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박정희 시대의 양면성
이길주/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조수 간만의 큰 차이 때문에 대형선박은 부두에 접근 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물을 가두고 배가 드나들 수 있게 한 갑문의 건설은 인천항을 하나의 거대한 도크로 만든 역사(役事)였다.
그날 아침 인천의 모든 중고등학생들은 학교에 모여서 얼마 전까지도 섬이었지만 간척사업으로 산이 되어 버린 월미도까지 행진했다. 먼 거리였지만 우리는 아주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동양 최대’ 라는 선생님의 설명에 힘을 얻었던 것 같다.
행사장에 도착해 몇 시간 동안 대통령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갯벌을 흙으로 덮은 매립지여서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와 흙먼지가 입과 코로 들어왔다.
초여름 태양 밑에서 물을 마시고 싶었으나 물통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목마름의 괴로움을 그때 아주 진하게 경험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탈진해 땅 위에 누워버린 학생들도 있었다.
여학교 집결지 쪽에서는 더 큰 소란이 벌어졌다. 소변을 볼 곳이 마땅치 않아 학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우는 학생도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통령이다. 손 흔들어!” 우리는 미리 준비한 흰 수건을 흔들며 “와”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앞줄이 아니고서는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박 대통령 내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념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이지 않는 대통령을 향해 이번에는 환송의 환호성을 질러야 했다. 그 후 영화관에서 본 ‘대한뉴스’에서 수 만 학생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박 대통령이 약 3초 가량 오른손을 들어 화답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동양 최대 갑문식 도크 덕에 인천은 완전히 달라졌다. 화물 처리 능력이 대폭 늘어난 수출입 항구로서 인천은 한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또 주변 매립지에 대형 공장이 들어서 지역경제가 활성화 됐다.
갑문식 도크와 함께 조성된 연안부두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박대통령의 표현대로 인천항의 갑문식 도크는 ‘뻗어가는 우리 국력의 상징이고 조국근대화를 앞당기는 우렁찬 개가’였다고 할 수 있다.
대륙을 겨냥한 소위 “서해(西海) 시대는 인천항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시민들의 삶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아이들은 천혜의 놀이터를 잃어 버렸다. 도크와 간척지가 생기기 전에는 쉽게 바닷가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알몸으로 터득한 개와 개구리의 동작을 반반 섞은 우스꽝스러운 수영 솜씨 덕분에 물에 대한 공포는 일찍 떨쳐버렸다.
친구들과 타이어 튜브를 묶어서 만든 고무 뗏목을 탁구채로 저어 장보고나 된 듯 서해 쪽으로 나간 일도 있다. 도크가 만들어진 후에는 그러나 수돗물이 채워 진 수영장에서 놀아야 했다.
주거 환경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간척지에 대형 공장들이 들어서고 화물차의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수질과 대기오염이 심화됐다.
주민들이 도심을 떠나 교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발된 곳이 한때 유원지로 유명했던 송도이다. 빠른 산업화로 파생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그것을 방치 한 채 새로운 도심을 만들었다. 산업화가 옛 것을 지켜내고 발전시키는 내공의 축척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올해가 박대통령의 서거 30주년이다. 그의 18년 집권에 대한 시각에 따라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보수와 진보로 갈릴 만큼 그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박대통령 시절 필자의 고향이 변화한 모습을 보면 그의 족적은 양면을 다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역사의식이다.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어린 학생들도 동원되었던 그 일그러진 모습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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