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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 <18> 문화(文化) 류(柳)씨

◇씨족의 연원

류경은 시조 태승공 류차달의 8대손으로 고려 고종 때 권신 최의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한 공으로 ‘위사일등공신’에 책훈되고 그의 고향인 유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유주는 문화현의 옛이름으로 고려 때는 유주현이 되어 유주 류씨라 부르기도 했다.

◇본관지의 연혁

문화 류씨는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지명이다. 고려 때 이름은 유주였으며 현종 때는 풍주에 소속시켰으며 예종 때 비로서 감무를 두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는데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1895년 군이 되었고 뒤에 신천에 예속되었다.

◇주요 세거지와 변천

문화 유씨는 시조 유차달의 5대조 유색이 신라 헌덕왕 초에 유주 구월산으로 은거해 자손들이 그곳에 터전을 삼고 거주하던중 개국하자 당시 수도인 개성으로 옮겨 대대로 살아왔다. 고려가 망하자 시랑공파 11세 류당의 손자 류광수와 류광원 형제는 지금의 창원군 남이면 등등산으로 옮겼으며 후에 류광원은 옥천산중으로 은거하여 후손이 창원군과 옥천 일원에 집단 거주하였다. 장령공파 13세 류휘가 초계군 성산리로 낙향, 후손이 그곳에서 줄곧 생활했고, 곤산군파 14세 류번은 고려말에 조선 개국파에 몰려 유배되었다가 후손이 대구를 중심으로 경산 등지에 살다 일부는 남원과 구례 등지로 이주하였고 23세 류창무의 자손은 밀양과 김해, 하동 등지에 생활하고 있다.

문평군파 13세 류소는 청주 수락동으로 낙향하여 주로 청주에 거주하고 있다. 조선조에 출사한 13세 유관의 후계는 수도인 한양에서 살다가 18세 류용공과 류용강이 영암 모산리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후손 중 일부는 여수 등지로 퍼져나갔다.

18세 류용양의 아들 류몽정의 후손은 충주 노은면으로, 18세 류영겸의 아들 유몽주는 황해도 백천군에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14세 류계문의 후손은 양평과 광주, 부안 등지에 거주하며, 류이문의 후손은 안악군으로 옮겼으며 일부는 보은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문숙공파 17세 류영석의 아들 류선종과 류덕종 두형제는 제천으로 이주했고 후대에 죽산과 서울 등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또 류희석은 제원군 청풍면으로 가서 터를 잡아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밖에 여러파들이 전국 각지역으로 흩어져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씨족사의 개요

문화 류씨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을 시조로하는 성씨이다. 류차달은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유주(문화의 당시 이름)의 호족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치러 남으로 정벌할 때 군량보급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때 류차달은 수례 1천량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했다. 그 공으로 대승이 되고 삼한공신에 봉해졌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는 통합삼한익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차달의 원래 이름은 해(海)였는데 태조 왕건이 이차위달(以車爲達) 했다고 하여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한다. 유차달 이전의 조상으로는 고조선말의 차무일, 그의 32대손으로 신라 애장왕 때 좌상을 지냈다는 차승색 등이 언급되고 있으나 역사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고 다만 문화 류씨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시조 류차달은 류색의 5대손이라 한다.

류차달에게는 효전, 효금의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효전에게는 본성인 차성을,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류성을 세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려 류씨와 차씨는 성은 다르나 같은 조상을 섬기는 관계가 되었다.

류씨는 문헌에 1백31개본이 전하고 있으나 문화 류씨를 비롯하여 풍산과 선산, 서산, 전주, 진주, 고흥, 본진주, 영광만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 고흥과 본진주, 영광를 제외하고는 모두 류차달의 9대손에서 분관된 것이다. 문화 류씨가 문화로 본관을 삼게된 것은 류차달의 8대손이며 고종조의 명신인 류경이 위사공신 1등이 되어 그 공으로 유주를 문화현으로 승격시키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이미 시조 때부터 류씨는 문화의 토착세력이었다.

문화 류씨의 분파는 고려말, 조선초에 활약한 인물들인 류차달의 11세와 13세, 14세손을 파조로 하여 15개파로 나누어진다. 문화 류씨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시호 28명, 상신 9명, 문형 4명, 문과급제 1백34명, 무과급제 2백79명, 생원과 진사 5백42명을 낸 명문이다. 문간공 류공권은 의종 14년에 등과해 명종 때에 추밀원사, 정당문학을 지냈으며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명신이다. 큰 아들 류언항은 예부상서판합문사, 둘째 아들 류택은 한림학사승지를 지냈다.

류경은 몽고가 고려을 칩입하고, 고려가 원에 항복하여 그 지배를 받게 된 고종, 원종조에 걸친 시기에 활동한 재상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에 올랐다. 당시는 최씨 무인정권기로서 최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1258년 류경은 김준 등과 협력,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돌렸다. 이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으며 문화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역임했다. 1270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서 반란군에게 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했다. 평장사판공부사, 검의시랑찬성, 검의중찬 등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나 신종과 희종, 강종, 고종 등 4대의 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수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류씨 가문을 논할 때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류성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문화 류씨가의 대표적인 절신으로 꼽히고 있다. 세종 26년 무년에 무과에 급제, 다음해 ‘의방류취’ 편찬에 참여했다.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 나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 나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현전 학사였던 류성원은 수양의 협박에 못이겨 정난공신을 표창하는 교서를 쓰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통곡했다고 한다. 그 후 류성원은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일이 탄로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성삼문의 나이 어린 딸을 몰래 데려다 숨겨 길러 며느리고 삼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일생을 은거한 류자미 또한 문화 류씨가 배출한 절신이다.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던 류근은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인종 원년 좌의정에 올랐다. 인종이 죽은 후 원상으로 서정을 맡았으나 명종 즉위 후 정권을 잡은 소윤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온양에 유배도중 사사되었다.

반계 류형원은 현종조의 유명한 실학자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1654년 신사시에 합격,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665년과 다음해 학행으로 각각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여주 등지에 옮겨 살다가 1668년 부안현에 정착한 후 저술과 학문연구에 전심하면서 여행을 즐겨 수차 전국을 유람했다. 그는 실사구시의 학풍이 시작되는 맹아기에 실학을 학문으로서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자신의 농촌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불합리한 사회제도 개혁과 경제적 혁신을 조선과 중국의 약사적 문헌에서 고증하며 정밀한 실증적 태도로 방법론을 제시, 유교적인 윤리와 정치의 시정을 사회개혁의 전제로 하여, 이를 경제적 관계에 결부시켜 국가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 이밖에 북학파의 류득공이 류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이며 일제침략의 민족항쟁기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유상열과 유동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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