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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미국의 노예제도와 한국의 성차별금지법안의 성경적인 정당성

“…양측은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하는데 신의 도움이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남이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합시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신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쪽도 신의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이 1865년 3월 4일 연방의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재임취임식에서 연설한 취임사 가운데서 인용한 문구다. 링컨은 7문단으로 되어있는 짧은 이 연설문을 7분안에 마쳤다. 1861년 첫 취임연설문의 15분에 비하면 훨씬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두번째는 첫번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고있다. 4년간에 걸쳐 같은 형제들사이에 총칼을 겨누며 싸운 남북전쟁을 통해서 얻은 신앙고백이다. 링컨은 이 인용문구에서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북과 남측 크리스찬들이 상대방을 응징하고 자기편에게 승리를 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낸다. ‘남이(노예가)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죄를 지은 남측 크리스찬들의 기도는 더욱 그렇다고 강조하고있다.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남측 남부연합은 이 제도를 반대하는 북측 링컨대통령의 북부연방에 대해 1861년 4월 12일 새벽 사우스 케롤라이나주 찰스턴항 연방연합군 요새를 포격함으로서 선전포고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부터 4년 동안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북측과 남측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을 치렀다. 양측은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서로 달리 해석하고 읽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노예의 노동력을 통해 주업인 농업을 유지했던 남부는 노예제도의 성경적인 정당성을 우선 창세기 9장에서 찾았다. 성경을 자기편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나안의 아비인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는 죄를 지어 가나안의 사람들은 노아의 나머지 형제들의 종이 된것이라는 것. 즉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되기를 원하노라”(창9:25) 또 신약의 여러 구절 가운데 대표적으로 두 구절을 들 수 있다. 즉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주인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6:5) 등이다. 요즘 한국 기독교계는 국회에 발의되어있는 포괄적차별급지법안을 놓고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영논리의 양상으로 갈라져 큰 논란을 겪고있다. 이 법안은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성소수자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이 법안 가운데 동성애가 포함된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이 교계에 논쟁을 불러온 것이다. 이로인해 교파 교단 목회자 교인들사이에 찬반측이 현안을 놓고 성경해석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논평에 큰 제한을 받게된다. 예를 들면 동성애를 부정적 또는 반대하는 설교를 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명시한 것이다. 동성애 반대측의 성경적인 정당성과 찬성측의 것을 비교해보자. 구약과 신약 여러 곳에서 동성애를 금지하는 말씀들이 나온다. 우선 구약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자.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4)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왕상 15:12). 신약 여러 곳에서도 동성애를 금지하는 구절이 나온다. 몇개를 간추려 보자.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 1:26-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대부분의 찬성측은 사랑과 용서의 측면에서 다음 두 구절을 인용한다.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같이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0) 그리고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3:7,11). 노예제도를 성경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남부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찬성측도 동성애 행위를 성경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주시되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말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의인이고 저들은 죄인이라는 자세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자들도 분명히 상랑하시며 용서를 베푸실줄 믿는다. 그러나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적인 입장을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8-09

[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헨리 지킬박사는 늘 선하고 덕이 넘쳐 사람들로부터 근엄한 신사라는 칭찬을 받아왔다. 인간의 본성을 꾸준히 연구한 지킬 박사는 악한 본성을 발휘하는 신비한 약을 발명했다. 약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자신이 약을 마셨다. 즉시 지킬박사의 선한 외모는 추악한 괴물로 변했으며 덕이 넘치는 성격은 악을 추구하는데 희열을 느끼는 악마로 변했다. 그는 낮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학식이 많은 점잖은 신사인 지킬박사로, 밤에는 폭력, 강간, 살인 등 온갖 악행을 행하는 하이드씨로 이중인격의 삶을 살아왔다. 하이드씨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난폭해져 갔다. 하이드씨는 해독제를 복용하여 지킬박사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애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해독제의 복용 횟수와 양을 늘렸으나 하이드씨는 자신의 악행을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하이드씨는 지킬박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해범으로 경찰 추적을 피하다가 유서 한장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윗 이야기는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1885년에 발표한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줄거리다. 첫째, 그는 한국 최초의 성희롱 소송 사건 변호인단에서 활약하여 인권변호사의 첫 발을 내딛였다. 이 사건은 서울대학교 우 모 조교가 신정휴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으로 그는 우 조교의 변호인단에서 활동했다. 6년간의 법정투쟁이 이어졌으며 결국 1999년 6월 25일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다. 둘째, 그는 1989년 7월 5일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변호사등 9명으로 구성된 권인숙의 변호인단에 가담,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고, 문귀동은 권인숙을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당시 부천경찰서의 경장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당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실이 변호인단에 의해 밝혀졌다. 셋째, 그는 2000년 12월 일본군의 전쟁범죄 특히 일본군 위안부 조직과 강제연행, 위안부 소내 강간?고문?상해?학대?살인 행위를 비판?검증하는 목적으로 열린 여성국제전범 법정에 검사로 참여하여 한국은 10만 명 이상이 군대위안부로 동원된 최대 피해국이었음을 주장, 일본 왕의 처벌과 배상을 주장했다. 윗 이야기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성인권보호를 위해 헌신해온 이력을 간단히 간추린 ‘박원순의 지킬박사’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7월 10일 서울 북악산 숙정문 근처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그는 9일 집을 나가 이자리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2020년 7월 8일 박원순 시장의 전직 여비서가 박원순으로부터 2016년부터 최근까지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고소장을 서울지방경찰청에 접수한지 하룻만이다. 피해자는 변호사를 통해 본인 이외에 더 많은 피해자가 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는 신체접촉 외 휴대폰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개인적 사진을 수 차례 전송한 내용을 증거로 경찰에 제출했다. 왜 박시장은 이 사건으로 여성인권보호의 신념을 저버렸을까? 왜 박시장은 피해자에게 자신의 죄과를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대신 목숨을 끊는 비극을 택했을까? 그는 이 선택을 두고 고민했으리라. 그는 고민의 결과를 잘못 내렸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죽었어야했다. 윗 이야기는 박원순 시장이 그동안 여성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해온 공적에 반하는 ‘박원순의 하이드씨’다. 박시장의 ‘이중적인 인격’으로 인한 비극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저자 스티븐슨이 말한것 처럼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이중인격을 가지고있다. 예수님의 신실한 사도이며 종이였던 바울도 이 선택의 문제를 놓고 로마서 7장 15-24절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이렇게 영적인 결단을 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이드씨가 지킬박사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날마다 죽는 것이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으며 이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랑했다. 박 시장이 택한 자살은 잘못된 ‘죽노라’였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겸손속에서 용서를 비는 ‘죽노라’였어야 했다. 그 길이 사는 길이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 박사

2020-07-19

[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흑사병과 코로나바이러스의 비교

역사상 수 많은 크고 작은 전염병이 인류사회를 강타했다. 그 가운데 전염병이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한 사건이 있었다. 14세기 유럽대륙을 강타한 흑사병이 주인공이다. 또 다른 하나의 전염병이 현재 전 세계 인류가 당하고있는 코로나바이러스사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흑사병 당시만해도 세계역사는 유럽대륙역사를 지칭했다. 이는 서양중심적인 문명 파라다임에 기인한 것이다. 14세기 세계역사는 유럽이었으나 금세기 세계역사는 글로벌이다. 당시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흑사병은 유럽정벌에 나선 몽골군이 동방으로부터 서양으로 몰고 온 재난으로 알려졌으며 이 병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1/3~1/2가 감소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5천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2019년 가을 동방 중국서부터 시작하여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1년도 채 되지않아 이미 인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 팬데믹이 지나면 흑사병에 버금가는 인류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2020년 7월 초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잃은 생명은 세계적으로 200만이 넘고있다. 현재 세계인구는 2020년 5월 현재 약 78억이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율을 보면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로 미세하다. 그러나 이 팬데믹의 영향은 사망율과 상관없이 지대하리라고 예측된다. 흑사병이 몰고 온 가장 큰 직접적인 영향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한 사회구조변화와 종교관의 급전환이었다. 당시 유럽의 사회지배계급층인 지방영주와 피지배계급층인 농노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가 흑사병으로 인한 농노인구의 급감과 도시로의 인구이동으로 해체됐으며 도시자본계급이 출현함으로서 도시에 몰린 농노는 공장의 노동계급으로 전환되어 자본주의제도가 출현하게 되었다. 곧 이어 영주중심의 장원(莊園)이 붕괴되고 왕권중심의 제국주의 국가가 출현했다. 노동력의 부족은 도시와 농촌에 걸처 심각하여 임금은 5배이상 올랐으며 농노는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기술투자에 전력하게 되었다. 흑사병의 창궐은 유럽국가들의 경제의 현대화 및 기술 투자 증가, 그리고 더 나가 해외 팽창에 눈을 돌리게 했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관의 변화다. 교인들은 흑사병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볼수가 없었다. 매일 수만명이 목숨을 잃고있었으나 교회는 제 역활을 발휘하지 못했거나 그들을 오도하여 무기력해졌으며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흑사병이 하나님이 인류에 내리는 천벌로 해석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중세의 사람들은 천벌의 심판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가 판매하는 면죄부를 샀다. 그러나 이로서 허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사람들은 극복할 수 없다는 좌절에 빠져 염세주의 속에 묻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본주의를 기틀로 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게됐다. 흑사병은 1700년도경 점차적으로 유럽 사회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영국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동력과 다양한 기계의 발명되었다. 따라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급속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은 낙관주의적 세셰관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의학도 발달하게 되었다. 흑사병사태는 르네상스의 문명을 거쳐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가 형성을 이끌어냈으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 중심의 교회를 종교개혁을 거쳐 개신교를 탄생시킨 간접적인 촉매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종교지도자나 교인들은 흑사병과 같은 재앙을 천벌로 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했으며 의학적인 치료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흑사병이 사회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처럼 코로나바이러스사태도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그 변화가 어떤것이지는 현재로서는 분명히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난 5개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사태로 이분화된 사회속에서 살아오고있다. 그것은 대면(Contacting)과 비대면(Untacting)사회다. 대면사회에 익숙해왔던 우리는 어느새 비대면사회에서 일상화하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원격 온라인수업, 재택근무, 화상회의, 원격진단 등이 예들이다. 디지털 문명이 가져다준 혜택이다. 흑사병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사회적 변화다. 우리 부부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비대면 사회속에 살고있다. 특히 교회 예배 생활이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사태가 안겨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비정상적인 문화’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한 우리의 삶은 대면사회적이락 생각한다. 비대면사회는 어디까지나 대면사회를 보충 보완하는 역활에서 그쳐야한다고 생각한다. 비대면사회가 얼마나 계속 될런지 몰라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문화를 대면사회로 착각하고 살고있지는 않은지? 아무튼 하루속히 대면사회가 되살아나기를 간구하는 바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7-12

[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6.25 전쟁 때 헤어진 두 친구

6.25 전쟁에서 혜어진 잊지 못할 두 친구가 있다. 첫번째는 나보다 나이가 세살 위인 용희라는 친구요, 두번째는 두살 위인 진우라는 친구다. 나는 7살에 국민학교를 입학한 덕분에 같은 학년인 나의 친구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13살 중학교 1학년 때 6.25를 만났다. 6.25전쟁이 70년을 맞이하니 이 친구들과 헤어진지도 어느덧 70년이 된 것이다. 살아있으면 모두 80을 넘긴 노인들이 되었다. 용희는 16세 어린 나이로 1.4후퇴 직전 학생병으로 국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가담했으나 그 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진우는 형 창우와 함께 9.28 수복 후 자진하여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갔다. 나는 이때 쯤되면 이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그때를 반추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몸소 느낀다. 나는 6.25 전쟁을 흑석동 한강에서 용희와 진우 그리고 다른 동네 친구들과 함께 수영을 하다가 만났다. 당시 여름에 우리들이 가장 즐겨찾는 놀이터는 한강이었다. 우리 셋은 이날도 강가 모래에 나란히 누어 미래의 꿈을 나누었다. 용희는 과학자의 꿈을, 진우는 정치가의 꿈을, 나는 대학 교수의 꿈을 서로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오후 3시쯤 이상한 전투기 한대가 노량진 한강 다리를 지나 우리 위를 지나갔다.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께서 인민군 탱크부대가 새벽 3시 개성 송악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긴급방송 내용을 알려주셨다. 그 전투기도 이북에서 날아온 인민군 공군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월요일 아침 학교에 등교했는데 학교 당국은 긴급사태로 휴교했으니 연락이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긴급사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6월 28일 새벽 2시 좀 지나서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한강 강가에 있던 우리 집이 흔들렸다. 한강인도교가 끊긴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위해 국군이 취한 조치였다. 아침에 나가보니 다리가 반토막이 나 있었으며 다리위에는 건너지 못한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일이 있은지 10일 쯤되어 인민군 탱크 행렬이 흑석동 강변도로를 따라 동작동을 거쳐 과천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피난 갈 기회 조차 없게 되었다. 8월 초 쯤 동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들어서게 되고, 동네 학생복 공장에서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이 목요일 저녁에 모이기 시작했다. 나와 용희는 진우를 따라 멋도 모르고 민청 모임에 가끔 참석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민청은 청년들의 모임인데 우리같은 소년들도 초청을 했다. 서울 한 명문대를 다니고 있던 20대 청년이 민청 대표를 맡았다. 중학교 5학년 진우의 형 창우도 간부를 맡고 있었다. 민청 대표는 김일성이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로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군을 내려보냈다고 남침의 이유를 설명했다. 대표의 강연이 끝난 후 한 간부로부터 ‘김일성 장군’, ‘빨치산 노래’, ‘북한 애국가’ 등 북한의 노래들을 한 30분 쯤 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권고로 민청 모임에 곧 발을 끊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3일 후인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잔여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하고 진군한 유에군이 전진, 일부 미군부대가 중앙대 낙양중학 등 학교 교사에 진을 쳤다. 평양이 유엔군에게 합락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시민들로부터 대환영을 받는 뉴스가 들어왔다. 통일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피난갔던 많은 동네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강인도교가 파괴됐기 때문에 유엔군이 설치한 부교를 통해서 군인들이 서울을 왕래했다. 민간인은 군당국에서 특별히 발행한 도강증이 있어야 서울을 드나들 수 있었다. 1950년 11월 중공군(중국공산당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당했다. 우리 여섯식구는 피난짐을 꾸려 이웃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네 앞길 신작로를 메웠다. 이날따라 눈이 펑펑 내렸으며 기온은 영하 20도를 맴도는 극한이었다. 방향을 잦지 못한 우리 가족은 무턱대고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아갔다. 동작을 거쳐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넘어갔다. 과천 어느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저녁에 도착한 곳이 용인 풍덕이라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풍덕마을 빈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동네 집들은 이미 피난을 갔기때문에 거의 비어있었다. 우리는 짚이 잔득 싸인 창고에서 잠을 잤다. 며칠 후 아침 중공군이 동네를 점령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남쪽으로 피난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중공군 점령속에서 1주일을 지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흑석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어느 회사의 관사자리에 남녀학생을 위한 영등포훈육소가 문을 열었다. 이 훈육소는 이를테면 통합피난학교였다. 피난갔던 학생들이 되돌아 왔으나 영등포지역과 서울시내에있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중학생들이 임시로 모여 공부했던 장소다. 그래서 훈육소에는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모였다. 나중에 서울 길이 트였을 때 서울시내에 학교를 둔 학생들은 본교로 돌아가고 영등포지역에 학생들도 각기 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훈육소에서 용희와 진우를 만날 수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낮 한강 모래에 나란히 누어 미래의 꿈을 나누던 그 친구들 말이다. 그 친구들이 그립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 박사

2020-07-05

[동에서 부는 바람, 서에서 부는 바람]미국이 지금 몹시 아픕니다.

요즘 매일 저녁 뉴스 시간에 미국 TV 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방영하고있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참사 사건’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항의시위들을 시청하면서 ‘미국 사회가 큰 아품을 겪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은 2020년 5월 25일 저녁 오후 8시 미니애폴리스 경찰국 경찰관들이 46세 아프리카계(African-American) 조지 플로이드를 도로상에서 검거, 강제 진압하여 목숨을 잃게한데서 비롯됐다. 이 사건에 가담한 경찰은 아시안 계(Asian-American) 투 타오(Tou Thao, 34)를 포함 모두 4명, 그 중 백인계 (majority) 경찰관 데릭 쇼빈(Derek Chauvin)이 플로이드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약 8분간 무릎으로 목을 누르는 모습이 공개됐다. 플로이드는 쇼빈에게 “숨을 쉴 수 없어요.( I can’t breathe)”라고 계속 호소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후 “엄마, 내가 숨을 쉴수가 없어요”(Mama,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는 조지 플로이드의 음성이 영상을 통해 들려 올 때 나는 마음을 가눌수가 없었다. 3명의 경찰관들은 쇼빈의 만행을 바라만 보고 이를 말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몽족 출신 소수민족 베트남계(minority) 타오도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수민족 타오는 백인 쇼빈이 다른 소수민족 프로이드에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말렸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봤다. “내가 그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구급차가 실려간 플로이드는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에 살고있는 나와 같은 소수민족(minority)은 가끔 사회 통제(social control)와 사회 정의(social justice) 사이에서 선택의 혼란을 겪을 때가 있다. 48세의 쇼빈은 백인이면서 나이도 위이고 서열도 우위면서 미국문화를 대표하는 백인에 속한다. 더구나 다른 2명의 경찰도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 통제다. 그러나 무릎으로 플로리드의 목을 누루는 행위는 사회정의에 반한다. 더구나 강자쪽에 속한 백인이 약자쪽에 속한 흑인을 횡포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 이 만행을 말렸어야 사회 정의다. 그러나 타오는 사회 통제쪽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소수민족 한인들이 지난 6일 LA한인타운 월서파크 플레이스 잔디광장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 흑인들과 함께 사회 정의를 외쳤다. 500여명의 한인들은 백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여 인종차별 반대와 소수계 인권보장을 요구했다. 미국 여러 도시에서 이와 같은 사회 정의를 위한 시위가 벌어지고있다. 다수민족의 백인들이 소수민족과 함께하는 사회 정의의 부르짖음이다. 1991년 LA흑인폭동으로 방화와 약탈로 한인상인들이 큰 아픔을 안고 있는 LA한이타운 바로 그자리에서 백인 흑인 라티노 아시안등 다수 소수민족이 함께 외치는 사회 정의다. 1864년 링컨대통령의 노예배방선언은 흑인들에게 사회 정의의 물고를 터놨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숱한 흑인민권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점철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누가 뭐라고해도 한국 중국 인도등 아시아계 멕시코 남미 히스패닉 등 이 땅의 소수민족들이 지금과 같은 법적 내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이들 흑인민권운도가들의 덕분이다. 그들이 이루어 논 열매 덕분이다. 이들 흑인들의 희생을 통해 모든 소수민족이 법적인 평등의 권리를 성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흑인들과 함께 사회 정의를 위해 투 타오처럼 방관자가 아니라 LA한인타운에서 보여 준 소수민족처럼 흑인들과 한 배를 타야 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는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투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1991년 LA흑인폭동으로 인해 한인상가들이 큰 피해를 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한인들이 흑인가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웃인 흑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한것 때문은 아닌가? 유대인들이 흑인가에서 장사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이웃과의 어울림이었다. 흑인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면 유대인 가게 주인이 가장 먼저 찾아 위로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벌렸다. 유대인 상인들은 상점 건물에 살면서 한 동네사람이 된 것이다. 백인의 소수민족차별대우에 흑인들과 합세해서 싸웠다. 백인에게 천대받고 사는 흑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배를 탄 소수민족인 것이다. 현재 흑인인권단체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NAACP는 1906년 흑백대표 60명이 발기하여 설립됐다. 유대인 콜럼비아대학 죠엘 스핀간(Joel Spingarn)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 운동에 유대교 라바이 스테반 와이즈(Stephan Wise)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동참했다는 사실은 미주 한인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이들은 사회 통제보다 사회 정의를 택한 것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6-14

[허종욱 칼럼]나는 다시 태어나리, 당신도 다시 태어나리(Rinascero, rinascerai)

지난 4월 9일 내가 섬기고 있는 벧엘교회 영어권 이마이클(이경열) 집사님의 장례예배가 영상으로 진행됐다. 이 집사님은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여 1주일간 고생하다가 54세의 젊은 나이로 지난 4월 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집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하려고 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런데 집사님 장례예배에도 같은 이유로 참석할 수 없었다. 교회 본당에서 진행된 온라인 장례예배에는 집례를 맡은 정태목사님, 이준장로님, 그리고 형제 자매등 10명 내외가 참석했다. 그리고 이 집사님과 초등학교 때부터 벧엘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해온 이 데이빗 목사님이 영상추도사를 했다. 모두 벧엘교회에서 자란 친구들이다. 나는 장례예배를 시청하면서 이집사님의 부모 그리고 40년 전 벧엘교회가 태동했을 때 이 집사님과 그의 친구들을 회상했다. 나는 이 집사님 가족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있다. 나는 피츠버그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곳 주립대학에서 근무하던 첫 주 1971년 12월 볼티모어 시내에 자리잡은 볼티모어연합교회(담임 필유일목사)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이 집사님의 부친 이흥극 집사님을 알게 되었다. 예배 후 친교시간에 이흥극, 이주영, 이덕렬 집사님 등 ‘홀아비’집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 세 집사님들은 가족을 한국에 두고 이 지역으로 초기이민와서 타의의 ‘홀아비’로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내 아내는 피츠버그대학원에 남아 공부를 하고 나만 먼저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나도 타의의 ‘홀아비’였다. 당시 나도 아파트를 찾고 있었다. 내말을 듣고 있던 이흥극 집사님이 “우리하고 같이 있습시다”라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네’홀아비’들이 3층 아파트에서 살림살이를 꾸렸다. 3층이라 겨울에는 말도 못하게 춥고 여름에도 또 말도 못하게 더웠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저녁을 준비했다. 각자의 메뉴가 특이했다. 이흥극 집사님의 특식은 질겡이 된장 찌게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네 ‘홀아비’들이 혜어 지게 되었다. 이주영 집사님의 가족이 제일 먼저 한국에서 와서 아파트를 떠났다. 그 다음에 이덕열 집사님 가족이 왔다. 이어서 이흥극 집사님 가족이 왔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내 아내가 와서 모두 혜어졌다. 볼티모어지역에 당시 아리랑촌이라고 부르는 아파트단지가 있었다. 한국 이민자들이 몰려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네 홀아비들은 모두 이 아리랑촌에 아파트를 얻어 홀아비 신세를 면했다. 하루는 이흥극 집사님이 모든 ‘홀아비’들을 저녁에 초대했다. 한국에서 사모님과 2남2녀가 자리를 같이했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이 마이클 집사였다. 사모님이 한국에서 가져 온 반찬들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3층 아파트에서 한국음식에 허기를 지고있던 우리들은 오랜만에 고향음식을 만끽했다. 그 후 우리들은 모두 벧엘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나는 이 마이클 집사님이 자라 온 발 자취를 잘 알고 있다. 이 집사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했으며 영어권 집사로 피택되어 봉사를 크게 해왔다. 이흥극 집사님과 사모님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계신다. 이제 이 집사님도 하늘나라에 가셔서 부모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고 있으리라.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부활로 재회의 기쁨을 우리 모두 맞이 할 것을 확신한다. 지난 1일 이태리의 유명한 가수 로비 파치네티(Roby Facchinetti)의 노래 “나는 다시 태어나리. 당신도 다시 태어나리”(Rinascero, rinascerai)가 유투브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지금까지 근 1000만명이 시청했다. 이 가수가 작곡하고 작사가 스테파노 도라지오(Stefano Dorazio)가 작사한 이 노래는 한국어를 포함해서 20개국어로 번역, 불려지고 있다. 작곡가와 작사자의 고향은 이태리 북쪽에 위치한 버가문(Bergamo)라는 도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부활로 다시 만날 것을 이 노래를 통해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노래의 수입 전액을 이 도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Pope John XXIII병원에 기부했다. 한국어 번역을 소개한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우리는 별들을 보기위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폭풍은 우리를 전복시키고 무릎 꿇게 만들었으나 파멸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과 대적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매번 이기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우리의 미래를 바꾸어 놓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우리가 좀 더 깨우칠 것입니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긴 뒤, 그분께 돌아올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새로운 공기를 마셔봅니다. 나의 도시는 여전히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과 대적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매번 이기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5-11

부고(訃告)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나는 1960년대 후반에 한 중앙일간지 특파원으로 미국에 왔다. 당시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로스에젤리스 타임즈, 시카고 티리뷴, 볼티모어 선, 보스턴 글로브 등 미국 주요일간지를 보고 놀란것은 많은 지면이였다. 주중에는 약 30면, 일요판은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여행, 부동산 등 색션(section)별로 200면이 넘었다. 그래서 일요판은 말 그대로 부피가 한 보따리가 된다. 약혼(Engagements)과 부고(Obituaries)란이 일요판 색션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약혼섹션과 부고섹션이 각각 10면 이상을 차지할 때가 많았다. 지금은 종이신문이 온라인에 밀려 약혼섹션은 자취를 감쳐버리는 경향이 있으며 부고섹션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1960년대에 한국 중앙일간지는 주중 8면을 발행했으며 일요판을 따로 발행하는 신문사도 있었다. 서울신문이 발행한 ‘선 데이 서울’ 타블로이드 일요판은 20면쯤 됐다. 주로 연예 스포츠계의 소식으로 지면을 메웠다. 지금은 한국일간지들이 모두 섹션별로 발행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섹션별 지면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각각 1면을 발행했으며 약혼이나 부고섹션은 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명인이 결혼하거나 세상을 떠날 때 사회면 또는 문화면의 한토막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미국 일간지 약혼섹션은 새로 약혼한 또는 결혼할 남녀의 사진과 함께 본인 소개는 물론 신부 신랑의 가족소개까지 곁들였다. 젊은 한 쌍이 희망과 행복이 가득찬 새로운 인생길을 시작하는 경사를 세상에 알리는 섹션이다. 반면 부고섹션은 인생을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여정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리는 섹션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떠난 사람들은 부고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부고의 내용과 비문을 남겨놓기도 한다. 약혼섹션은 기쁨의 섹션인 반면 부고섹션은 슬픔의 섹션이라고 할 수 있다. 약혼섹션에서 부부가 같이 출발하지만 부고섹션에서 부부가 동시에 떠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미국 주요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지가 지난 19일자 일요판 부고난 16면에 3만 8077명의 부고를 실었다. 어떤 부고는 사진과 함께 어떤 부고는 이름만 실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희생을 당한 사망자들로 추정된다. 내가 알기로는 사망자 숫자로 보나 부고난 면수로 보나 역사적일 것 같다. 지난해 같은 일요일자인 4월 21일자 신문에는 부음이 7개 면뿐이었다고 보스턴글로브는 밝혔다. 많은 사람들은 이날 부음면을 사진으로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려 “이렇게 부음이 많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계속해서 집에 있자”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 신문에 부고란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독자들이 관심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왜 미국사람들은 부고섹션에 관심이 많을까? 대개 부고의 내용은 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원인, 직업, 고향, 가족관계, 또 유족들이 고인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간단한 추모 문장과 고인이 사회에서 베푼 선행을 기술하는 문장, 그리고 “하나님 품에서 잠들다”로 끝을 맺는다. 독자들은 고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다가 떠난는지를 부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인의 삶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기회도 갖는다. 어떤 부고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떻게 죽을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죽는다’를 ‘잠잔다’라고 말하고 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 5:38, 39)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등이 예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잠자다’가 부활의 몸을 입고 깨어나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깨어날 것을 굳게 믿는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 사회학 박사

2020-04-26

[허종욱 칼럼]인술(仁術)의 천사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며칠 전 내가 살고있는 시니어 타운의 메니저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담긴 이메일이 날라왔다. “오늘 저녁 7시에 다함께 나와서 일선에서 수고하는 의료진들에게 고마움의 박수와 환호를 보냅시다”(Let’s come out tonight at 7:00pm and clap and make some noise for all the medical personnel on the front lines). 정해진 시간에 타운 사람들은 집앞에 나와 의사 간호사등 의료진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사랑이 담긴 선물을 카운티병원에 전달했다. 병원 복도와 정문 양편에는 의사 간호사등 의료진들이 나란히 서서 그들이 돌봐주어워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완치되어 필 쳬어를 타고 퇴원하는 80세 노환자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피자가게는 피자로, 햄버거가게는 햄버거로, 꽃집은 꽃으로, 경찰과 소방서는 자동차 기적으로, 교회 찬양대는 찬송으로 의료의 천사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정말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의료천사들’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이 감염되고 수십만이 목숨을 잃고 있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공포를 안겨주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역사상 가장 숭고한 사랑의 교차로를 놓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사 간호사 등 여러 의료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밤낮으로 병원에서 헌신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과 여러 날 동안 떨어져야하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나 장면들을 접할 때마다 이분들이야 말로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몸소 실천하는 분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의료행위인 의술(醫術)을 인술(仁術)라고 하였다.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라는 뜻이다. 의술의 어진 마음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함께하는 것이다.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졸업식장에서 흰가운을 입고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를 한다. 다른 학문에서 찾아 볼수없는 특별한 선서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460BC-370BC)가 2500년여전에 작성한 선서다. 이 선서는 모두 11편으로 되어있다. 그 중 제1편은 “나는 인류를 봉사하는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라고 되어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데 일생을 바치겠다는 선서다. 현재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선서하는 문구는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의사협회(WMA World Medical Association )에서 개정된 제네바 선언이다. 며칠전 나와 함께 메릴랜드 벧엘교회를 섬기고 있는 K집사님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과의사로 오랜 동안 인술을 베풀다가 은퇴한 분이다. 일주일 전 주의료관계 당국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코로나 바이러스사태로 의료요원들이 부족하니 봉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니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K집사님은 80세 중반이 넘은 분이다. K집사님은 나이 때문에 결국 봉사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나는 K집사님과의 전화 대화가 끝난 후 K집사님은 봉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예수님의 이웃사랑 계명과 히포크라테스선서를 충실히 이행하신 분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나는 중학교 교과서를 통해서 간호사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다. 나이팅게일여사는 크림 전쟁(1853년~1856년) 때 38명의 잉글랜드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슈코더르의 야전 병원에서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고통 받는 부상병들을 돌봐주어 예수님의 이웃 사랑 계명을 실천했다. 크림전쟁은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4국 연합국간에 3년 동안 벌졌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많은 간호사들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본 받아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은 의료진의 진정한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술의 천사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4-19

[허종욱 칼럼]‘바이러스, 감염, 그리고 사망을 이기시는 그리스도’

지난 3월 중순부터 거의 한달 동안 집안에서 ‘감금생활’을 하고있다.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전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이다. 오늘은 2020년 4월 8일 수요일이다. 늘 그러했듯이 새벽 5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QT안내 소책자 오늘 날자 ‘오늘의 양식’(벧엘출판사)을 폈다. 제목은 ‘더 소중한 하나님’(God is Worth More)이다. 오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17-28이다. 성경을 펴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한다. 28절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가 요절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하나님의 관계를 소개하는 예화로 시작되는 본문을 읽고 내 자신을 되 돌아본다. “하나님, 자격없는 저희를 사랑해 주시고 이 세상의 어떤 것이나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의 기도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역사상 초유의 영상예배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한다. 내가 섬기고 있는 벧엘교회(담임 백신종목사)도 마찬가지다. 월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 새벽 6시에 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년 같으면 교회에서 새벽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특별새벽예배’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 단위로 흩으려 놓았다. 그리고 각자가 개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회개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영적인 기회를 안겨주고 있다. 이번주에 묵상한 말씀들은 이러하다. 4월 6일 월요일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마21:12-17), 7일 화요일은 “예루살렘의 멸망으에 대한 경고”(막13:1-13), 8일 수요일은 “유다의 배신”(눅22:3-6), 9일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13:1-20), 10일 금요일은 “삽자가에 죽으심”(막15:33-47), 11일 토요일은 “굳게 무덤을 지킴”(마27:62-66), 12일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나다”(요20:19-22). 고난주일의 하이라이트는 사탄이 누리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번 부활주일이 코로나 사태에 주는 특별한 영적인 의미를 묵상 해 본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온 인류에게 새로운 영생의 소망을 확증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복음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2월 11일(현지시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명칭을 ‘COVID-19’라고 정했다고 밝혔다. ‘COVID-19’는 코로나(corona)의 ‘CO’, 바이러스(virus)의 ‘VI’, 질환(disease)의 ‘D’,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이 처음 보고된 2019년의 ‘19’를 의미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탄처럼 무섭다.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역사의 진로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바이러스 사탄과 싸워 이길수 있을까? 인류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한다. 절실한 기도가 요구되는 시기다. 인류역사는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을 잘 보여주고 있다. 7500만에서 2억의 인구를 앗아간 바이러스로 인한 비극이다. 유럽인구의 3분의 1일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 흑사병은 유럽에 제한한 지역적이였지만 지금 콜로라 바이러스는 전 지구를 둘러싼 글로벌적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길 수 있다. 어떤이는 ‘COVID-19’을 이렇게 해석한다. 즉 ‘바이러스, 감염,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Christ Over Virus, Infection, and Death). 맡는 말이다. 사탄과 싸워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이기시리라고 굳게 믿는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20-04-12

[허종욱 칼럼]사랑하는 손인식 목사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며

지난 달 28일 아침 손인식 목사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접하고 나는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손목사님이 소생하시어 목회은퇴 후 8년간 이어 온 북한선교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확신하고 기도해왔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4일 손목사님이 낙상으로 인한 뇌출혈수술을 받고 투병하고 계시는 동안 가끔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나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손목사님은 72세를 일기로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손목사님는 1981년 12월18일 워싱턴 근교 케피탈신학교(Capital Seminary)를 갖 졸업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메릴랜드 벧엘교회 초대 동역목사(부목사)로 취임, 8년동안 시무하면서 1979년 12월에 취임한 초대 담임 김상복목사님과 함께 벧엘교회의 기초를 닦는데 큰 공헌을 했다. 손목사는 1985년 10월 벧엘교회를 떠나 디트로이트침례교회 담임목사로 2년간 시무 한 후, 김상복목사의 간청으로 다시 벧엘교회로 돌아와 1990년 11월까지 8년의 최장기간의 부목사로 시무하던 중 LA 베델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 이 교회의 3대 담임목사로 취임, 24년의 시무를 마치고 2013년 12월 목회사역을 마치고 은퇴했다. 손목사님이 벧엘교회에 남긴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다. 손목사님이 8년 동안 벧엘교회 시무하면서 남긴 목회에 대한 열정은 부르도자라는 별명으로 표현된다. 손목사는 긴급한 교인 심방이 있을 때 만사를 뒤로하고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부르도작식으로 달려가셨다. 손목사님은 자신이 담당한 선교 목회를 수행 할 때도 부르도자식은 함께했다. ‘더 늦기전에’ BTL(Before It is Too Late) 라는 선교 케치 플레이스를 내 걸고 세계선교센터를 설립, 계획 훈련 파송 등에 박차를 가하셨다. 교회 목회는 담임 목사 한분이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산 증거를 손목사님은 벧엘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교인들에게 보여주셨다. 손목사님은 담임목사의 손과 발이 되어 담임목사 목회의 철학 방향 실행 목표를 달성하는데 늘 보조를 맞추셨다. 손목사님은 42세의 젊은 나이로 LA베델교회 3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안고 있는 숫한 어려움들을 하나님만 묵묵히 바라보며 ‘무릎과 인내’로 해결해나가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100여 명의 교인들로 시작한 교회를 그의 목회 24년 동안 6000여 명의 대형교회로 성장시켜 남가주 한인교회가운데 초대형교회의 하나로 성장시키는데 큰 역활을 했으며 6천여명이 한지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대형 교회 건물을 완성하고 은퇴했다. 손 목사님은 자신의 인생을 전후반기 두 분기점으로 정하고 살아오셨다. 전반기는 교회 목회이고 후반기는 북한선교다. 그래서 손목사님은 자신이 목회 정년을 65세로 정하고 2013년 베델교회를 은퇴하시고, ‘그날까지 선교연합’(UTD-KCC)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북한동포를 위한 복음사역에 헌신해오셨다. 이를 위해 북한자유를 위한 북한 포럼과 통곡기도회, 탈북자 간증과 강제북송반대집회, 북한고아보호를 위한 집회를 이끌어 오셨다. 워싱턴-볼티모어지역에서도 벧엘교회와 가든교회(담임 한태일목사)를 비롯해서 여러 교회에서 여러번 ‘북한을 위한 통곡기도회와 탈북자 간증의 밤’을 가졌다. 나는 이지역에서 집회가 있을 때마다 거의 빠지지않고 참석했다. 지금도 손목사님의 북한백성을 위한 애절한 통곡기도 소리가 내 귀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 부부가 손목사님이 담임목사로 부임하신지 7년만에 LA베델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손목사님은 본당건축 계획안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손목사님을 어떻게 이 교회를 통해 써 오셨는지를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리고 5년 후 본당건축은 시작되었다. 2017년 가을, 우리 부부는 LA베델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한 성도를 만났다. 인사를 건네니 베델교회 집사라고 했다. 우리는 손인식 목사가 시무했던 메릴랜드 벧엘교회에서 왔다고 말하고, 손 목사가 언제 예배에 참석하느냐고 물었다. 이 집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희 교회에서 은퇴하신 후 한 번도 본 교회를 방문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후임 김한요목사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구 본관 벽에는 손인식 목사와 김한요목사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 장면은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4-05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들 8

내가 최찬영선교사를 처음 만난 때는 피츠버그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있던 1970년 봄 우리 부부가 섬기고 있던 피츠버그한인교회에서다. 이 교회 담임을 맡고있던 현순호목사가 피츠버그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시카고 멕코맥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위해 사표를 내고 떠난 지 한달 후였다. 원래 이 교회는 1965년 당시 피츠버그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학위를 마치고 피츠버그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있던 김동수전도사가 새로 이민온 5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김전도사가 1969년 봄 시카고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 박사학과정을 밟기위해 떠난 후 같은 해 가을 현순호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현목사가 떠난 후 당시 태국선교사로 안식년중이었던 최선교사가 이 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최선교사는 해방 후 한국의 최초해외선교사다. 1955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 장로회로부터 태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미국성서공회소속 태국성서공회와 라오스성서공회 총무직을 맡고 있으면서 성경번역, 인쇄, 배본사역을 담당하고 있다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을 때였다. 최선교사는 사모님 김광모선교사와 함께 이 교회를 섬겼다. 당시 피츠버그한인교회는 유일한 한인교회로 100여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는데 대부분은 이 도시로 유학온 학생들이었다. 최선교사 내외는 새로 이민온 가족들, 유학생 성도들을 위해 반낮으로 심방을 하며 돌봐주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태국으로 돌아간 최선교사 내외는 1978년부터 아시아.태평양지역총무직을 맡고있다가 1983년 중국을 방문, 1987년 12월 5일 중국 난징에 아이덕인쇄공장을 설립, 1992년 2월 37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65세로 은퇴할 때까지 근 1억권의 성경을 인쇄하여 중국을 비롯해서 세계 여러나라에 배본하였다. 1926년 평양에서 탄생한 최선교사는 중국 연길에서 성장했으며 해방 후 서울로 장로교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동안, 6.25전쟁을 만나 미국통역관과 군목으로 근무하다가 1954년 11월 당시 부산복음병원에서 장기려박사와 함께 근무하던 김광명사모와 결혼했다. 김사모는 고려대 의대 전신인 여의전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 순교한 김예진목사의 셋째 딸이다. 김사모는 1956년부터 60년까지 방콕크리스천병원 의사선교사로 사역했다. 최선교사 은퇴 후 내외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최선교사는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에서 교수로 후배선교사들을 양성하다가 2003년 LA또감사선교교회 선교목사로 사역을 하고있다가 2009년 7월 한국으로 귀국, 2006년에 설립한 GEDA(Global Evangelization & Development Agency) 총재직을 지금까지 맡고있다. 김광명사모는 2017년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두번째 최선교사를 만난것은 은퇴 후 그가 풀러신학교 교수로 취임하던 해인 1992년 9월 6일이었다. ‘오늘의 양식’을 발행하고있던 벧엘출판사는 최선교사를 특별강사로 초청, 그가 체험한 성경번역, 인쇄, 배본 문서선교사역에 대해 출판사 편집위원들에게 강의했으며 토론회를 가졌다. 최선교사는 기독교 문헌의 번역은 지식과 영적인 면이 같이 조화를 이루어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과정에 성령님의 절대적인 인도가 없이는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과정에서 기도를 잊지 말라고 부탁했다. 최선교사의 동생 촤찬주박사는 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면서 이 교회를 섬겼으며 최선교사의 처남 김동수박사는 버지니아 비치 주립대학(University of Virginia Beach)에서 은퇴, 2002년부터 2년동안 한동대학에서 나와 함께 가르쳤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2-24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들 7

내가 김영길 한동대 총장을 처음 만난 때는 2000년 1학기가 시작하기 한 달전 1999년 12월 말 경 대학총장실에서다. 김 총장의 초청으로 가르치고 있던 펜실바니아주립대를 떠나 한동대에서 가르치기 위해 미국생활 32년 만에 조국을 찾은 것이다. 총장실에서 김 총장과 나와의 첫 대화는 나의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됐다. “김 총장님이 표방한 한동대의 슬로건인 ‘Why Not Change the World’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김 총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동대는 한국에 있는 여러 기독교 대학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를 바라는 비전의 표현입니다. 미국 하바드, 프린스턴, 에일처럼 유수한 대학들이 기독교 대학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의 본질을 모두 잊어버린 대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동대는 학문과 복음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대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학생들의 정직성부터 훈련시켜야 합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감독 시험 제도입니다”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나는 교실에서 시험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후 학생대표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가 끝난 후 나는 내연구실로 돌아왔으며 가장 늦게 답을 마친 학생이 전체 학생들의 시험지를 가져왔다. 미국 대학에서도 가져보지 못한 무감독 시험제도를 한동대에서 처음 체험한 것이다. 매주 화요일은 봉사와 채플 시간의 날이다. 팀학생들은 체플시간 후 팀모임을 1시간쯤 갖는다. 팀모임은 팀교수 지도 아래 팀장을 비롯한 임원진들의 인도로 진행된다. 팀원들은 이 모임에서 성경공부, 봉사활동, 팀원들간의 협조사항등을 논의한다. 매주 화요일 저녁 6시 강당에서 진행되는 성경공부에 전교생들이 팀별로 참석한다. 팀의 구성은 전공, 학부, 성별, 학년, 국가 등이 다른 3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되며 교수가 팀교수로서 팀원들의 학업뿐아니라 가정 및 신앙생활까지 지도 상담한다. 생활관(기숙사)의 배정도 팀별로 되어있다. 한동대는 봉사와 채플시간을 학점제도로 규정했으며 4학년 초까지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다. 팀학생들은 함께 지역교회, 양로원, 고아원, 농어촌 등 지역사회를 봉사한다. 팀 활동을 통해 받은 훈련과 교육은 졸업 후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에까지 이어진다. 다른 대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팀제도는 김영길 총장이 개발한 학생들의 신앙훈련과 공동체정신의 훈련과정이다. 김 총장은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또 다른 슬로건을 내걸고 학생들에게 남에게 베푸는 정신을 훈련시켰다. 김 총장은 신앙은 믿음과 행동이 같이 가야한다는 기독교 원리를 한동대에 적용한 것이다. 2019년 4월 30일 아침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81세를 1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김 총장과 함께 11년간 한동대를 섬겼던 옛날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4년전 췌장암 4기를 진단 받은 후 치료와 기도로 어느정도 차도를 보게되었으며 지난해에는 거의 완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기쁨을 갖고 있던 중 지난 5월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을 금치 못한다. 25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동대가 한국의 400여개의 대학가운데서 상위 40권에 속하며 이름만이 아니고 명실공히 기독교 중심 인성교육의 실천 대학으로 우뚝서게 된 ‘오늘의 한동대’에는 김영길 총장의 피눈물나는 열정과 기도가 담겨있음을 나는 직접 체험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본관 4층 교수 기도실에서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김총장이 모습을 회상해 본다. 오늘의 한동대학이 있게된 원동력은 누가 뭐라고해도 김총장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와 교직원 그리고 학생과 학부형 등 4위일체로 서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은혜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방학때면 김영길 총장 내외분과 함께 미주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두 분의 간증집회와 모금운동을 도우면서 가졌던 많은 추억들을 되새겨본다. 당시 대부분의 한동대 교수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동대에서 첫 교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60대 후반인 김영길총장은 같은 연령대인 나와 친구로 지내면서 동고동락을 겪어왔다. 어려움이 닦쳐 올 때마다 격려와 용기,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극복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다시 볼 것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2-16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들 6

내가 이원상목사를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때는 이목사가 와싱턴중앙장로교회 2대 담임목사로 1977년 12월에 부임한지 1년이 지난 1978년 10월 어느 주일 예배 후였다. 이 교회에 새로 젊은 목사가 부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섬기고 있던 볼티모어연합교회(담임 필유일목사) 교인 몇몇 분들과 함께 이 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이 교회는 버지니아주 비엔나(313 Park ST. N.E. Vienna, VA)에 위치해 있었다. 교회는 초대 윤명호담임목사를 둘러싸고 ‘모종의 사태’로 인해 교인들간에 불화가 있은 후 교회가 갈라지면서 이원상목사가 후임으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나와 동연배인 30대 후반의 젊은 이목사가 이날 나에게 준 첫 인상은 ‘겸손과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자’라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취임 4년 되던 해인 1981년 교인 30%가 교회를 떠나는 시련이 있었지만 그의 리더십의 특징인 ‘겸손과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자’의 자세로 잘 극복해 나갔다. ‘겸손과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자’라는 이목사의 목회 리더십의 특징은 나는 이 교회의 교인은 아니지만 내가 이목사를 만날 때 마다 더욱 깊게 각인되었다. 이 시련을 잘 극복한 이 교회는 이목사의 리더십에 따라 성장을 계속했으며 1985년 12월 7일 2만2000 스퀘어피트에 이르는 새 교회 건물(8526 Amanda Place, Vienna, VA)을 봉헌하는 축복을 받았다. 이원상목사의 ‘겸손과 무릎으로 기도하는 목자’의 리더십은 2003년 9월 27일 26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 할 무렵 4천여명의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센터빌(15451 Lee Hwy, Centreville, VA)에 80에이커 부지를 매입, 현재의 대형교회 건물을 마련하는 기초를 세웠다. 이목사는 은퇴 후 SEED국제선교회(SEED International)와 에즈라 리더십학원(Ezra Leadership Institute)를 설립, 초대 회장으로 선교와 목회 리더십연구에 몰두해 왔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5일 79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식도암으로 고생하셨던 이목사는 지난 해 8월 완치판정을 받았던 암이 전이되어 치료를 받아 온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원상목사는 내가 섬기고 있는 볼티모어 벧엘교회 임시당회장직을 두번 맡으시면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큰 도움을 주셨다. 2005년 4월 어느 주일 예배 후 이목사님과 점심을 같이 했을 때 나에게 책 한 권을 넘겨주셨다. 영국 웨일스신학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어 출판한 ‘목회 리더십: 존 크리소스톰에 대한 참고를 포함한 사례연구’였다. 이목사는 자신의 와싱턴중앙장로교회에서의 27년간 목회경험을 교부 존 크리소스톰의 경우와 대화식으로 비교연구한 책이다. 이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몇 년 만이었다. 이 목사는 목회에 문외한인 나에게 책 독후감을 부탁했다. 나는 일주일 만에 읽고나서 느낀점들을 이곳 교포신문 칼럼에 썼다. 몇 주 후 이목사를 주일 예배 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목회 리더십의 원리와 중심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책에 대한 내 생각을 전했다. 이 책은 다른 원리들도 열거하고 있지만 중심은 기도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목사의 목회신앙고백이었다. 2015년 가을 이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마지막 뵈었다. 이목사님이 암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판단을 받은 지 며칠 후였다. 황재진목사님이 메릴랜드 클락스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헌신예배를 드릴 때 이목사님이 축도순서를 맡았다. 황목사님은 와싱턴기독실업협회에서 고문목사로 여러 해 동안 섬겨오시는 목사님인데 이번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이목사님은 축도에서 황목사님께서 무릎꿇는 종이 되어 달라고 간구했다. 예배 후 축하연에서 이목사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이목사님은 지난 목회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역시 이 자리에서도 ‘무릎꿇는 목회’를 회상했다. 류응렬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목사는 2017년 1월 9일 고별예배에서 ‘이제 우리가 그 길을 걷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그 길은 바로 무릎꿇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2-09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들 5

내가 영문판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을 발행하는 레디오 바이블 클레스(RBC) 선교기관의 최고책임자인 리차드 디한 회장을 처음 만난 때는 1983년4월 봄, RBC를 두번 째 방문할 때 였다. Our Daily Bread 데니스 디한(Dennis DeHaan) 편집장의 소개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60대 후반으로 겉으로 보기엔 40대 청년처럼 건장하게 보였다. 디한회장은 벧엘교회가 한글판 ‘오늘의 양식’을 발간함으로서 아시아언어발간 최초국가가 되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당시에는 영어본 이외에 스페인어본이 발간되고 있었다. 지금은 Our Daily Bread가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비롯해서 16개국어로 번역, 공급되고 있다. 당시 내가 섬기고있는 벧엘교회에서 한영판 ‘오늘의 양식’을 한국 소망출판사에서 인쇄하여 항공편으로 받아, 벧엘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외부로 우송을 하고 있었다. 비용도 많이 들 뿐 아니라 우송과 세관통과에 어려운 일들이 여러번 다가왔다. 내가 이런 사정을 데니스편집장에게 말했더니 리차드회장과 한번 의논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사정을 듣고있던 리차드회장은 앞으로 ‘오늘의 양식’ 인쇄와 독자 우송을 RBC가 맏겠다고 했다. 그리고 RBC가 2년 동안 모든 비용을 감당하겠다고 했다. 당시 약 8만 달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 그 후 부터 ‘오늘의 양식’의 인쇄와 우송은 RBC가 실비로 감당해오고 있다. RBC에서는 라디오, TV, 또는 Our Daily Bread처럼 책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목사나 선교사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Teacher)이라고 부른다. 당시 리차드 디한선생은 라디오방송망 ‘Radio Bible Class’ 프로그램과 TV방송망 ‘The Day of Discovery’ 프로그램 시간을 통해 성경공부와 복음을 전했다. ‘Radio Bible Class’ 프로그램은 RBC의 창시자인 리차드 디한선생의 아버지 엠. 알. 디한(M.R. DeHaan) 목사가 1938년에 시작한 미국최초 기독교 라디오방송이다. 그리고 1960년대에 TV방송이 등장함으로서 리차드 디한선생은 1968년 기독교 TV방송 ‘The Day of Discovery’ 프로그램을 통해 매주 주일 아침에 복음을 전했다. ‘Radio Bible Class’는 1968년 30년의 전통을 마감했다. 그 후 리차드 디한선생은 1985년 TV프로그램을 그의 아들 마틴 디한(Martin DeHaan)선생에 넘겨주고 Our Daily Bread에 주옥과 같은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리차드 디한선생을 두번째 만난 것은 8년만인 1990년 봄 김상복목사와 함께 RBC를 방문했을 때였다. 70대 초반에 들어선 리차드선생은 파킨스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했으며 언어구사에 어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10여 권의 신앙서적을 저술했으며 특히 그의 연작 ‘Discovery Series’는 지금 까지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있다. 그는 이 병으로 10여년간 고생하다가 2002년 가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2-02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 4

내가 정제순선교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4월 26일부터 1주일간 가졌던 선교부흥회에서다. 이 부흥회 강사로 정제순선교사가 김형남 박돈상 백승윤 이주희선교사들과 함께 초청되었다. 벧엘교회(담임 백신종목사)는 매년 4월을 선교의 달로 정하고 1주일 동안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선교부흥회를 갖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1980년 김상복목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선교를 교회 목회에 최우선으로 두자는 목회목표를 세운데서 비롯했다. 정선교사는 당시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마께오족 베이퍼마을에서 성경번역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정선교사는 홍정욱사모와 함께 1989년 1월 사랑의 교회(담임 옥한흠목사)의 성경번역파송선교사로 이 지역에 도착, 언어만 있고 문자가 없는 이 종족에게 글자와 문법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신약성경을 번역, 10년 만인 1999년 6월 ‘마께오 신양성경’을 완성한 후였다. 두 딸과 아들도 정선교사 부부와 함께 베에퍼마을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어느새 현지인이 되어버렸다.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맨발로 정글을 다니는데 익숙해졌으며 노아기르는 돼지 닭 등 가축들과도 같이 뒹굴었다. 아이들을 도시에 위치한 국제학교에 보내는 대신 마께오족 학교에 보내 종족화 시켰다. 그러다가 2000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안식년을 받고, 풀러신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식구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상황을 정선교사는 그의 성경번역선교사역 이야기를 담은 저서 ‘로삐아를 찾아서’(2006, 조이웍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맡딸 예람이는 옮겨 다니는 선교사 일 탓에 엄청난 이동을 감수해왔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하루하루 달력을 지워가며 파푸아뉴기니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아이었다. 하여간 아이들은 어느새 파푸아뉴기니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둘째 예준이만 해도 그렇다. 풀러유학 당시 예준이는 LA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2002년 연이어 7개학교가 경쟁하는 영어, 수학, 글짓기 대회에 나가 1등을 하여 그곳 교장선생님의 주목을 받았다. 하루는 교장선생님께서 예준이한테 “너 PNG(파푸아뉴기니)가 좋으냐 USA(미국)이 좋으냐? 아빠만 보내고 너는 여기 있을래? 라고 했단다. 이때 4학년짜리 녀석 왈 “PNA가 좋다. 왜냐하면 거긴 비올 때 맨발로 학교 다니고, 나무에도 언제든지 올라가고…” (p.309) 나는 정선교사를 한동대학에서 두번째 만났다. 2005년 9월 성경번역역선교회(GBT) 선교사로 한동대 아시아언어문화연구소(LARILAC) 소장으로 부임했을 때다. 아릴락(ARILAC)은 Asia Research Institute of Language and Culture의 약자다. 아릴락은 성경번역 및 기독교 문서번역, 다중언어교육 등 언어관련 사역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한국 성경번선교회(GBT), 한동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국제언어연구소, 그리고 한국 교회가 공동으로 협력하여 시작한 전문 훈련기관이다. 현재 오정현목사가 이사장직을 맡고있다. 2006년 봄 어느날 정선교사가 매주 화요일 아침 8시에 있는 교수기도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는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성경번역선교사로 수십년 동안 선교사역을 해 오고 있지만 정작 내 가족중 한사람인 딸에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로서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 딸은 첫 아이 예람이었다. 선교사로서 얼마나 마음 아픈 이야기인가? 당시 예람이는 한동대 1학년 학생으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듣고 있었다. 내가 예람이에게 아버지 정선교사가 교수기도회 간증시간에 말한 내용에 대해 물었다. 예람이는 이렇게 나에게 질문했다. “선교사 사역을 하면서 이리저리 맨 날이 이사 다니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통을 왜 선교사 자녀들이 같이 받아야 합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경영학을 전공해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 물었다. “그렇다고 네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되지 않겠어?” 예람이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화가 나서 부모님에게 그저 반항한 것 뿐이에요” 예문이는 한동대를 졸업, 결혼도 하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살아가고 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1-26

내가 체험한 신앙 모델들 3

나는 나의 믿음 생활에 전환점을 불어 넣어 준 스톤브레이커목사님을 1970년 겨울 피츠버그대학 교정에서 만났다. 당시 목사님은 이 대학에 유학 온 학생들에게 복음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필라델피아 U. Penn.대학원에서 Communications를 공부하다가 U. of Pittsburgh 대학원으로 전학, 살 아파트를 찾고 있었다. 목사님은 유학생들이 함께 살고있는 아파트가 있으니 와 보라고 해서 며칠 후 그곳을 찾아 갔다. 목사님이 유학생들을 위해 허룸한 집한 체를 세를 낸 아파트였다. 그 집에는 한국 학생 4명, 그리고 인도 그리스 나이제리아 등 10명의 유학생들이 살고있었다. 아파트 세는 다른데 비해 반값도 안됐다. 그런데 이 아파트에 입주조건이 있다. 수요일 저녁에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당시 웨슬리안 감리교회(Allegheny Wesleyan Methodist Church) 담임목사로 목회를 하고있던 스톤브레이커목사님은 이 아파트에 사는 유학생들을 위해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를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성경공부내용은 이 교단에서 새 신자들을 위해 마련된 ‘기초성경공부’(The Basic Bible Study)를 기준으로 한 신앙의 기초지식들이었다. 입주 유학생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성의껏 참석했다. 한국 유학색생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이 성경공부를 통해 나이제리아와 인도에서 온 2 유학생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1년 봄 필라델피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있던 아내가 피츠버그로 와서 우리 부부는 아파트를 따로 얻어 나갔다. 그리고 스톤브레이커목사님이 시무하는 웨슬리안 감리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한 70명 쯤 모이는 작은 교회다. 아내가 오기 전까지는 반공포로 출신으로 목회자가 된 현순호목사님이 담임한 피츠버그한인교회에 출석했다. 웨슬리안 감리교회 교인들의 보수적인 생활과 간증으로 시작하는 주일 예배는 나의 신앙에 큰 도전을 주었다. 교인들은 여름에도 짧은 바지나 셔쓰를 입지않고 TV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교인들의 대화속에는 유행적인 사회 이야기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주일 아침 예배는 한 20분간 간증의 시간으로 시작한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은혜로운 경험, 고통을 당한 경험, 기도를 부탁하는 간청으로 간증의 시간은 이어졌다. 나는 이 교회와 교인들을 통해 믿는 성도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 할 때에 교인들은 쓰던 세간살이를 모아 주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담임목사의 사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교회 비서는 목사 사모가 맡았으며 교회 청소는 담임목사가 맡았다. 나는 스톤브레이커목사님이 자동차 휴발유를 만 탱크 체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는 1960년대 후반 필라델피아에서 유학생활 동안 미국이민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이민 초기에는 걸어서 갈수있는 거리에 있는 미국장로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믿음은 별로 없고 더구나 직장과 공부때문에 몸이 핀곤한데도 아내 등살에 할수없이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이상 걸리는 필라델피아 최초 한인교회인 필라델피아한인교회(담임 오기항목사)에서 예배를 드렸다. 토요일 저녁만 되면 다음날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로인해 부부싸움도 가끔 했다. 그 때만해도 내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것 보다 예배후 친교실에서 식사를 하고 유학생들과 환담하고 탁구를 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피츠버그로 이사를 하면서 신앙에 변화가 온 것이다. 나는 피츠버그에서 공부를 마치고 취직이 되어 1971년 겨울에 볼티모어로 이사를 오고 아내는 석사학위를 마치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어서 이산가족이 됐다가 1972년 재회를 했다. 1974년 봄 스톤브레에커목사님으로 부터 교회 건물을 신축한다는 소식이 왔다. 우리는 본당 긴 의자 하나를 헌납했다. 우리 부부는 완성된 한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 건물을 1992년 봄에 방문했다. 스톤브레이커목사님은 우리 부부의 명패가 붙어있는 의자를 보여주면서 눈물이 글썽했다. 목사님을 통해 구원받은 유학생들이 모임을 갖고 뉴스 레터를 발간했다. 목사님은 1992년 74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20-01-23

‘오늘의 양식’을 여러 날 굶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해도 ‘오늘의양식’은 책자로만 발행됐다. 벧엘교회에서는 ‘오늘의 양식’ 전화 녹음선을 설치하여 누구나 ‘오늘의 양식’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교회 비서로 수고하고 있던 백숙자 선생이 전화녹음을 담당했다. 그래서 눈으로 읽혀지는 ‘오늘의 양식’은 들어지는 ‘오늘의 양식’이 되었다. 백숙자 선생의 목소리는 ‘오늘의 양식’을 읽을 수 없는 분, 병원 입원 환자, 노인분들에게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 방송망을 통해서 퍼져 나갔다. 워싱턴에 있는 한인방송과 기독교방송이 ‘오늘의 양식’을 전파로 내보냈다. “벧엘출판사가 제공하는 ‘오늘의 양식’을 보내 드립니다” 아름다운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타고 ‘오늘의 양식’은 널리 퍼져 나갔다. 김상복 목사의 음성이 한국 극동방송망을 통해 중국 소련으로 퍼져나갔다. 김목사는 매일 새벽 6시 ‘오늘의 양식’을 읽고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오늘의 양식’을 영어와 한국어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오늘의 양식’은 전 세계 34개국으로 우송됐다. 아프리카, 남미, 카나다, 중국, 소련, 유럽제국, 그리고 중동지방까지 기쁜소식을 담고 날아갔다. 중국 할빈시에 살고있는 김용선 선생은 목단강시에 있는 ‘조선인 교회’에 갔다가 ‘오늘의 양식’을 빌려보고 크게 기뻐했다. 김 선생의 편지 한토막을 여기 소개한다. “조선인 교회에 갔다가 유전도사님으로부터 ‘오늘의 양식’을 받아보고 며칠 동안 보고 또 보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상해에 있는 부일평 선생도 “다른 성도로부터 ‘오늘의 양식’을 빌려 읽고 이외의 기픔(그곳 사투리)이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라는 글을 벧엘출판사에 보내왔다. 또 ‘오늘의 양식’은 바다로도 나간다. 4개의 선원선교단체는 ‘오늘의 양식’ 통해 한국선원들에게 풍성한 영의 양식을 공급했다. “수십일 동안 바다에서 지내야 하는 그들에게는 ‘오늘의 양식’은 빼놓을 수 없는 영적 친구가 됩니다. 몇 분씩 때로는 십 여명이 본선에서 ‘오늘의 양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벨지움 브랏셀에서 한국선원들에게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안재국 선교사가 전하는 말이다.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의 양식’을 펴 읽습니다. 하루를 은혜속에서 보내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의 양식’을 읽게 해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바다에서 몇 달 씩 보내고 있다는 파나마선적 선박에서 일하는 한국 선원이 보내온 글이다. 그리고 ‘오늘의 양식’은 교도소도 찾아간다. “오늘은 동생이 보내준 ‘오늘의 양식’을 받아 봅니다. 너무 좋은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동료들과 나누어 읽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다음 주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 한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있는 분에게서 온 편지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날마다 ‘오늘의 양식’을 통해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간증등으로 꽉 찬 글이다. “오늘의 양식을 오랜동안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수감방 주소가 바뀌었으니 새 주소로 보내주세요” 이런 안타까운 편지도 받아본다. 오늘의 양식은 대학 기숙사로도 찾아간다. “기숙사 우편함에 ‘오늘의 양식’이 들어있는 것을 보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얼른 꺼내 첫날 분을 읽었습니다. 바쁜 유학생활 가운데 오늘의 양식은 빼놓을 수 없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를 날마다 대하는 기쁨, 그 기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요? 한 유학생이 보낸 편지속에는 자그마한 장미꽃 한닢이 수표 한장과 함께 담겨져있다. 이렇게해서 오늘의 양식은 오늘도 여러 사람들에게 세계 여러 곳으로 기쁜소식을 싣고 날아가고 있다. 어느덧 내년 2020년이면 발행 40주년을 맡는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12-01

[칼럼]중보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나는 벧엘교회에서 4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인들의 중보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는가를 여러번 체험했다. 신실한 하나님께서는 벧엘 식구들이 간절히 울부짖는 음성을 한번도 외면하시지 않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다. 대표적인 예가 유경범 집사와 윤석원 형제의 경우다. 유기원 유경범 집사 내외는 볼티모어 남부지역에서 그로서리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0년 2월 16일 아침 유경범집사는 홀로 상점에 있을 때 한 괴한이 둔기로 머리를 친 상처로 의식을 읽고 병원에 실려갔다. 그후 근 10년 동안 사경을 혜매는 어려움 중에 있을 때 중보기도팀은 말할 것도 없도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온 벧엘식구들은 유집사를 위해 집중적으로 중보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 <과꽃>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동요 과꽃 1절이다. 과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들꽃으로 겨울 추위를 잘 견뎌내는 특징이 있다.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으로 한국 어린이들이 즐겨 불렀던 동요로 지금도 많은 나이든 분들가운데 사랑을 받고 있다. 2019년 11월 2째주 주일예배 후 모였던 모세선교회에서 유경범집사가 최청자권사 피아노 반주에 마추어 떨리는 목소리로 이 동요를 불렀다. 따라 불렀던 참석했던 40여 명의 회원들은 끝날 때 환호의 소리를 지르며 큰 박수 갈채를 보냈다. 벧엘교회는 매주 두 번째 주일 예배 후 연령별 선교회 모임을 갖는다. 모세선교회는 80세에서 84세 사이 교인들의 모임으로 회원인 유집사는 남편 유기원집사와 함께 처음 이 모임이에 참석했다. 모세선교회가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집사를 과꽃 처럼 겨울 찬바람을 굳굳히 견디게 하신 은혜에 감사했다. <추수감사절 감사 제목> 늘 다른 사람 도움으로 하루하루 이어져가는 나의 삶에 뭐가 그리 감사한 게 있겠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제 저녁에 나의 삶에 생각보다 감사할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1. 지난 일년 동안 병원에 한번도 가지 않았음을, 2. 부모니과 동생 식구들이 건강하게 지낼수 있음을, 3. 폐렴없이 숨을 편히 쉴수 있음을, 4. 공부하는 동안 심한 욕창으로 고생하지 않음을, 5. 입으로 먹고 마실수 있음을, 6. 신학공부를 통해 훌륭한 신앙의 친구를 만나 교제 할수 있게 하심을, 7. 이 큰 머리로 학업을 열심히 좇아갈수 있는 열정을 유지시켜 주심을, 8. 부양할 자식이 없고, 잔소리 하는 아내가 없음을, 9. 주일마다 교회에가서 예배를 드릴수 있음을, 10.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삶속에 보내주심을 위 글은 윤석원 형제의 수필집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2018, 포이에마) 본문 중에서 발취한 대목이다. 이 글을 읽으면 모르는 사이에 윤형제의 감사하는 마음 속에 함께 동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할 제목들이 넘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시집 ‘마음은 푸른 창공을 날고’(코람데오, 2001)는 그의 신앙 성숙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윤형제는 1991년 스물 셋의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한 뒤 27년이라는 세월을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메릴랜드 콜럼비아 로레인양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24시간을 누워지내야 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용변을 보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신앙은 잊지 않고 있다. 벧엘식구들이 여러해 동안 중보기도를 통해 간구한 소원이 이루어진 증거다. 윤형제는 온라인으로 학사 학위를 마치고 지금 온 라인으로 목회학 석사과정을 밟고있다. 나는 주일마다 유경범집사와 윤석언형제를 만난다. 불편한 몸에도 늘 웃음을 잊지 않고 만나는 벧엘 식구들을 대하는 그들의 늘 밝은 모습에서 큰 영적인 도전을 받는다. 특별히 희생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돌보는 유경범집사 남편 유기원집사와 윤석원형제 어머니 이용기집사를 통해 또한 영적인 도전을 받는다. 집중적인 중보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금년 추수감사절을 마지하여 다시 감사를 드린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11-25

‘나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

2019년 11월 10일 주일 예배 후 오후 3시 벧엘교회 본당에서 “새 교회 개척을 위한 비젼 발표회”가 있었다. 발표자는 본 교회 부목사인 김동호목사였다. 김목사는 10여년 동안 벧엘교회를 섬긴 최장기간 목회자다. 300여명의 교인들이 본당의 자리를 메워 큰 관심을 보였다. 원래는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소예배실로 장소를 정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교인들이 몰려 본당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벧엘교회 모든 목회자들이 이 모임을 준비하는 모습속에서 동역자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가를 가늠 할 수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다. 김목사는 메릴랜드 로럴지역에 한어권과 영어권이 함께 어울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교회개척에 대한 동기 계획 비젼에 대해 차근 차근히 설명했다. 이를테면 10년간 정드렀던 벧엘의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마련해보려는 ‘이별 연습’이다. 참석자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축하며 기도드렸다. 벧엘교회 40년 역사상 본 교회가 처음으로 ‘자발적인 과정’을 통해 본 교회 목회자의 교회 개척을 주선하고 도와주자는 모임이다. 지난 40년 동안 벧엘교회 출신 목회자에 의해 개척된 교회는 모두 6교회다. 한어권 5교회 그리고 영어권 1교회다. 이 교회들은 벧엘교회가 나름대로 분쟁에서 시련과 역경을 당하고 있는 기간 중 모두 ‘비 자발적인 과정’을 거쳐 세워졌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벧엘 식구가 한 몸이 된것이다. 나는 이 발표회를 지켜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서 벧엘교인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1주일 전 11월 3일 주일예배 중 백신종담임목사가 광고를 했다. 벧엘교회가 김동우목사의 교회개척을 ‘자발적인 과정’을 통해 도와주는 동기와 이유를 설명했다. 이 설명은 지난 해 11월 교인총회가 통과시킨 특별한 안건에 근거했다. 백목사는 앞으로 벧엘교회가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목회철학에 따라서 그 실천의 출발점으로 포로미스센터 건축헌금액가운데 10퍼센트를 할애해서 어려운 선교사와 개척 및 작은 교회를 도와주자는 당회의 안건을 총회에 제출, 총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여러모로 그런대로 넉넉한 교회로서 ‘나누는 교회’ 목회 철학에 대해 목회진, 당회, 그리고 교인 전체가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이 철학의 첫 번째 실천으로 김동우목사의 교회 개척을 택한 것이다. 벧엘교회는 ‘나누는 교회’의 실천을 통해 앞으로 더 ‘건강한 교회’로 발돋음을 내딛인 것이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님의 관점, 목회자의 관점, 성도들의 관점이 공통점에 도달 할 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벧엘교회는 이번 기회에 ‘나누는 교회’ 정신을 통해 이 공통점을 잘 갈파한 것 같다. 이 정신에 따라 벧엘은 앞으로 더 어렵고 더 가난한 선교지와 교회들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벧엘교회가 재정적인 면에서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교인 수 2천여명에 도달하면서 공간이 너무 협소한 어려움을 겪어왔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여러 해 동안 협소한 트레일러에서 예배를 드렸고 주일 성경공부 교실이 부족했으며 교인 전체가 함께 친교를 나눌수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2018년 10월 벧엘교회가 5만 스퀘어 피트에 달하는 다목적 빌딩 ‘프로미스 센터’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어려움들이 많이 해소됐다. 아직 건축융자액을 안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눔의 교회’ 정신을 발휘하여 한 것은 바로 ‘건강한 교회’의 초석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벧엘교회문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교수 사회학박사

2019-11-18

시련 후 더 큰 은혜가 옵니다

1979년 봄 몇 가족으로 시작한 벧엘교회는 40년 후인 지금 2000여 명의 식구들이 되었다. 1988년 1월 28에이커 부지에 4만 스퀘어 본당건물을 봉헌했다. 벧엘식구들이 오랜동안 기도했던 다목적관이 10년 후 현실화됐다. 체육관 겸 친교실, 영어권 및 청년 예배실, 교육관, 주일학교 교실 등을 갖춘 5만 스퀘어 ‘프로미스 센터’를 준공, 2019년 6월 창립 40주년을 기념해서 초대 김상목 목사 그리고 4대 이순근 목사를 강사로 봉헌 예배를 드렸다. 그동안 일곱분의 담임목사를 비롯해 여러 목회자들을 보내주셔서 벧엘식구들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벧엘 식구들은 벧엘공동체를 통해 함께 예배드리고 교육받고 선교하며 서로 믿음안에서 교제하는 영적인 축복을 누려왔다. 벧엘 식구들이 서로 알고 사랑하게 된 연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다. 그러나 지난 40년이 늘 화평과 기쁨만이 연속되는 장밋빛 세월만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서로 갈등도 반목도 불평도 있었다. 짧은 시련 긴 시련 등이 이어지기도 했다. 시련이 올 때마다 하나님에게 기도로 매달렸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갈 길을 열어주셨다. 더 은혜롭고 축복된 길이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시련 후 더 큰 은혜가 옵니다”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시련은 은혜에 도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벧엘 공동체와 벧엘 식구들에게 많은 시련을 통해 훨씬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다. 시련을 당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혜아릴 수 없었으나 세월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이 연단을 통해 더 큰 믿음을 허락하셨다. 더 큰 은혜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게 하셨다. 우리는 과거 40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밝히 알 수 있었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또한 축복이다. 나는 벧엘의 40년 미래를 알길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런지 모르지만 과거처럼 시련을 통한 영적 훈련은 계속될런지도 모른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사회 조직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의 일반 조직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일반 사회조직은 기계적인 조직에 비해 교회는 유기적인 조직이 그 특징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살아있는 몸의 각 부분들이며 이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몸의 각 부분 부분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한 지체가 시련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시련을 당하고 한 지체가 은혜를 받으면 모든 지체가 은혜를 받는다. 유기체의 구성체들은 서로가 서로에 의존되어 있다.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기체의 머리다. 모든 몸의 부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인다. 지체의 어느 부분이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머리이신 예수님도 같은 아픔을 당하시리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며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고백하는 벧엘식구들에게는 또한 “시련 후 더 큰 은혜가 옵니다”라는 고백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몸은 한 지체가 아니요 여럿이라.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만일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냐?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 만일 그것들이 다 한 지체라면 몸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많은 지체이나 그럼에도 오직 한 몸이라.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며 또 머리가 발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그 지체들 곧 이것들에게 우리가 귀한 것을 더 풍성히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풍성히 얻나니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그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셨으니 이것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존귀를 얻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기뻐하느니라.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고린도전서12장) 허종욱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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