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완기의 밴쿠버 別曲 (5)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視點)
소설이건 동화이건, 심지어 때로는 짧은 시의 경우까지도 작가들은 보통 자기를 숨긴 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화자(narrator)를 작품 전면에 등장시킨다.이 점은 참으로 문학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삶을 꼭 자신의 육성으로만 이야기하여야 한다면 때로 얼마나 부담스럽고 때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많을까?
그러나 전지전능한 神과도 같이 작가는 한 인물을 가공하여(혹은 창조하여)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꼬집고 타이르고 때로는 목놓아 울 수도 있으니 이처럼 재미나는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싶기까지 하다.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사랑방에 하숙을 친 선생님과 그리고 어린 딸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 젊은 미망인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화자는 6살 난 '옥희'라는 계집아이이다.
독자는 두 사람의 애틋한 연모의 감정을 깨닫고 함께 안타까워하지만 오로지 관찰자 '옥희'만이 그 사실을 모르는 셈이다.
엄마가 왜 갑자기 달걀을 한 판 더 주문하는지, 자물쇠로 굳게 잠가 두었던 풍금을 어느 날 문득 열어 연주하는 이유도 오직 '옥희'만이 모르는 채, 소설은 진행되고 이 점이 이 소설을 한없이 순수하고 그리고 격조 있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는 셈이다.
만약 어머니의 시점으로, 혹은 사랑방 손님을 작품의 '화자'로 삼아 글을 진행했다면 얼마나 저급하고 그리고 통속한, 그저 주간지에 실릴만한 가담항설(街談巷說)이 되었을까?
스웨덴의 P 라케르크비스트는 '바라바'라는 소설을 남겼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원래 예수가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할 도둑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석방된 바라바는 처음에는 그저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뒤도 안보고 달아나지만, 그러다 과연 도대체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에 묶인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고, 군중들 사이에 묻혀 예수를 바라보며 그의 생을 추적해 나가는 스토리이다.
풀려난 도둑의 시점에서 예수를 바라본 이 소설은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그의 많은 시 가운데에서 작품 전면에 '여성'을 등장시키고 있다.
분명 소월은 오산학교와 배재고보를 졸업한, 그리고 비록 음독자살로 생을 마치기는 하였으나, 처자를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자 남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대부분이 여자의 목소리로, 즉 여성의 시점에서 쓰여진 까닭은 무엇일까? 몇 가지 재미있는 추리가 가능할 것도 같다.
우선은 심리적 이유이리라.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정신이상자가 된 소월의 부친을 아직 어린 소월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사춘기에 겪게 되는 '동일시 과정'(커서 자기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기대심리)이 그만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를 보살핀 모친과 숙모에게 기울어진 그의 내면세계 속에는 남과 다른 강한 아니마(anima. 남성속에 자리한 여성적 경향)가 자리잡게 된 것은 아닐까?
또는 소월의 고도로 계산된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육사나 윤동주, 이상화처럼 소월은 저항시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나라 없는 세월을 살며 왜 가슴속에 피맺힌 울분이 없었겠는가? 일본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와 파쇼가 지배하는 강력한 남성우월주의 앞에서 오히려 그는 섬세한 여성의 목소리로,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세상과의 대결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보일 것이다.
고난주간과 굿 프라이데이(Good Friday)를 보내며,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던 예수의 시점(視點)으로 세상을 보기 원하지만, 그러나 자꾸 불쑥불쑥 망치로 얻어 맞고도 또 잠시 후면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두더지게임'처럼 자꾸 높은 곳에 눈을 두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필자 - 민완기( 민선생 국어논술교실 운영)
[email protected] TEL 604-61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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