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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콘스탄틴 대제와 니케아 종교회의

기독교공인과 삼위일체설 정립

 예루살렘 함락(A.D. 70)으로 기독교 중심지가 지중해연안 로마 문화권으로 이전됐지만 기독교에 대한 로마 황제들의 핍박은 여전히 계속됐다.

 그러던 A.D. 312년, 티버강의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의 젊은 장군 콘스탄틴이 이곳에서 막센티우스황제를 물리치고 로마황제로 등극, ‘로마제국=기독교’라는 등식을 만들어내면서 초기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콘스탄틴 대제(Contantine the Great)는 280년 경 나이스수스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로마 제국은 두 명의 시이저(Caesar)와 또 다른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사등분해 통치하고 있었다.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디오클레티안 황제와 가레리우스황제의 경호부대에 속해 있던 젊은 콘스탄틴은, 시이저였던 부친이 병으로 사망한 후(306년), 제국의 북쪽 변방에서 스스로 로마제국의 새 통치자임을 선포하고 정치적 경쟁자였던 막센티우스(Maxentius)를 폐위시키기 위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

 콘스탄틴의 군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나는 중대한 전략적 실수를 범하였다. 막센티우스와 일전을 앞둔 콘스탄틴의 전투병력은 티버 강 건너편에 주둔했는데,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바로 기원전 109년에 건축돼 지금도 사용되는 밀비안 다리다. 이곳에서 막센티우스는 또 다른 군사적 실책을 범하게 된다. 그는 밀비안 다리 옆에 또 하나의 임시 가교를 설치했는데, 콘스탄틴 군대에 밀려 일시 후퇴하던 막센티우스의 군사들이 임시가교가 무너져 전원 익사했기 때문이다. 막센티우스도 군사들과 함께 티버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초대 기독교에서 밀비안 다리가 중요한 이유는 막센티우스의 패배 보다, 밀비안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콘스탄틴 황제가 하늘에서 목격한 십자가의 환상과 “이 사인으로 인하여 너는 승리할 것이다”(HOC SIGNO VICTOR ERIS)라는 신비의 문구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비안에서의 이 신비체험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네로 황제부터 시작되어 디오클레티안 황제때 최고조에 이른 기독교 박해가 끝나고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가 숭배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고난의 종이 아니라 언제나 위대한 로마제국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정치적 구세주였다. 밀비안에서의 개종 이듬해, 콘스탄틴은 리시니우스(Licinius)와 함께 소위 ‘밀란칙령’을 발표하여 로마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식적으로 용인했다. 단순히 신앙의 자유만 허용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는 소위 ‘황제 기독교 시대’(Caesaropapism)가 개막됐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데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통일된 신앙체계가 로마제국의 정치·종교적 통일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제국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과 달리, 당시의 기독교는 두 가지 ‘이단’적 사상때문에 신학적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콘스탄틴에 의해 재편된 로마의 기독교 교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북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의 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일부 부정하였던 아리우스(Arius)의 신학이었다.

 316년부터 시작된 콘스탄틴 대제의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무력 탄압 정책은 321년을 기점으로 유화책으로 전환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순교를 신앙의 최고 영예로 삼는 도나티스트들에게 탄압정책을 쓰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아리우스에 대해서는 문제의 본질이 신학적인 것이었기에, 교회 전체의 의견이 모아져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제국의 사제대표들을 자신의 군대 막사 주변으로 불러모아 니캐아 종교회의(325년)를 개최했다. 물론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사상적 통일을 원하는 자신의 뜻에 따라, 성자 그리스도의 신격이 성부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ios)의 견해가 채택되도록 했다.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과 니캐아 종교회의의 신학적 합일점을 통하여, 초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학방향이 결정되었다. 본질상 동일하신 성부·성자·성령을 한 하나님으로 믿는 삼위일체론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기독교의 전통이 수립된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신학적 발전 뒤에서 우리는 로마 제국의 사상적 통일을 그토록 염원했던 콘스탄틴 대제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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