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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골프공

정재옥
미동부문인협회 고문

신록의 6월이다.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마음에 드는 황금 계절이기도 하다. 골프장 만큼 푸르름을 간직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발 밑에 초록을 깔고 산천을 둘러봐도 모두 푸르기만 하다.
골프를 시작한 후 골프장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된다. 시야가 확 트인 골프장은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온통 초록의 향연이다. 이런 좋은 골프장에서 멋진 샷을 날릴 수 있는 실력이면 금상첨화겠지만 공이 마음대로 맞지 않을 경우에는 좋은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신에게 한심한 생각만 들게 된다.
아! 나는 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저렇게 멋진 샷을 날릴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저 사람보다 신체적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닌데…심지어는 저 사람보다 내가 IQ가 낮은 것 같지도 않은데…별별 생각을 하면서 공을 잘 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하지만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수치심에 풍덩 빠지고 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렵고 기분 상하는 게임을 사람들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인간이 가진 오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나를 이겨보자는 오기,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는지에 대한 오기, 그리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조그만 골프공에 대한 오기, 이런 것들에 대한 오기 때문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골프는 인생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살이처럼 많은 난관에 부딪치면서 게임을 한다. 18홀을 마칠 때까지 빠져나오지도 못할 깊은 모래 웅덩이에 들어가기도 하고 물에도 빠지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사서 고생이란 말이 있다. 포기하고 골프치기를 그만두면 될텐데 사람들은 그래도 골프가 주는 묘한 매력 때문에 그러질 못한다.
나도 이런 골프의 알파와 오메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더 잘 치기 위해 동네 연습장엘 자주 간다. 필드에 나가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연습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재미도 있다.
그런데 가끔 공 한개가 티 위에 오똑 남겨진 자리를 보게 된다. 누가 저렇게 공 하나를 남겨두고 가는 것일까. 그것도 드라이브 샷을 치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처럼 티 위에 올려 놓기까지 하다니….
조그만 골프공 한 개가 주는 의미는 잠깐 사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신호 같기도 하고, 또 티 위에 오만하게 올라 앉아있는 공을 보면 선뜻 접근할 수 없는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어서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게도 한다. 장난으로 그런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저렇게 남겨놓은 것일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내심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주인공과 딱 마주치게 되었다.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한 남자가 연습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어깨 너머로 티 위에 올려진 하얀 골프공 한 개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올치, 이 사람이구나! 마치 도둑을 잡은 형사처럼 의기양양해서 나는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인사도 한마디 없이 내 궁금증을 풀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왜 늘 마지막 공 한개를 티 위에 남겨놓고 가세요?” 나는 그가 무슨 남김의 미학이라든가, 자신만의 큰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걸면서 그의 답을 눈빛으로 재촉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명답 같기도 했고 김빠지는 답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기만의 무언가를 내세워 길게 설명하려 들었다면 아마 나는 많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기고 간 어정쩡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도 그날은 마지막 공 한개를 티 위에 올려놓고 그의 흉내를 내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공 한개를 남을 위해 남겨둔다는 게 무슨 큰 적선이라도 베푼 것처럼 묘한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여유를 가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남겨진 조그만 골프공 하나에 이렇게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왜 연습할 때마다 마지막 공하나를 꼭 남겨두고 가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날 이후 그 사람처럼 골프공 하나를 연습할 때마다 남겨놓기로 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나에게도 누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해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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