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사건] 10. 신약성서의 정경채택
로마제국 아닌 시리아서 먼저 채택돼
예를 들어 2세기 초반 동안 로마교회의 지도자였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바울서신을 자주 인용했지만, 사복음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바울서신을 언급했지만, 편지의 이름이나 출저를 확인하지 않은 점을 볼때, 그가 인용한 바울서신 역시 2세기 초반까지 문서의 형태가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져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교회의 전통에 도전하던 각종 이단시비와 맞물려 급변하기 시작한다. 전통적 교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말은 곧 정통에 도전하는 이단적 사상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단적 사상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교회의 전통을 수호했다. 첫째는 니캐아 종교회의 등을 통해 정통 신학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둘째로는 신약성서의 정경채택을 통해 이단 시비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파피아스와 폴리갑의 시대, 즉 2세기 중반 동안 초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이단자들은 영지주의자(Gnostics)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보다 앞서 복음서의 일부 내용을 자신들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산상수훈의 내용이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등을 영지주의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자, 초대교회는 이런 영지주의 이단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복음서의 내용을 정경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구약성서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던 2세기 중반의 이단자 마르시온(Marcion)의 도전도 신약성서의 정경화를 서두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의 서신중 10개만을 받아들이고 사복음서 중 누가복음을 유일하게 정경으로 인정했던 마르시온의 도전 앞에(144), 교회는 공식적인 정경에 대한 입장을 제시해야만 했다. 이단자 마르시온이 먼저 일부 성서를 정경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초대교회에 큰 자극이 되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이단 몬타니즘(Montanism)의 등장도(156년) 초대교회가 정경채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교권을 부정하고, 로마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계속했던 이 이단사상을 막기 위해 정경의 채택을 통한 정통의 확립이 절실히 대두되었던 것이다.
2세기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신약성서의 정경화는 급물살을 타게된다. 특별히 로마에서 활동했던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미 135년경에 기록한 <유대인 트라이포와의 대화> 에서 복음서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복음서를 ‘사도들의 회고록’이라고 표현한바 있다. 비록 저스틴은 한번도 바울서신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 타이탄(Taitan)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사복음서가 교회의 정경으로 채택된다.
특이한 점은 이 최초의 복음서 채택은 로마제국안의 기독교에서가 아니라 시리아 교회에서 먼저 공식화된 것이다. 저스틴에 의해 로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타이탄은 자신의 시리아교회로 돌아가서(172), 각종 개혁적인 정책으로 교회를 갱신함과 더불어 사복음서를 시리아 교회의 공식 경전으로 채택했다. 이를 우리는 ‘타이탄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 of Taitan)’이라고 부른다. 3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이었다. 오리겐은 최초의 신학책으로 불리는 <원리에 관하여> (De Principiis)에서 구약과 더불어 ‘신약(New Testament)’이라는 경전의 존재를 분명히 언급했는데, 타이탄의 사복음서가 정경으로서 정통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244).
초대교회는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반까지 로마황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황제 디오클레티안과 갈레리우스의 기독교 탄압정책이 시행되는 동안 수많은 기독교문서들이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서탄압을 견디면서 교회의 전통을 유지 할 수 있는 방법은 정확한 경전의 확립과 보존이었다. 따라서 2-3세기동안 이단적 사상의 도전을 받아서 서서히 경전의 모습을 이루어 가던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신약성서의 경전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363년, 초대교회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의 정경을 채택하기 위한 회의가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다. 당연히 예루살렘의 감독 시릴의 영향을 받아 <요한 계시록> 을 뺀 지금의 신약 성서 26권이 교회의 정경으로 채택됐다. 이러한 363년의 결정은 4년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최종적인 결말을 보게된다. 부활절을 포함한 기독교 절기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통보하기 위한 아타나시우스의 편지(Festal Epistle)가 367년 이집트의 교회로 우송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중 <요한 계시록> 을 포함한 지금의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약 300년동안 진행되던 정경채택을 둘러싼 논쟁이 일단락되고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 성서 66권이 최종적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66권으로 구성된 신구약 성서가 기독교의 경전으로 정착된 직접적 동기는 아타나시우스의 공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66권의 성서가 정경으로 정착된 것은 히포의 대주교 어거스틴의 후원과 384년 제롬에 의한 라틴어 번역이 중세교회에서 공식 성서로 사용되면서부터다. 393년 히포(Hippo)에서 열린 종교회의와 397년과 419년 두차례에 걸친 카타지 종교회의에서도 27권의 신약성서가 정경으로 다시 인정되었다.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