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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마테오 리치의 베이징 입경

유교를 기독교와의 접촉점으로 간주

 1580년, 두 명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 중국 광동성의 번화한 도시 차오칭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 말기의 황제 신종(神宗)의 철저한 쇄국정치로 외국인의 입국과 통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던 때였다. 번잡한 차오칭의 거리는 파란색의 눈을 가진 색목인(色目人)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의 이름은 미셀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인도 동남부 해안지역과 일본 선교의 문을 열었던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프랜시스 자비에르때부터 이미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현지의 토착문화를 존중하고 상위계급을 먼저 접촉하는 소위 ‘위에서 아래로’ 선교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또한 서양의 진보된 과학문물을 소개하면서 기독교의 복음과 유럽의 발달된 문명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간접 선교방법도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 최고의 인문과학분야의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마테오 리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새로 설립된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인문지리교육을 받았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 본토에 입국한 후 제일 먼저 착수한 선교사업도 다름 아닌 세계지도의 제작이었다. 오대양 육대주의 세계지도를 중국 지식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서양의 진보된 과학을 기독교와 연관지움과 동시에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명나라 지식인들의 일방적인 중화사상에 일침을 가하는 고도의 선교전략이었다.

 리치가 1583년에 제작한 <곤여전도(坤與全圖)> 라는 세계지도와 이듬해에 제작한 보다 정교한 <산해여지전도(山海與地全圖)> 는 광동성의 중국인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 유럽 선교사에게 점점 매료되기 시작했다. 선교사 리치는 이들 광동성의 사림(士林)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명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전통 유교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다. 광동성에서 일어난 중요한 선교정책상의 변화는 그때까지 선교사들이 입고 있던 불교승려의 가사(袈裟)를 벗고 유교 사대부의 선비복장을 입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독교와 중국문화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것이다.

 광동성에 머무르는 동안 리치는 클라비우스의 <기하학> 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기하원본(幾何原本)>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으며, 1591년에는 최초로 유교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리치는 10년이 넘도록 그곳에 거주하며 중국 사대부들과 친분을 넓히는 동시에 유학 연구에 정진하고 있었지만 황제를 포함한 상류층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다는 원칙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 수도 베이징으로 가서 직접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1595년, 리치는 잠시 베이징을 방문하였지만 왜구의 침입으로 시작된 조선의 임진왜란때문에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난징(南京)으로 급히 거처를 옮겨 1598년까지 그곳에 머무른다. 베이징과 더불어 명나라의 양대 수도였던 난징에서 리치는 고위직 사대부들과 황제의 친족들과의 교류를 더욱 넓혀갔다. 그들의 요청으로 유럽의 윤리덕목을 소개하기 위해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de amiticia)> 를 중국어로 번역, <교우론> 이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베이징을 향한 마테오 리치의 줄기찬 노력은 1601년 1월 24일 마침내 성취되었다. 외국인의 중국 출입을 관장했던 예조판서의 특별조치로 리치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베이징 체류가 허용됐다. 특별히 황제에게 선물로 헌정한 자명종이 고장날 경우를 대비해서 시계기술을 가진 선교사가 항상 상주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자명종 덕분에 마테오 리치는 1610년 사망할 때까지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 평소의 소원대로 중국 상류층에 대한 선교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토록 원했던 황제를 직접 알현하지는 못했지만 리치는 베이징에서 10년동안 거주하면서 동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1603년 베이징에서 출간된 <천주실의> 와 1608년에 초판이 출간된 <기인십편> (畸人十篇)이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에서 기독교의 하나님(Deus)과 중국 유교의 절대신인 ‘상티(上帝)’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혔다. 리치는 먼저 유교 고전에서 상티가 어떠한 신격을 가진 절대신이었는지를 고찰한 다음, 고대 중국 유교의 절대신이었던 상티야말로 유럽의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임을 주장하였다. 이를 리치는 “수많은 고전을 검토한 결과 상티는 결국 우리가 믿는 하나님(天主)이며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다(歷觀古書 而知上帝與天主特異以名也)”라고 표현하였다.

 2천년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시도한 중국 유교의 절대신과 기독교 하나님과의 동일화 작업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신학적 발상이었다. 선교지 현장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해야한다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흔히 잡신이나 우상으로 간주되던 선교지 토착종교의 절대신과 기독교 하나님을 동일시하였던 마테오 리치의 혁신적인 발상은 기독교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지식인들과 동아시아의 유학자들에게도 이 문제는 심각한 사상적 도전이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리치의 이 동일화 작업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상티’를 리치가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도적질하여 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혼돈으로 몰고 갔던 17-18세기의 전례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으로 이어졌다.

 명나라 말기의 중국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기독교를 소개한 마테오 리치는 복음이 어느 정도까지 선교현지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선교학적 물음을 남겼다. 유교의 절대신을 사악한 이방인의 잡신으로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접촉점’으로 보았던 리치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는 유럽이라는 지역적 범위를 넘어서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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