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역사를 바꾼 30대사건] 위대한 선교의 세기-19세기
기독교의 세계종교화 첫걸음
18세기동안 가톨릭 교회의 해외선교는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6세기부터 가톨릭 교회의 선교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강제 해산된 것(1773년)이 직접적인 영향이라면, 당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계몽주의 정신은 가톨릭교회의 해외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아프리카 정글의 원주민들이 서구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백지상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왜 기독교라는 생소한 유럽의 종교를 그들에게 주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의문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중국과 인도에서 진행되었던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 역시 가톨릭 교회의 해외선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례논쟁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이 선교현지의 문화와 언어로 토착화되는 것과 원주민들에 의한 교회의 자체적 운영이 거부됨으로써, 세계 각국에서의 선교활동에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윌리엄 캐리의 인도 캘커타 선교부터 시작된 현대적 의미의 개신교 선교는 19세기 초반에 설립된 각종 선교단체와 더불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최초로 설립된 침례교선교회(BMS, 1792년)를 위시하여, 초교파 선교단체였던 런던선교회(LMS, 1795년), 미국 국제선교 본부(ABCFM, 1810년), 독일 복음주의 계통의 바젤선교회(1815년), 영국 성공회선교국(CMS)등이 순차적으로 결성되면서 이들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선교는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의 팽창과 시대적으로 맞물리면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이 진행되던 곳에 언제나 먼저 교회가 세워지고 서구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서구 제국주의의 사냥개’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특별히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흑인노예 매매제도는 기독교 선교의 직접적인 장애를 초래하는 기독교인의 양심의 문제로 떠 올랐다.
퀘이커 교도들과 감리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에 의해 노예 매매 제도에 대한 신앙 양심에 기초한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계기는 영국의 복음주의자였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th, 1759-1833)와 런던 근교에 살고 있던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었던 클래펌 섹트(Clapham Sect)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감리교회의 설립자 존 웨슬리의 마지막 편지도 노예제도의 폐지를 촉구하고 영국하원에서의 노예제도 위법결정을 지지하기 위해 윌버포스에게 씌여진 편지였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서 1807년 영국 하원의 결정에 따라 노예매매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1838년에는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위법성이 확인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에 등장했던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s)’ 이론은 기독교 해외선교에 또 다른 영향을 미쳤다. ‘고귀한 야만인’이론이란 미지의 세계에서 원시시대의 ‘자연 상태’로 살고 있는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서구 문명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고귀한’ 존재라는 견해였다. 그들이 ‘고귀한’ 상태로 살고 있다면 왜 그들에게 유럽의 종교를 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함께 제기되었다. 사실 이러한 ‘고귀한 야만인’ 이론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과 유럽문명의 오염에 대한 경계심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규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귀한 야만인’이론은 특별히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전래 이전의 이방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까지 확대된 이들의 선교신학은 복음의 절대성까지도 부정하는 혼합주의 성격으로 발전되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인물이었던 공자나 맹자가 진실한 기독교 신앙 가운데 살았던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선교사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고귀한 야만인’ 이론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선교신학은 ‘인간성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선교신학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한편 19세기 미국의 북동부에 거주하던 백인 남성 지식인 사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백인남성의 책무(White Men's Burden)’에 대한 심각한 선택의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이 땅에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백인 남성들의 이 선택의식 또한 19세기 해외선교의 열풍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던 미국 최고의 지성인들이 이러한 ‘백인남성의 책무’라는 시대정신에 고양되어 해외선교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19세기 후반의 기독교 선교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백인 남성 지식인들의 선교 자원운동은 ‘학생 선교자원운동(Students Volunteer in Mission)’으로 발전되면서 20세기 초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YMCA도 이러한 시대맥락에서 출발한 기독교의 청년운동이었다.
19세기동안 활발하게 진행된 해외선교의 또 다른 특징은 평신도 중심의 에큐메니칼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파와 교단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원은 19세기 해외선교의 현장에서 출발한다. 선교 현지의 초교파 활동은 일정한 선교지역에서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과다한 경쟁을 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비효율과 분쟁을 없애고, 교단 선교사들간의 상호협력을 통한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라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역 선교대회(Mission Conference)를 통하여 선교현장의 도전과 현안 문제를 함께 협의함으로써 경쟁적 관계에 있던 선교사간의 화목이 다져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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