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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 <27> 파주(坡州) 염(廉)씨

한국 사실주의 문학에 금자탑을 쌓은 염상섭과 독립운동가 염온동으로 대표되는 염씨는 고려조의 명문거족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담양과 개성, 순창 등 70여개 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모두 분파 세거지를 말할 뿐 실은 파주 염씨 단일본이다.

파주 염씨는 옛날엔 서원 염씨라 했고 요즘도 나이든 어른들은 종종 서원 염씨라 부르고 있다.

서원은 파주의 옛 이름. 1504년(연산군 10년)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도 파주로 바뀌었다.

시조 염형명은 원래 중국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예. 당나라 후기 때 국정의 어지러움을 비관하고 신라로 건너와 봉성(현 파주)에 자리잡은 뒤 삼한공신을 지내면서 염씨네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자손이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 고려의 국력신장과 함께 파주 염씨의 가세도 크게 번성했다.

그의 손자 염가칭은 병마사로 서북면을 지켰다. 1010년 거란의 침입으로 서북이 함락되고 염형명 부자가 함께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지절을 굽히지 않으니 적이 충절에 감동,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전한다.

46년이 지난 1056년 문종왕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전답을 하사받았다.

염가칭의 아들 한은 문종 때의 이름난 무신. 당시 경주 지방에 침입해 온 동여진을 토벌했으며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염한의 후손 염신약은 명종 때의 명신으로 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장서기가 되고 부친상 때 3년간 여막에서 살아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1178년 서북면 병마사로 조위총의 반란을 집압하였고 특히 학문이 깊어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효.

염승익은 충렬왕의 총애을 받아 벼슬이 도검의중찬에 이르렀고 이 분이 파주 염씨 중흥 1세조 염제신의 할아버지다.

충경공 염제신. 그는 여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한 살 때 원나라에 들어가 평장사로 있던 고모부의 집에서 자랐다.

원나라 태정황제의 총애를 받아 측근에서 시종하다 충숙왕 때 원의 정동성랑중이 되어 본국에 돌아왔다.

당시 원나라의 벼슬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자들이 많았으나 그들의 행동을 억제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고 뒤에 충목왕과 충정왕 때 여러 벼슬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정승이 되었다.

그 무렵 기철 일당이 원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공민왕은 그들을 숙청하면서 원나라의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염제신을 서북면 도원사로 삼으니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수축하고 군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수문하시중이 되었는데 요승 신돈과 간신 김흥경 등이 여러차례 모함했으나 공민왕은 끝까지 그를 신임했다.

그는 39년간 5명의 왕을 섬기면서 출장입상한 공으로‘서성수의동덕보리공신’으로 추대되고 공민왕이 친히 그린 영상을 하사받았다.

염제신에겐 아들 3형제가 있었다. 맏이 국보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에 봉해졌고 둘째 흥방은 공민왕 6년 문과에 장원급제, 좌대언을 지냈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하고 번성했던 염씨 문벌은 고려의 운명과 함께 빛을 잃기 시작했고 이에 염흥방 사건이 겹치면서 멸문의 참화를 입게 되었다.

중흥 1세조 염제신의 둘째 아들 흥방은 홍건적을 쳐서 2등공신에 올라 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1374년엔 제주도‘목호의 난’을 전라경상도병마사로서 진압, 삼사좌사가 되는 등 조정의 막강한 인물이었다.

당시 조정은 이인임이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던 때였고 그의 심복 임현미와 더불어 흥방은 많은 문신을 몰아내고 자기 파를 요직에 배치했다.

결국 우왕이 이들의 전횡을 막기위해 최영과 이성계에게 은밀히 명을 내려 임현미 등 50여명을 잡아다 죽이고 이인임을 귀양보냈다.

이어서 염흥방과 형제를 죽인 뒤 가산을 몰수하고 처와 딸을 종으로 삼았으니 염씨 가문은 멸족의 화를 피해 8도로 분산, 겨우 가문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후세 염문들의 평가는 또 다르다. 아버지 염제신이 30년을 한결같이 문신으로 때론 무장으로 풍찬노숙하며 지켜온 고려의 운명이 낙조처럼 기우는 것을 그 아들들이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보 3형제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이성계 일파와 항쟁하다가 날조된 죄상으로 희생당했다는 주장이다.

“두문동 72현 가운데 우리 염씨도 끼어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세상을 등졌던 성씨가 72개나 되었다는 게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단면일 수 있지요.” 출판사 일신각 대표인 염남섭씨는 선대 어른들이 성을 바꾸지 않고 본을 바꿨다며 용담 염씨니 순창 염씨니 하는 것이 그 당시에 영향을 받았거나 선대가 터를 잡았던 세거지명으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 홍립과 함께 영남 성개에서 대전공을 세운 염세경과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무찌른 염말경,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옥포와 한산싸움을 승리로 이끌다 추풍령 싸움에서 순군한 염언상 등이 호국에 몸을 바친 염문들이다.

그러나 이조에 들어서도 한번 꺼졌던 영화의 불길을 되살리지 못한 채 인조 때 염우혁이 문과에 급제, 장영을 지냈을 뿐 뚜렷한 인물을 찾을 수 없다.

근세 인물로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했던 염온동이 빛난다. 그는 3·1 운동 때 세차례나 투옥되면서 남만주를 내왕했다.

21년 상해로 건너가 전차 수표원으로 생활하며 항일투쟁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격투 끝에 탈출하였고 중일전쟁 때는 중경에서 임시정부 서무과장과 광복군 사령부 서무과장으로 일하다 병사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05년 홍성에서 봉기하여 활약하다 같은해 6월 4일 체포돼 순국한 염석산씨, 영월 출신으로 의병으로 나선 염중희씨, 언론인으로 1919년 3월3일 논산에서 1만2백여매의 태극기를 만들어 논산 보통학교 학생과 군민에게 배포하다 외경에게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해 사망한 염승필씨, 광복군대원으로 1920년 11월 동지 17명과 입국했다가 갑산대평리에서 전사한 염흥미씨 등이 염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제야’ ‘만세전’의 작가 염상섭(1897∼1963)은 염문이 낳은 문단의 큰 별.

28편의 장편과 1백48편의 단편 등 방대한 작품을 남긴 횡보는 일생을 문학과 신문의 정론직필에 바치며 그가 살아온 시대의 고독을 술로 격려해온 산문정신의 구도자였다.‘횡보’는 술만 마시면 갈지자로 걷는다 하여 스스로 붙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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