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느끼며>남이 먹는 라면은 항상 맛있어 보인다
이계숙(자유기고가)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까 여자가 그리 씻은 듯 살림을 사니 들어오던 복도 나가겠다고 궁시렁거리며 라면이라도 한 개 끊이란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라면을 끊여 단무지랑 주었더니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도 먹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라면 먹는 그녀의 모습을 마주 앉아 지켜보자니 내 입에서 저절로 군침이 슬슬 도는 것이었다. 퇴근해서 배고픈 김에 밥 한 그릇, 찌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던 찰떡까지 전자렌지에 녹여서 목구멍까지 차도록 먹은 후였다. 그런데도 뜨거운 김을 불어가며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자 라면생각이 간절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일단은 먹고 보자.
방금 라면을 끊여낸 남비에 물을 받으니까 열심히 라면을 먹던 L씨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음, 나도 라면 하나 먹으려고… 저녁을 좀 부실하게 먹었거든."
무안한 김에 거짓말까지 했다.
곧 라면이 끊여졌고 나는 L씨와 마주앉아 라면을 먹었다. 파를 숭숭 썰어 넣고 잔새우까지 몇마리 집어 넣은 라면은 배가 잔뜩 부른 입맛에도 어쩌면 그리 맛있는지,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어 치웠다.
다음날 아침, 출근준비를 하기 위해 거울을 보다가 나는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라면을 끊여 먹은 결과가 거울 안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갓 애낳은 산모 마냥 퉁퉁 부은 얼굴이라니… 다시는 밤늦게, 특히 저녁 먹은 뱃속에다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 결심이 결코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왜 항상 남이 먹는 라면은 맛있어 보이는 것일까. 아무리 배가 불러 있어도 남이 라면을 먹고 있으면 불현듯 나도 라면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밤 한시에 영화속 라면 먹는 장면을 보다가 라면을 끊여 먹은 적도 있다. 관객동원은 실패했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출연자들이 귀신을 목격하는 등 화제를 일으켰다는 '서클'이란 한국 영화를 보면서였다.
운동후 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서 편안히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인물이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일곱시쯤 먹은 저녁이 소화가 다 될 시간이긴 했지만 라면 먹는 장면을 보는 것과 동시에 배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자그마치 밤 한시였다. 그 시간에 라면을 먹었다간 먹은 라면이 모조리 다 살로 갈 건 불 보듯 뻔했다. 더군다나 일 파운드의 살을 빼고자 30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고난 뒤끝이 아닌가. 부엌으로 달려 나가려는 마음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으며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누구를 약올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꽤 긴시간 동안 라면 먹는 모습만을 집중해서 보여주었는데 등장인물이 얼마나 라면을 맛있게 먹는지 구수한 라면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 코 안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영화고 뭐고 라면이 먹고 싶어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던 나는 등장인물이 냄비를 들고 국물을 마시는 장면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나갔다.그리고 마침내 라면을 끊여 먹고야 말았던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남이 먹는 라면을 보고 유혹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닐곱명이 모인 자리에서 라면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들 역시 한결같이 남 밥 먹는 것은 보고는 그냥 넘어가겠는데 라면 먹는 것은 절대로 못 참겠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연속극은 한 회당 라면 먹는 장면이 적어도 한두차례 이상은 꼭 나오는데 그럴 때 마다 자기들도 라면을 끊여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한번 시작한 운동을 10년씩이나 꾸준히 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편인 내가 유독 라면에 관해서만은 의지박약 증세를 보이는지라 한때는 집에서 아예 라면을 없애버릴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산처럼 쌓여있는 라면 박스 앞을 그냥 지나쳐 오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한국마켓에서 제일 싸다 싶은 게 라면이다. 십 몇 불쯤이면 온갖 종류의 라면을 다 살 수 있다.
'그래도 어찌됐든 라면은 비상용으로라도 집에 꼭 있어야 되겠지. 갑자기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서'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라면 한 박스를 들고 계산대 앞에 선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결국 그 라면 한박스가 모두 내 입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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