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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 <9> 경주(慶州) 이(李)씨

경주 이씨는 우리나라 두번째 대성인 1백여 본관의 이씨 가운데서도 대종임을 자부한다.

한국의 이씨는 모두 경주에서 나왔다는 것이 경주 이씨네의 자긍심이다.

후대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의 이씨들을 빼고 한국의 토박이 이씨들은 시조를 누구로 세우든간에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2천여년전 경주 박바위에 내린 경주 이씨의 시조 표암공 이알평에 닿을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신라의 모체인 서라벌 6촌 가운데서도 우두머리인 알천 양산촌장 이알평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이씨’, 곧 이씨의 비조이기 때문이다.

경주 이씨의 족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 시조 이알평이 서기전 177년 하늘에서 경주 동쪽 금강산의 한 봉우리 박바위에 내려 현재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하는 양산촌장으로 부족을 다스렸다고 신인탄강의 설화를 전하고 있다.

그는 6부촌장의 어른으로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화백회의의 의장을 맡아 여섯 마을을 이끌었으며 신라의 건국회의도 그가 주재했다고 한다.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거두어 기른 것도 그였으며 그는 신라 건국의 아버지, 박혁거세의 대부라는 것이다.

3대 유리왕 때 건국의 모체이자 원훈인 6촌과 촌장에게 한자식 이름과 성을 내릴 때 급량부대인 이씨로 성을 받아 후대 후손들이 발상지 경주를 본관으로 써 경주 이씨 가문이 열린다.

그 때 함께 성을 받은 최·손·정·배·설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성 중의 하나인 셈이다.

차성·협천·평창·가평·아산·재령·원주 등 많은 분종들이 경주에서 갈라져 나가 본관을 따로 쓰고 있으며 그 밖에도 이씨들이 원뿌리를 경주에 두고 있으니 경주 이씨가 이씨중의 큰집이요, 정통이라는 긍지다.

경주 이씨는 신라말 소판 벼슬을 지낸 소판공으로 불리는 이거명을 중시조로 삼는다.

시조에서 소판공까지 상대의 세계를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가 1백50여년 전 경주에서 분적해 간 협천 이씨 세보에서 기록을 되찾아내 소판공이 36세임을 밝혀내고 확실한 세계를 헤아리게 됐다.

현재 시조로부터 79대까지 후손들이 이어진다. 고려말부터 파가 갈려 중파는 70여 파로 나뉘나 크게는 11개 대파로 꼽는다.

그 가운데 백사 이항복을 낳은 상서공파를 비롯해 익제공파, 국당공파가 조선조 경주 이씨의 융성을 대표했다.

신라 이후 2천여년 동안 ‘기복 없는 융성’을 누려온 경주 이씨는 특히 13세의 어린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이후로 대대로 재상을 지냈다.

그중에서 18세 인흥은 신라 중흥의 인물. 무열왕으로부터 장혜왕으로 추봉됐다.

이씨가 두드러지기는 고려말 이후. 고려말의 대제학이자 외교가요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제 이제현(1287∼1367)이 고려 때의 경주 이씨를 대표한다. 그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개척자인 백이정에게서 배웠고 충숙왕 때 볼모로 가 있던 왕자(훗날의 충선왕)가 연경(현재의 북경)에 만권당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대규모 사설 도서관 겸 학술연구소를 세우자 그곳에 가 중국의 석학과 명류들과 사귀며 그 학문과 문장을 당시의 세계 무대에 떨쳤다.

1천여년 뒤 한말의 한문학 대가 김택영은 익제의 시를 “공묘청준하고 만상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까지 평가했다.

당시 고려의 외교문서는 모두 그가 기초했는데 그는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또 나라 사랑의 정성이 누구보다 뜨거웠던 충신이었다. 충숙왕 10년(1325) 간신 유청신 등이 원나라에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편입해 달라는 해괴망칙한 병합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익제는 분연히 나섰다. 원나라 조정에 글을 보내 고려의 주권을 역설하고 행성 설치의 부당성을 명쾌한 논리로 설파, 한심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매국 음모를 분쇄했다.

그의 용기와 지혜와 문장은 실로 ‘나라를 구한’ 셈이다.

충선왕이 원에 있으며 모함에 걸려 멀리 티베트로 귀양을 가게 됐을 때는 원의 요로에 글을 보내 그 억울함을 호소했다. 문장이 어찌나 감동적이었는지 원의 승상(총리) 배주가 적극 나서서 충선왕을 풀어 돌아오게 했다.

그는 귀양이 풀리기 전에 멀리 티베트까지 가서 충선왕을 만나 위로했다. 그는 공민왕 16년(1367) 81세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는데 무엇보다 그가 남긴 ‘익제집’ 등 여러권의 저서는 국문학상 보배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고려조의 경주 이씨 인물로는 문하시중을 지낸 이칭과 이치연 등이 높은 벼슬을 지내며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다.

조선조 현직(顯職)에 오른 이래는 이존오의 아들. 대사헌과 공조판서를 거쳤던 인물. 조선조에서 이씨들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유명한 ‘8별집’은 익제의 후손. 그의 7대손이 되는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사위. 장가든 뒤 첫날밤 그는 꿈을 꾸었다. 큰 자라가 나타나 “내 형제 8형제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꿈이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어보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여덟 마리를 사다 부엌에 두었다는 것.

공린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중 한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은 박씨 부인과 사이에 아들 여덟을 두었다.

이공린은 아들 8명에게 한문의 거북 구(龜)자 아니면 고기 어(魚)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혔다.

그런데 이중 세째아들이 갑자사화에 연루, 죽음으로써 첫날밤 자라 한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은 것을 가법으로 지켜온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상서공파의 후예다.

근세의 경주 이씨 인물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상설과 한말의 외부대신, 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있다.

이시영은 백사 이항복의 11세 손이며 이종성의 5대손으로 한말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다.

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갑성도 경주 이씨. 현재 경주 이씨는 재계를 비롯해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전 이병철 회장이 경주 이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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