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에세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성장배경
테네시 윌리엄스 (Tennessee Williams, 1911-1983)는 20세기 중반 미국 문단에서 총애를 받았던 작가로 트루먼 커포티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일생 동성애자였고 알코올과 약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점에서 두 작가는 유사점을 공유한다.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배출한 가장 훌륭한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시시피주 컬럼버스에서 토마스 래니어 윌리엄스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회중 교회(영국에서는 성공회) 목사의 딸이었다. 그녀는 항상 자기 가문의 조상은 노르만 계통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구두회사의 선전 판매원이었다. 아버지의 가계는 원래 프랑스에서 근거를 두었는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이주한 가문이었다. 이 집안은 테네시 주에서 명문 가계에 속했다. 아버지 측 선조에서는 테네시주 최초의 지사와 최초의 상원의원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떠돌이 세일즈맨이어서 그런지 허풍이 많았고 욕지거리가 심했다.부자간에는 애정이 별로 없었다. 어려서 심한 디프테리아를 앓아 사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후로 그는 다른 아이들과 격리되어 살면서 독서를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아들이 좀 더 밖에 나가 남들과 어울려 운동도 하면서 좀 더 남성적인 사내로 자라기를 바랬던 아버지는 그를 항상 못마땅히 여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아들 편을 들어 감싸면서 보호해 주는 입장이었다.
출생지인 컬럼버스에서 그의 가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1918년 가족은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했다. 거기서야 시골 출신인 윌리엄스는 비로소 빈부의 차이란 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자기 가족은 부자가 무엇인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가난한 쪽에 속했음을 확실하게 이해한 것이다. 그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심한 남부 사투리를 쓰고 시골 때가 덕지덕지 묻은 모습을 보고 학우들은 그를 “테네시”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토마스 대신 이 별명을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다.
1928년 테네시 윌리엄스가 할아버지를 따라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받은 유럽 문화의 인상과 그 분위기를 그는 시로 적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미국은 대 공황 시기에 빠져 있었다. 부모가 학비를 마련해 주지 못해서 2년 만에 학교를 중퇴했다. 대신 아버지가 일을 하던 구두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이 직업이 끔찍이 싫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계속 일을 했다. 아이오와 대학에 가려면 입학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이오와 시절 아르바이트로 웨이터로 일을 했다. 또 태평양 연안 서부 여러 주를 여행했으며 D.H. 로런스의 작품을 열심히 읽었다. 그는 뉴멕시코에 가서 당시 거기 머물던 이 작가와 그 가족을 만나 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구두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여러 편의 단편을 지었다. 그 무렵 자신에게 동성애 적 경향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후에 28세가 되어 난생 처음으로 성교를 경험해 보았는데 상대가 남자였음을 고백했다. 2차 대전 중 아이오와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 잠시 할리우드에 가서 MGM 회사에서 영화 제작에 관한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1945년에 그동안 배운 영화 수법을 이용하여 '유리 동물원'(Glass Menagerie)이란 작품을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연극은 즉시 크게 성공해서 작가는 미국 극단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 작품은 원래 시카고에서 공연되었지만 그 명성으로 인해 브로드웨이로 옮아가 1년 이상 공연되었고 뉴욕 드라마 비평가들의 상을 받았다.
'유리 동물원'에서 작가는 주인공으로 로라 라는 지나친 수줍음으로 인해 남들 앞에서 실수할까 두려워해서 사람들 대하기를 극도로 기피하는 '기피성 성격 장애자'(Avoidance Personality Disorder)를 내세워 작품을 만들었다.
정유석(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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