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철의 상인의 생각] 석숭(石崇)
석숭(石崇·249-300)은 중국 서진 무제때 사람으로 산동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석포가 “영특해 물려 받은 것이 하나 없어도 거부가 될 인물”이라며 재산을 한푼도 물려주지 않았지만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는 혜제(290-306) 때 형주자사란 관직에 오른 이후부터 권력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또한 외국 사절들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위협해 수탈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불려 나갔다. 이어 혜제의 황후 가후가 권력을 잡고 전권을 휘두르자 황후의 조카 가밀과 유착해 절대의 부를 이뤘다. 당시 석숭의 처첩이 100명 달했고 집의 하인이 800명에 이르렀다 한다.진서 세설신어에 의하면 석숭은 황제의 외삼촌인 당대의 권력형 거부 왕개와 부를 다퉜다. 이것을 ‘투부’(鬪富)라고 하는데, 졸부 수준의 사치에 다름없다.
그는 왕개가 엿물로 솥을 씻으면 밀랍으로 불을 지펴 밥을 지었고, 왕개가 적석지(赤石脂)로 바람벽을 바르면 후추로 바람벽을 발랐으며, 왕개가 적면포(赤綿布)로 휘장을 40리를 두르면, 비단으로 휘장을 50리를 둘렀다고 한다. 또한 왕개가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 면포인 화완포(化浣布-불로 세탁하는 천)로 옷을 지어 입고 자랑하자 자신의 하인 50여명에게 화완포를 지어 입혔다고 한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 왕개가 길이가 2자(60센티)나 되는 산호초를 자랑하자 그것을 깨 부순 뒤 자신이 갖고 있는 4자 짜리 산호초 6개를 건넸다고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복(福), 녹(祿), 수(壽)를 소원한다. 석숭은 이중 녹(급료)을 성취하는 사람으로 꼽혀 민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석숭처럼 출세해 국가의 녹을 많이 받게 해 주소서’라고 비는 이른바 ‘부(봉록)의 신’의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재물을 벌어들이는 상인은 아니었다. 석숭은 권력을 이용해 부를 쌓은 부패 정치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부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석숭이 승상 왕돈과 함께 공자 제자상을 참관하면서 “사람은 마땅히 자공과 같이 돈을 많이 모아 편안히 잘사는 것이 좋지, 누가 안회나 원헌과 같이 도덕만 숭상하고 고생스럽게 살다 죽는 것을 원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에서 석숭이 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는 “상인은 마땅히 자공과 같이 노력해 돈을 많이 모으는 한편, 안회나 원헌이 도덕을 숭상하고 끝까지 노력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업을 숭상하고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상인이란 석숭의 말대로 부유함을 목표로 하지만 쌓은 부를 석숭처럼 사치하거나 과시하려는 사람은 아니다. 더 나가 진정한 상인은 성취욕에서 재산을 축적하며, 절대의 부를 이뤘다 해도 그후에는 재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치하기 보다는 반대로 그때부터 극단의 검약과 겸손의 세계로 들어감을 최상의 과제로 삼는다.
상인의 최고의 선은 검약에 있다. 상인은 최고의 부를 이뤘다 해도 절정의 사치로 최대의 소비는 하지 않는다. 안회나 원헌이 도덕에 최고의 선을 두고 살았듯이 상인은 검약에 최고의 선을 두고 살아야 한다. 강조하지만 석숭은 상인이 아니며 부자의 상징도 아니다. 다만 권력을 배경으로 돈을 긁어 모아 사치한 자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부자란 석숭이 아닌 자를 말한다.
송신철/조지아 에셋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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