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가운데서] 성조기 관리
어릴 때 국경일이 되면 시가지를 드리우는 태극기의 물결이 참 신선했다. 하얀 바탕에 눈이 부셨고 태극 문양의 부드러운 곡선이 신기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국기 달기를 권장해 우리 집도 대문 앞 아버지 이름의 문패 옆에 국기를 달고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태극기는 어린 나에게 대한민국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시켜 줬다.그런데 미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집 앞에 성조기를 다는 사람들이 많다. 애국심이 대단하고 나라가 부강해서 그런가 생각했다. 특히 남부에는 집 건물 앞에 높은 국기 게양대가 있는 집들이 의외로 많다.
요즈음 날씨 변동이 심하고 바람도 살살 부는 편이다. 오늘 운전하며 지나 가다가 한 집 앞에 높이 펄럭이던 성조기를 보고 그만 아연실색했다. 지금까지 본 어떤 성조기보다 더 처참하게 넝마처럼 갈가리 찢어져 있었고 색깔도 거무죽죽했다. 미국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국기를 애국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높이 내다 걸어 놓고 돌보지를 않았다. 잊혀져서 그대로 비바람을 맞고 버티다 지쳐버린 성조기를 보니 그 집주인의 애국심도 그렇게 잊혀지지 않았나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집 문을 두드리고 성조기의 상태를 알려 줬을 수 있었겠지만 요즈음은 겁이 나서 그러지를 못하니 남편과 함께 씁쓸하게 그냥 지나왔다. 성조기는 언제나 위엄과 존중으로 대우해야 함을 귀가 따갑도록 배우고 익힌 군대생활을 한 우리 부부한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광경이었다.
물론 군인이라는 직업이 국기에 대한 예의를 더욱 깍듯이 지키도록 훈련시킨다. 덕분에 나는 어디에서나 국기가 올바르게 달려 있거나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주의하는 버릇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장소에서 잘못 전시된 성조기를 제대로 고쳐 주기도 했었다.
성조기는 여러 크기가 목적과 경우에 따라 사용된다. 그리고 그 관리 방법도 분명하다. 성조기를 절대로 바닥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 비가 오거나 해가 지면 게양된 성조기는 꼭 걷어야 한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특별한 경우에는 불이 밝게 비춘다면 밤에도 게양될 수 있다. 선박 위의 성조기가 거꾸로 달린 것은 위험이나 조난을 알리는 신호도 된다. 심지어 거리의 방향에 따라 성조기를 다는 방향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리고 성조기를 함부로 상업 광고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성조기에 어떤 부호나 사인을 보태는 것도 절대 금하고 있다.
‘The Old Glory’ 라고도 불리는 성조기는 모든 행사의 중앙에서 미국의 심장으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신성한 기도문이다. 그러니 성조기를 보관하는 것도 정확하게 접는 방법을 따라서 삼각형 모양으로 별이 보이도록 접어서 보관하고 낡고 변색한 성조기는 절대로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된다. 성조기의 상징에 어울리는 위엄을 갖추고 불에 태워야 한다.
미군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성조기를 두 번 받는다. 군에서 퇴직할 때와 죽었을 때 관을 덮을 성조기를 국가에서 준다. 나도 군 근무를 기념해서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펄럭이던 성조기를 퇴직 시에 기념으로 받았다. 삼각형 액자에 보관되어서 응접실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 이 성조기에는 억척스러웠던 내 젊은 시절이 숨어있다. 아무튼 그 옆에 함께 전시되어 있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는 내 존재의 구심력이다.
사람에게 근본이 중요하듯이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의 관리도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근본을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다른 일들도 허술하게 함부로 다루게 된다. 국기에 대한 깍듯한 예우는 국민들의 근본자세이다. 낡아 너덜거리며 게양되어 있는 성조기를 보고 이렇게 안쓰럽고 마음이 불편하니 나도 미국사람 다 되었다. 사실 이민생활 35년쯤 되면 강산도 여러 번 바뀌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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