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기자칼럼]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이주현 생활경제부 기자

90년대는 참으로 쓸쓸했다.

80년대 선배들이 ‘신식민지 군사독재 땅에서 연인과 손잡고 걷는 것조차 치욕’이라며 자신의 신념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면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90년대 초 대학가는 출구없는 뫼비우스 띠마냥 혼란스러웠다.

어느 하나 확실한 것 없는 그 혼돈의 시대를 통과하느라 청춘의 몸과 머리는 신열에 들떠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은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랬다. 참으로 쓸쓸한 시대였다.

그시절, 그보다 더 쓸쓸한 풍경은 ‘머릿속에 든 불온한 사상’ 하나로 법의 심판대에 선 이들을 목도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미명아래 한 인간의 철학과 세계관은 대한민국이 원하는 잣대에 의해 이리저리 난도질 당하고 사법 처리를 당해야 했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는 길 가는 나그네를 유인해 쇠침대에 눕혀 나그네의 몸이 침대보다 짧으면 팔, 다리를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몸이 침대보다 길면 긴 만큼 잘라버렸다고 한다. 머릿속의 생각도,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도 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눕혀졌다. 내 신념과 사상하나 맘대로 사유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은 지금 송두율 교수를 둘러싸고 떠들썩하다.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선 해방이후 최대의 간첩사건이라며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송교수와 국정원의 주장중 어느것이 맞는지, 그가 사법처리를 받을지, 강제 국외추방 당할지 솔직히 그건 내 관심 밖의 일이다.

그의 고단한 옆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프로크루테스 침대 때문이다.

30년을 경계인으로 살아온 그의 머릿속은 다시 한번 ‘참여정부’의 프로크루테스 침대위에 눕혀졌다.

‘국민의 정부’ 시절 송교수는 고국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전향서’를 쓰지 않아 무산됐다. 현 사법당국 역시 전향서 내지는 준법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도대체 뭘 전향하라는 것인가. 그것도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철학자를 대상으로 지금까지 당신의 생각이 틀렸으니 우리 정부가 ‘검’자 도장을 흔쾌히 찍을 수 있는 그런 사상으로 머릿속을 다시 한번 전면개조 하라는 것인가.

인간의 사상은 결코 정육점에 걸려 있는 소고기나 마켓에 있는 옥수수 가루가 아니다. 그 누구도 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검열할 순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행복할 권리와 양심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신념은 양심이다. 국가보안법을 지키기 위해 양심을 팔라고 강요하는 것은 상위법인 헌법을 어기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30년이 넘는 세월동안의 송교수의 사유를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로 재기엔 한국 현대사의 세월이 너무 험난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이 그가 그동안 여러차례 진실을 털어 놓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한다. 물론 그부분에 관해선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의 사유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생각에 내가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천년의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서다.

볼테르는 말한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우리는 18세기 철학자만큼도 쿨 해질 수 없는 것인가. 정녕.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