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38 신안(新安) 주(朱)씨
신안 주씨는 중국의 대유학자 주자의 증손인 주잠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주잠은 남송 사람으로 몽고가 침입하자 오랑캐를 섬길 수는 없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1244년 고려로 망명, 귀화했다. 주자의 고매한 학문적 성취와 잠의 망명 동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안 주씨 가문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권세와 부귀를 등진 채 성리학을 개창한 석학의 후예답게 고고한 가풍을 세워왔다.신안 주씨들은 몽고의 핍박을 피해 한동안 신안이란 본을 숨기고 살며 사는 곳에 따라 본관을 따로 쓴 까닭에 45개 파로까지 갈렸으나 조선 고종 때인 1901년 주석면의 상소로 인해 신안 주씨로 통일됐다.
본을 숨겨야 할 정도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고 구한말에는 주석환 등 독립투사도 많이 배출하는 등 기개가 꺾이지 않는 삶을 유지했다.
시조 주잠도 남송의 한림원 태학사로 몽고의 침입으로 조정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항전을 주장한 기개있는 선비였다. 문약에 흐른 송나라 조정의 우유부단으로 마침내 몽고의 신하가 돼야 할 위기에 처하자 아들 여경과 문하생 엽공제 등 7명을 데리고 고려로 망명한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몽고에 끝까지 저항해 싸우려는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던 터여서 잠은 이를 흠모한 것으로 전해진다.
잠은 고려에 망명한 뒤 고려와 송이 힘을 합쳐 몽고와 싸우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몽고의 세력은 이미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휩쓸 만큼 막강해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송을 무너뜨리고 중원의 주인이 된 몽고, 즉 원나라는 고려에 잠의 압송을 요구했다. 잠은 이 때 이름을 적덕으로 고치고 능성(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은둔했다. 본관인 신안도 쓰지 못하고 능성을 사용, 능성 주씨가 됐다.
그 후 아들 여경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올랐고 그의 아들 열(문절공) 또한 뒤를 이었다. 주열은 천성이 활달하고 검소한 데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원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원종 때 충청·경상·전라안찰사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충렬왕 때 1품직인 지도염의부사에 이르렀고 능성군에 봉해졌다. 특히 주열은 충렬왕 2년 조정사신으로 원에 파견돼 쿠빌라이가 요구하는 일본 공략에 필요한 선박공출과 여자 2천명 차출을 없던 것으로 원만하게 처리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주열에게는 인장·인원·인환 등 3형제가 있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이들의 후손이 능성·웅천·전주파로 각각 갈려 나간다.
고려 때 예부상서와 병부상서를 역임한 인장과 인원 형제의 후손은 이성계가 개국을 하자 새 왕조에 충성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또다시 박해를 받게 되고 주씨들은 벼슬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인장(능성파)의 후손은 전남지방에, 인원(웅천파)의 후손은 대구·경주 등 경상도 지방에 흩어져 살며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을 하는 전통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막내 인원(전주파)만은 일찍이 이태조의 고조부 목조와 함께 전주에서 함경도(당시 원나라가 통치)로 옮겨 산 인연을 맺어 그 아들 단은 이태조의 왕고모부가 되는 인연을 맺었다.
단의 증손자 인(안천군)은 이태조와 죽마고우로 형제같이 자란데다 혈연관계도 있어 위화도 회군 등에 행동을 같이 함으로써 조선의 개국공신이 됐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 한성윤을 지내는 등 이태조의 오른팔 노릇을 했으나 태종의 등극으로 이태조가 함흥으로 떠날 때 동행하면서 시련을 맞았다.
조선조 때 주씨 문중의 문과 급제자는 모두 31명으로 그 가운데 22명이 인환의 후손인 전주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관대작은 한 사람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미관말직에 머물고 말았다.
종친회 관계자는 “3대 동안 과거 급제자가 안 나오면 양반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3대에 1번씩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기는 했으나 등용이 안 돼 함경도 참봉의 25%가 신안 주씨였을 정도”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이태조의 측근인 데다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이태조 복위를 노리고 거병했을 때 주씨 일족이 동조했다고 해서 태종은 주씨 일족을 쓰지 않았다. 개국공신인 안천군 인을 해치지는 못했지만 조정에 두지 않았고 이후부터 주씨를 등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굳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3대관삼장으로 불리는 전주파의 22대손 주정(숙종조 예정)·형리(숙종조 장령)·중순(영조조 예좌) 등 3대가 차례로 초시·복시·전시에 장원을 했으나 제대로 등용을 하지 않자 후손 주원호는 ‘과거를 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국난이 일어나면 의연히 일어나 의병으로 선봉에 서서 적과 싸웠다.
주몽룡은 능성파로 빛을 못보는 종파였으나 무과에 급제, 금산군수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강덕룡·정기용과 함께 거창 우지현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워 왜적을 격파, ‘3용’으로 불리기도 했다.그는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부장으로 창녕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1602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유명한 의기 논개도 신안 주씨. 그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안고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몸을 던지는 애국혼을 발휘했다.
조선 인조 때의 주남로는 조정의 당파싸움, 유림의 공리공론에 염증을 느끼고 ‘성리학의 진정한 의미를 찾자’며 이용후생의 새 학문을 개척, 북학파의 선구가 됐다.
주대축은 을묘왜변·임꺽정의 난·대흉작·유림의 이론투쟁 등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향약을 한글로 번역, 강의를 하고 ‘사문계’란 장학재단을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을 쓴 실학자로 명성이 높다.
한편 구한말부터 일제에 이르러서는 주진수·주기철·주용규·주석환·주종기 등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주진수는 일찌감치 개화운동으로 투옥, 독립협회 및 관동학회의 회원이 됐고 울진에 만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하다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그는 임정에도 참여하고 1926년 러시아에서 열린 민족혁신과 대표자회의에 대표로 참석한 뒤 고려혁명당 조직에 가담하는 등 광복을 위해 싸웠다.
주기철은 웅천에서 남학회를 조직,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3·1운동 때 시위를 주동한 뒤 목사가 됐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앙구국에 헌신하던 주기철은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순교했다.
주용규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툭하 주종기는 조만식과 더불어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일제의 경제착취에 항거하다 중국에 망명했다. 귀국 후에는 함남중 건립 등 육영산업에 힘썼다.
주석환은 1920년 만주에서 정의단을 조직해 각처에서 모금한 대규모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기도 했다. 그는 평남 도청·평양부청·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파괴했고 일본경찰과 대성리에서 교전을 하다 체포돼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1년 출옥했다.
한편 주태경은 일제 때 이화여전을 구한 여류 교육자. 진주 출신인 그는 남편이 죽자 원산에서 장사를 시작, 벽돌공장으로 돈을 번 후 1940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원조가 중단돼 재정난에 빠진 이화여전에 전재산 10만원을 쾌척했다. 현재 이화여대 교정에는 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동경대를 나와 건설부장관·서울대교수·서울신문 주필을 역임한 주원박사는 주자의 31대손으로 독립운동가인 주종기의 아들.
이와 함께 주영하·주강·주정지·주종원·주명건·주정일·주종환 등 성리학의 가문답게 학계에서 활약하는 인사들이 특히 많다.
경성제대를 졸업, 대법원판사·중앙선관위장·헌법위원장을 역임한 주재광과 주운화·주대경 등이 대표적인 법조계 인물이다.
시인이면서 부흥부·상공부장관을 지낸 주요한도 신안 주씨이며 제헌의원인 주기용도 마찬가지.
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사로는 주창균·주진호·주영연·주영화 등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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