훈 선생의 민족정신과 다석 류영모 선생의 동서를 두루 섭렵한 폭넓고 깊은 학문과 사상적 세례를 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유학 시절에는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적 종교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귀국 후 동문이며 동지인 김교신과 성서조선을 발간하며 기독교의 씨알화를 통한 독립운동과 민족구원이 삶이 당면한 목표인 시기였다. 8.15 해방과 민족분단 그리고 이승만 독재 타도의 4·19혁명과 엄혹한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며 끊임없이 거듭난 씨알 사상은 이제는 동서 문명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지평에서 융합과 창조적인 인류의 보편적 가치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씨알 사상은 민족분단에 의한 체제적 갈등을 주체적으로 극복할 사상적 토대와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민족 분단 70년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내는 과업은 단순한 남과 북의 물리적 통일만이 아니고, 열강의 패권경쟁 각축장이 아닌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의 교차로를 마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 온 동서양 사상의 혁명적 융합을 이루어낼 용광로가 되어 인류사적 일대 비약을 이루어 내는 일이 될 것이며, 위기에 처한 탐욕적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교조적 사회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머지않아 급속하게 진행될 4차 산업혁명으로 시작되는 기계화, 지능화, 자동화에 따른 부의 집중과 독점화를 막고 소수의 독점자본 권력의 탄생을 차단해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 정의를 실현할 인간 중심 공동체 사회의 탄생을 담보해주는 비전과 사상은 씨알 사상이 될 것이라 믿는다.

2017-08-23

[함사연 칼럼]격동 30년과 함석헌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출애굽을 이끌었듯 함석헌은 독재 치하 참혹했던 격동 30년의 긴 암흑의 터널에서 한국 민중을 구출하기 결사적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다. 함석헌의 레지스탕스는 통치자가 임의로 설정한 주변 환경에 순응해야 하는 패배주의의 운명에서 민중들을 해방시켰다.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외침은 4·19 혁명, 5.18민주항쟁, 그리고 1997년 투표소 반란을 통해 마침내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바로 이 점에서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평화는 인류의 자유의지를 통한 윤리 행동”이라고 규정하고 “인류의 본래 모습은 하나요, 전체다. 그런데 영웅주의가 나타나 힘의 논리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 유지를 위한 제도와 기구를 만들어 이를 통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함석헌은 “인민을 억압하는 형태, 곧 국가 폭력을 권력유지 수단으로 삼는 정치이념이 국가 지상주의인데, 국가 지상주의는 몰락하고 있다” 고 예언했다. ( 12권, 한길사, 2009, 310쪽) 함석헌은 국가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생명이 아니다. 다만 생존에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국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가가 마치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므로 국가는 근본악”이라고 비판했다(앞의 책, 311쪽) 때문에 평화운동의 중심은 중앙권력의 축소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중앙권력의 축소작업은 중앙집권적 통제시스템에서 지역관리의 자치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작업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석헌의 평화 사상의 핵심은 권력유지와 자국의 이익에 충실하여 전쟁을 일삼는 국가지상주의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함석헌은 평화주의를 주장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하여 ‘평화중립주의’를 제시했다. 함석헌은 한반도에서 평화운동의 당면과제는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보았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는 통일은 ‘절대선’이다. 정권의 권위주의와 망국적 지역갈등과 경제정의 부재와 매판 경제 등 현재 우리 조국이 안고 있는 모든 제도적 문제가 분단에서 연유되었다. 따라서 통일은 절박한 민족적 과제이며 하늘의 명령이다. “어느 민족이든 역사적 현재의 명령에 복종하는 민족은 살아남는다. 우리의 역사적 현재의 명령이 무엇이냐? 다른 것이 아니라 끊어진 허리를 이어라, 둘로 갈라진 것을 하나로 만들어라”.(앞의 책, 139쪽)는 것이 함석헌의 유시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한반도의 평화운동은 ‘평화중립주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곧, 한반도의 평화운동은 평화중립사상에 의거한 평화적 통일운동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후에 평화운동의 최종 목적인 세계주의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이 그토록 초라해 보이던 간디 앞에 굴복하게 했던 안티고네의 정리(定理)처럼, “불의 응징”을 외치는 트럼프, 그리고 그가 대표하는 미국의 호전적 제국주의, 기독교의 도덕적 파산, 깨진 자본주의 거울, 그 추한 나상(裸像)의 연출이 세계인의 반전과 평화 기원에 굴복, 막을 내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editor.usnews@gmail.com 이선명 / 함사연 창립고문

2017-08-16

[함사연 칼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종교

오산학교 시절 함석헌은 칼라일의 『옷의 철학』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칼라일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형식이나 제도는 껍데기일 뿐 이라고 믿었다. 칼라일은 사물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요소인 진리와 그 겉모양과의 차이를 비유로 설명했다. 칼라일은 관공서 같은 국가기관, 교회 같은 종교기관 혹은 입학시험 같은 행정제도 등을 인간이 입고 있는 옷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옷은 상징의 표현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항상 인간이 옷을 갈아입어야 하듯이, 모든 제도나 조직은 계속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믿었다. 칼라일은 교회도 처음에는 인간의 뜨거운 신앙심을 보여 주었지만, 이제는 그 용도가 끝나서 버려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교회 제도 밑을 흐르는 그 소중한 정신은 인간이 항상 깨달아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라일에게 있어서 사물의 겉모습 뒤에 가려진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아내는 일은, 곧 삶에 가장 중요한 진리를 찾는 길이었다. 함석헌은 칼라일을 통해서 건물로서 교회나 사회제도가 곧 진리는 아니고, 단지 인간이 갈아입는 옷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문명이나 제도가 마치 잘 맞지 않는 불편한 옷과 같이 인간을 더욱 부자유스럽게 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궁극적 진리란 결국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궁극적 진리는 시공간의 벽 속에 단단히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깨는 유연하고 탄력 있는 사고와 열린 마음이 진리를 광범위한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함석헌도 그래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하나의 길을 고집하기보다는 다양한 길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힘썼던 것 같다. 일찍이 1953년 함석헌은 한국기독교인이 교회의 고정적인 교리에 수동적으로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 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 역사란 항상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자의 인간을 향한 메시지도 역사적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자유분방하게 그 시대 정신과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수준만큼만, 또 자기가 속한 시대적 한계 안에서만 타인과 절대자를 이해한다. 그래서 함석헌이 그 삶과 사상을 통해서 보여 주었듯이, 끊임없는 시대 변화에 따라 종교 교리나 사회제도도 고정불변 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고 자유롭게 재해석되고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가 극도로 보장된 곳에서라야 인간 정신은 마음껏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서 자신의 땀과 정열을 인간의 자유와 인간 정신의 극대화를 위해 쏟아부었던 씨알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였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2017-08-08

[함사연 사상연구회] 사랑과 자유

함석헌(1901-1989)이 그 전 생애를 통해서 추구한 것은 크게 두 가지 가치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길(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과 자유의 길(정치, 사회, 문화적 민주주의)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살며 추구했던 가치는 그가 사랑하던 조국에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서구 퀘이커교도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다.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가지 이념이나 사상은, 위계질서나 지배체계로 대표되는 유교, 국가폭력을 동반한 일본 제국주의, 유물론적 측면의 공산주의, 그리고 배타적, 독선적 의미의 기독교였다.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우리 의식구조와 매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함석헌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그 희망의 빛을 우리는 ‘자유’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포용성’이나 ‘다양성 존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위계적 유교에 대항해서는 초월적인 노장사상, 폭력적 제국주의의 대안으로 국익 우선주의보다는 국가 간 이타심을 강조하는 평화주의, 유물론에 대항하여서는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신론, 그리고 편파적 기독교에 대항하여서는 보편적 역사주의 혹은 종교(이념)적 다원주의를 추구했고 이러한 종합적 요소를 그의 씨알 사상에 함유하고 있다. 함석헌은 1970년 4월 19일, 4·19 혁명 10돌에, 조국의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그에게 씨알은 국가주의 의미를 함유한 국민이나 주체성보다는 객체성이 강조되는 백성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여겨지는 표현이다. 씨알에는 ‘우리’, ‘올라감’, ‘얼’ 등 공동체와 정신적 가치를 포함하는 우주 전체,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 그리고 활동하는 생명력 등의 뜻이 담겨 있다. 그가 사용한 이 씨알이라는 말은 민초, 자연인, 순수한 사람 등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노자 표현을 빌리면 “다듬지 않은 나무” 같은 사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함석헌은 격동의 한국사를 통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말 못 하는 씨알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벙어리’가 된 씨알의 입을 열고, 그들의 닫힌 영혼을 일깨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1957년 3월 『사상계』, ‘할 말이 있다’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만, 있고도 말을 아니 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사람인 담에야 속이 없으리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고 온 사람들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한국사를 맹목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침묵의 역사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각자가 가진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서 누릴 것을 역설했다. 그래서 『씨알의 소리』 발간사를 통해서 그는 한국의 언론이 사회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고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라고 강변했다. 이렇게 그는 자기 목소리를 상실한 씨알을 위해 기꺼이 씨알의 목소리가 되었다. 김성수/『함석헌 평전』 저자

2017-07-11

[함사연 칼럼]혁명을 꿈꾸는 낭만주의자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역사적, 철학적 사상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고교 2학년 때 남녀 고교생 모임인 청주독서회에서 였다. 『사상계』를 읽게 된 것이다. 거기서 놀라웠던 사실 하나는 군부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싸우는 이야기들을 읽었다는 것이다. 그 후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1976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강연에는 장준하 선생도 함께 와서 두 분의 강연을 모두 듣는 기회를 가졌다. 결국 나는 함석헌, 장준하 선생 영향으로 한신대학을 가서 목사가 되었지만, 함석헌 선생처럼 흰 두루마기를 입고 수염을 휘날리며 하얀 고무신을 신고 씨알의 사상을 알리고 전하는 저항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씨알 사상이었다. 망이, 망소이, 갈처사, 홍경래, 전봉준…. 이런 민중혁명가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밤늦게 앉아서 그 분의 이야기를 듣던 대학시절도 있었다. 선생의 집에서 였다. 나중에 학교에서 제적되어 또 다른 스승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서남동 해직교수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은 없었다. 행동하는 실천적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올 봄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당하고 감옥 가는 날, 42년 만에 한신대학 재일동포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고통당하던 세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세 사람 중에 한사람은 대학원생이었고, 나머지는 신학과 학생이었다. 간첩 조작 사건의 무죄 판결. 얼마나 극적인 사건인가. 촛불시민혁명이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무죄를 받은 것이다. 100만 촛불이 200만 촛불이 되고, 1700만 촛불이 되어 세상을 변화 시켰다. 총 한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국정농단 최순실과 박근혜 일당을 물리쳤다. 세상 살면서 이렇게 통쾌한 일이 어디 있었나. 공안검사 김기춘이 만든 간첩조작사건으로 네 명이 붙잡혀 갔는데, 김철현 이라는 당시 교포 학생은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데, 재심을 청구하지 않아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하고 고문의 후유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오직 우리나라가 살길은 혁명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간첩으로 조작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어도, 목사가 된 세 사람 김명수, 나도현, 전병생은 촛불시민혁명 덕분에 감사하다고 했다. 김기춘. 공안검사 출신, 청와대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 나쁜 사람이 씨알의 혁명 앞에 맥을 못 추고 잡혀갔다. 인과응보이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 사상은 민이요. 민중의 소리(Voice of the people)인 것이다. 억울한 민중이 소리쳐 하늘에 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주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그리고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6.10항쟁과 촛불시민혁명이다. 함석헌 선생(1901~1989)은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항운동가요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었다. 함석헌 선생이 뿌린 씨알이 촛불시민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통일을 꿈꾸는 낭만주의자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 동포 여러분 함께 통일의 길을 가자. 김창규 목사

2017-06-28

함석헌 사상연구회 6.15공동선언기념행사

지난 2000년 남북 정상이 최초로 정상회담을 가진 뒤 채택한 ‘6.15 공동선언’ 발표 17주년을 맞아 함석헌 사상연구회(함사연·회장 안은희)가 지난 24일 페어팩스에 있는 성공회 성십자가 교회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하나로 가는 6.15’를 주제로 열린 행사는 함사연 회원을 비롯 워싱턴 지역 진보 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6.15 공동선언문 낭독, 6.15 공동선언 발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관련 동영상 시청, 성공회 성요한 교회 이완홍 신부의 강연, 함석헌 선생 어록 강독, 통일의 노래 및 함사연가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완홍 신부는 ‘통일 미래를 위한 공동체 회복’을 주제로 펼친 강연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은 남북한이 평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자,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나눔으로써 실천되는 것”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나눔을 잊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현실을 벗어나, 자기 성찰을 통해 진정한 통일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은희 회장은 “과거 정권에 의해 폐쇄되었던 북한과 대화의 창이 촛불민심의 승리를 계기로 다시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행사에는 뉴욕 브롱스에 있는 베드포드 파크 장로교회(구 브롱스 한인장로교회) 유태영 목사가 참석, 1986년 함석헌 선생이 미국에 머물며 교회에서 직접 강연했던 육성 녹음 테이프와 1983년 발간된 개인 소장용 함석헌 전집 12권, 당시 사진 등을 함사연에 기증했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2017-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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