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를 바꾼 30인] 존 웨슬리 (1703-1791)
잠들어 있던 영국의 영혼을 깨운 감리교 창설자
웨슬리 당시의 영국교회는 이미 엘리자베스 여왕의 수장령 (1559년) 을 거쳐 국왕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성공회’ 조직으로 개편된 이후였다. 칼뱅주의를 따르는 개신교의 신학적 전통과 트렌트 종교회의를 거친 천주교회 신학 사이의 절충형태(via media)를 선호했던 영국 성공회는 1689년 발표된 관용정책을 통해 성공회 이외의 교회조직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열풍 또한 초기 감리교도들의 신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리적 논쟁이 아닌 복음 전도에 중점을 두고 회심과 경건한 성도의 삶을 강조하며 평신도들의 역할을 중시했던 경건주의 운동은 웨슬리의 신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존 웨슬리는 영국 엡웰쓰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성공회 목사의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웨슬리에게 신앙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엄격한 분위기에서 자녀들을 양육했던 어머니 수잔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기대와 관심을 받고 자란 존은 그의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 최고의 명문 옥스포드대학에 입학, 부모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웨슬리형제는 옥스포드에서 친구들과 함께 별도의 종교모임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계속했는데 이 모임의 성격과 프로그램이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함께 모여서 성경을 읽고 감옥과 사창가를 찾아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던 그들을 주변에서는 약간의 냉소적 의미가 담긴 ‘방법주의자들(Methodists)’이라고 불렀다. 감리교(Methodist)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웨슬리는 애초에 영국 성공회로부터 분리되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 의도는 없었다. 그는 1728년 성공회 사제로 안수를 받았으며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미국 조지아주의 인디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 받는다. 웨슬리의 선교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젊은 여인과의 스캔달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은 뒤 특별한 성과 없이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옥스포드 출신이라는 학벌, 성공회 사제직, 선교사로서의 경력 어느 것도 웨슬리의 심령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1738년 5월 24일의 기도모임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영적 체험을 한 이후부터 웨슬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뜨거운 체험’을 강조하는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 감리교회의 개혁운동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고백했던 웨슬리는 늘어나는 감리교회수에 비해 부족한 설교자를 충당하기 위해 평신도를 과감히 설교자로 동원했다. 또 성공회 교구제도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설교자 순회제도를 실시하는 등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가장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1791년 임종할 때까지 웨슬리는 신실한 복음 전도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쳤다.
감리교회는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소위 ‘감리교회의 세기’라고 불리는 19세기의 부흥을 거쳐 미국이 세계 감리교회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2000년 기준으로 미국에는 8백30만명의 감리교도들이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미국 전역의 감리교회에 속한 목회자수도 4만4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2천2백명의 선교사들이 100여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아펜젤러도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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