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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Book] '능지처참' 탓에 문화적 사형선고 받았던 중국

국어사전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머리.몸통.팔.다리를 토막 쳐 죽이던 극형'이라고 풀이한다. 뜻풀이만으로도 소름끼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1904년 10월30일 중국 베이징의 '채소시장 입구' 교차로에서 살인범 왕웨이친이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형집행인은 그의 가슴.이두박근.허벅지 살을 도려내다 심장을 단번에 찔러 절명시켰다.

그 뒤 사지 절단 작업이 이어졌다. 자신과 재산권 분쟁을 벌이던 한 가족 12명을 죽인 대가다. 아마도 집행 전에 다량의 아편을 복용했을 것이며 사지 절단은 죽은 뒤 진행됐으므로 상상만큼 끔찍하고 긴 고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청나라는 이듬해인 1905년 이 잔혹한 형벌을 공식 폐지했다. 마지막으로 능지형을 당한 불운한 죄수는 푸주리라는 만주인 하인이었다.

문제는 왕웨이친이나 푸주리의 처형에 관한 담론(談論)이 생생한 사진과 함께 서구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능지처참'을 화두로 삼아 중국 나아가 비(非)서구 지역에 대한 서구인들의 편견과 오해의 역사를 파헤치고 있다.

무엇보다 왕웨이친이 능지처참당한 시점에 유의해야 한다. 처형 4년 전인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1차 아편전쟁(1840~1842년)과 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이 있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이 한창이던 시기에 능지처참이라는 엽기적(유럽 시각에서)인 사형이 집행됐고 이를 서양인이 촬영해 유포했다.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시체를 참수한 게 1820년. 1830년대에는 효수(梟首)나 시체를 사슬에 매다는 등 처형당한 사체를 모독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겨우 몇십 년 앞선 유럽의 '인도주의'가 중국의 '야만성'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배경에는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중국의 형벌은 서구인들의 치외법권을 정당화하는 데도 이용됐다.

능지처참이 폐지된 1905년 이후에도 중국에 대한 서구의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구한말 한반도를 찾은 서양인들이 남긴 '관음증'의 기록들을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남의 일은 아니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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