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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나의 인생, 행복합니다' 퓰리처상 2개부문 수상 뉴욕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씨 첫 개인전

9.11·아프간전쟁 등 취재 현장 담은
'히스토리' 700점 디지털 슬라이드쇼

“제게 사진은 인생(Life)입니다. 제가 살아온 모습이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지요.”

언론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두개나 거머쥔 뉴욕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40)씨. 그가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지난 12월 5일부터 이스트빌리지의 갤러리 ‘SB디지털’에서 열고 있는 전시의 제목은 ‘HISTORY’. ‘역사(History)’는 공식적인 사건을 모은 것이지만, 이번 전시는 이씨의 시각으로, 이씨의 카메라에 담은 ‘이씨의 이야기(His Story)’다.

전시에는 9.11 사태·이라크전·아프가니스탄전에서 인도네시아 지진, 베이징 올림픽까지 이씨가 지난 14년간 뉴스의 현장에서 담아온 이미지 700여점이 46·40인치 HD모니터 4개와 벽 하나에 슬라이드쇼로 진행되고 있다.

SB디지털은 이씨의 부인 박설빈씨가 지난해 10월 개관한 갤러리 겸 스튜디오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계속된다.

◇퓰리처상 2관왕=“현장에 가야한다는 것은 거의 본능이었습니다. 영화 ‘타워링’에서 옥상 위에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2001년 9월 11일, 청명한 가을 아침이었다. 사진부장 짐 윌슨의 전화를 받은 이씨는 400밀리 망원렌즈와 카메라 두대, 노트북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이스트빌리지의 집에서 현장까지 걸어서 갔다. WTC에 도착한 이씨는 사우스타워가 무너지는 것을 포착했고, 연기 속에서 하루종일 셔터를 눌렀다. 이듬해 그는 동료기자 13명과 공동으로 2002년 퓰리처상 속보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 이씨는 동료 기자 4명과 폭격으로 초토화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3개월간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간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포토저널 ‘아름다운 삶(Beautiful Lives)’ 시리즈로 특집상까지 공동으로 수상, 이씨는 같은 해 퓰리처 2관왕이 됐다.

재난이 있는 곳에 이장욱과 카메라가 있었다. ‘재난전문 기자’라는 별명이 붙은 이씨에겐 굵직한 사건과 행사들이 맡겨졌다.

올해만 해도 뉴욕필의 평양 콘서트와 베이징 올림픽을 취재했다. 이씨는 1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DC로 달린다. 그리고 20일 역사적인 미국 흑인 대통령 1호의 취임식 퍼레이드를 촬영하게 된다.

◇방랑벽의 교훈=이씨는 부산 토박이다. 동래구 온천동에서 두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이씨는 무역선 선장인 아버지를 이따금씩 보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집에 올 때마다 세계 각 나라에서 산 우표를 주었다. 소년은 조그만 우표들을 통해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동인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곧 카메라와 친구가 됐다. 뉴욕에 살던 이모가 보내준 카메라를 들고 사진반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씨에게도 사춘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주입식 교육체제 속에서 현실의 답답함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보길도에서 경포대, 서산 앞 바다까지 동서남해를 돌았다.

세 차례 무전여행을 통해 트럭운전사, 웨이터, 대학교수 등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인생을 배웠다. 결론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라’였다.

“가을비가 쏟아지던 어느날 서산 둑길을 걷는데 갑자기 너털웃음이 나오더군요.”

이 순간 답답증이 물러가고 속이 시원해졌다. 그때 문득 ‘집으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학교로 돌아온 이씨에게 담임교사가 물었다. “장욱아, 그래 고래는 잡았느냐?”

‘고래사냥’식의 방랑벽을 중단한 이씨는 그후로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날 TV에서 건물 무너지는 장면을 본 후 파괴공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파괴의 과학을 알려면 건축을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중앙대 건축공학과로 들어갔다.

◇이민에서 NYT까지=대학 1학기를 마친 이씨는 이모의 초청으로 뉴저지로 왔다. 두살 많은 형 장혁씨와 액자공장에서 물건 나르고 프레임을 만들며 하루종일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부산 사투리가 심해서 한국어도, 영어도 안통하던 시절이었지요.”

컴퓨터가 비전이 있는 것 같아 버겐커뮤니티칼리지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수료한 후 뉴욕대학교 사진과로 편입했다. 이야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매료된 이씨는 ‘홈리스’ 프로젝트와 LA 폭동 그 1년 후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졸업 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의 인턴으로 입사했고, 2개월만에 최연소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됐다.

“공정하고 균형있는 보도를 하는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는 것이 로터리에 당첨된 것보다 더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컴퓨터를 전공했던 이씨는 뉴욕타임스가 흑백에서 컬러사진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하는 변환기에 잘 적응했다. 스포츠 게임 등 야간 취재에도 순발력을 발휘했다.

이라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폭격으로 사진기자가 사망했다. 일촉즉발의 전쟁터, 재난의 현장을 찾아 세계를 다닐 수 있는 것도 부인 박씨의 이해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이씨는 외아들 지오(5)를 위해 해외 취재를 조금씩 자제하고 있다.

“죽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정말 행복합니다.”

박숙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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