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티드’ 프로듀서 로이 리
GW대, 아메리칸대 로스쿨 출신
이씨는 그러나 “수상식날 밤 11시까지 TV 를 지켜보다 ‘리스트에 오른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아들의 얘기에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고 당시를 소개했다. 새벽 12시 20분 빗발치는 전화에 잠을 깨 보니 디파티드가 이미 최고의 작품에 선정돼 있었다고 말했다.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1살때 몽고메리 락빌에 정착한 로이 리는 월터 존슨 중·고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어 아메리칸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DC의 대형 로펌에서 4년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 로이 리는 변호사 재직 시절에는 법정에서 범죄인과 서로 다투는 형사법 대신 상법을 담당했다.
“변호사로 열심히 활동하던 어느날 로이가 2001년 어느날 폭탄선언을 했어요. 한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는데 갑자기 LA로 간다고 말을 해요. 직업에 싫증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미국인 친구와 함께 직접 차를 몰고 LA로 떠났는데 3일만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었지요.”
평소 원했던 영화일을 하기 위해 영화사를 찾아 다니던 로이 리는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취직한 뒤 바로 그해 친구 더그 데이비슨과 함께 버티고(Vertigo)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링’의 리메이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알린 그는 '그루지' '레이크 하우스' 등 아시아 영화의 '할리우드 버전'을 속속 만들었다. 또, ‘엽기적인 그녀’와 ‘조폭 마누라’의 판권도 사들여 이를 각각 드림웍스와 미라맥스에 제작을 알선하기도 했다.
특히 홍콩 영화 ‘무간도’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는 것을 처음 제안한 리는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해 마침내 오스카상 4관왕이라는 영예를 이루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아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앞날을 바라보는 부모의 조바심과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로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이제는 워싱턴 집으로 돌아오라는 소리를 안해요. 그렇지만 헐리우드내 크리스쳔 인사들과 교분을 넓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여지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인 이씨는 “항상 선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라고 항상 두 아들에게 당부한다”고 말했다.
변호사에서 영화 제작자로 인생의 항로를 돌린 로이 리.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는 여인을 만나 두 딸을 두고 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법조인의 길 대신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곽서희씨를 만난 것이다.
한편, 로이 리의 부친은 지난 해 작고한 이광명(소아과 의사) 박사. 지난 66년 DC 종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친 이 박사는 73년부터 베데스다에서 개업의로 활동해 왔다. 모친 이인애씨는 20년간 몽고메리 카운티 교육청에서 교사로, 로이 리의 형은 현재 버지니아 프레드릭스버그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허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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