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소고] '마하나임'이 주는 의미
민종기 목사 새생명장로교회
야곱은 이 지명을 "천사들의 진영"이라는 의미에서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하였다. 마하나임 근처인 브니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게 되고 옛 이름 "야곱"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왕조시대에 들어 이 도시 마하나임은 두 번이나 왕의 거처로 정해졌다. 한 번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에 의하여 또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에게 쫓겨난 다윗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다. 이곳은 당시 무기생산에 필수적인 철광에 다다르는 길을 통제하는 길목에 있었기에 요충지였다. 무엇보다도 마하나임은 방어형 요새여서 피신하여 힘을 기를 수 있는 전략적 장소이기도 하였다.
다윗은 짧은 기간 동안 피신하여 마하나임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로움의 아픈 기억을 평생 잊지 아니하였던 것 같다.
그는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잔인한 죄에 대한 심판을 받되 아들 압살롬에 의하여 기습을 당하고 예루살렘을 쫓겨나 마하나임으로 도피하였다.
그가 마하나임에 있는 동안 반역한 아들 압살롬과 그를 따른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이 임종의 결정적인 순간에도 가장 인생의 낮은 바닥을 쳤던 마하나임의 시절 자신을 찾아와서 도움을 주었던 바르실래를 기억하면서 그의 아들들을 선대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마하나임은 다윗의 기억 속에 쐐기처럼 박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기억으로 죽음을 앞에 둔 때까지 남아있었던 것 같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초상집보다 잔치집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슬픔보다는 웃음과 기쁨을 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는 종종 가장 호화롭고 찬란한 성공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착념하면서 마하나임의 고난과 눈물을 애써 잊어버리는 적이 흔하게 있다. 어찌 다윗이 도피성 마하나임의 기억을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과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마하나임의 기억은 의도적으로 잊혀지고 배척되어진다. 생각하기도 싫은 마하나임의 기억은 실패의 기억이요 불명예의 기억이요 심판을 당한 기억이요 버림받은 기억이요 망각하고 싶은 상처의 기억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하나임의 기억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예루살렘이 영광의 성이요 성공의 성이요 성전이 있는고로 하나님의 임재의 성이요 아름답고 거룩한 성이라 할지라도 고난과 수치의 마하나임을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청교도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 이주민을 싣고 미국으로 오는 배위에서 설교하였던 "언덕 위에 있는 도시"(a city on a hill 마 5:14)가 아무리 높은 새 예루살렘의 이상이라도 그들이 유럽에서 겪었던 핍박의 마하나임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하나임을 기억하여야 하는 이유는 고생의 경험이 없는 자녀가 유약하여지는 가능성 때문이다. 결핍과 한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생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빵을 씹어 보지 못한 사람이 경솔하고 천박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없이 성장한 사람들이 종종 개척자이기보다는 몽상가로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하나임의 기억을 통하여 깨어있고 나를 경계할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유명한 "명상록" 속에서 "나는 오직 신음하며 추구하는 사람만을 인정한다"고 말한바 있다. 우리 개인과 교계의 문제는 종종 "신음" 없이 영광과 승리만을 "추구함"으로 시작된 것은 아닌지?
교리는 흔하나 사상이 미약한 한국 신학 교회는 부흥하였으나 불신자들에게 종종 냉소와 비판을 받는 경박스러움 구호와 선언은 난무하지만 부자세습을 넘어서지 못하는 목회자의 탐욕 사랑의 공동체 속에 흔한 소송과 갈등과 분열 등은 마하나임의 기억 즉 고난의 신음에서 교훈 받지 못한 교회가 낳은 해프닝이 아닐까? 마하나임의 기억이 윤리적으로 느슨해지고 양적으로 웃자란 한국교회를 향한 일종의 치유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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