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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은 안개에 젖어 있고

박신아

시애틀 언덕에 있는 호텔 무라노에서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호수 같은 바다 주위로 산들이 검은 실루엣만 드러내고 얼굴을 감추고 있다. 보랏빛 물안개는 수면 위로 나지막이 가라앉아 있고 건너편 바다 해안 숲 사이로 집들이 드문드문 한 점의 그림이 걸려 있는 듯하다.

지금은 하루의 시작을 위한 기도의 시간인 듯 산도 바다도 배들도 넓은 시가지도 좁은 골목도 침묵과 고요만 있다. 나의 룸메이드 K는 아직도 새벽잠에 빠져있다. 곧 모닝콜이 울리면 20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5명의 선후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여행 이틀째인 오늘은 첫날의 서먹했던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오늘은 시애틀에서 20여분 거리인 타코마에 있는 포트 루드로우 리조트에서 라운딩이 있다. 어제처럼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더니 가는 도중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옷을 준비해 갔지만 비를 맞고 운동을 한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곳에 도착하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적당히 구름 낀 날씨로 변했다.

어제의 뉴 캐슬 코럴 크릭의 유럽 성채 같은 고풍스런 클럽하우스와는 달리 이곳은 아담하고 소박한 곳이다. 낮은 구릉지를 따라 특색 있게 설계된 코스는 짙푸른 침엽수들이 양쪽으로 수많은 장정들이 도열해 있는 듯 보기 좋게 코스를 따라 숲을 이루고 있다. 운동 중에 잠깐씩 고개를 들어 언덕 위의 아름다운 집들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한다.

이 지역의 잦은 비로 인해 크릭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려 우리들의 더워진 몸을 식혀 주어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키 큰 침엽수 아래 잡목 사이에는 새까만 산딸기가 지천으로 달려 있어 우리들을 유혹한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잘 익은 열매를 우리는 그냥 두고 갈 수 없다. 누군가 '복분자주가 따로 있나 실껏 먹었으니 물만 마시면 속에서 발효되어 복분자주가 될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우리 썸에서 홀 인원이 나왔다는 것이다. 평생에 한 번도 힘들다는 홀이원을 R은 올 해에 두 번째라니 대단한 일이다. 내 실력으론 생애 한 번도 해 볼 것 같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그 역사적인 현장을 그냥 지날 수 없어 우리는 까맣게 딸기 낀 이를 드러내고 입술꼬리를 한껏 치켜세우며 어린 애들처럼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나눌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지만 같은 취미를 가지고 며칠을 함께 보내니 낯선 사람들도 오랜 친구인양 가깝게 느껴진다. 전생에 육백 번의 생을 살아야만 이 생에 인연이 될 수 있다니 쉽지 않은 만남이다.

적당히 피곤이 몰려오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나뭇잎들이 먼 길을 떠나려는 듯 어느새 붉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캐나다 벤쿠버의 국경지대인 타코마의 좁은 길을 달리다 보니 이민 초기 벤쿠버에서 보냈던 그 겨울이 생각난다. 겨울 내내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햇빛을 그리워 했었다.

4일 동안의 여정이 끝났다. 타코마 네로우스 브릿지는 여전히 안개가 끼어 있고 그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하면 일상의 자잘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가끔의 여행을 통해서 새롭게 정신을 충전 시키고 또 다른 꿈에 도전하는 용기를 얻는다.

400~500년을 산다는 소나무가 죽어 토막으로 잘린 채 어느 골프장 티 바스 뒤에 서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비바람을 맞았는지 껍질은 간데없고 속살이 삭아 거름이 되었는지 몸통 위에 또 한 그루의 새 생명을 키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시선을 잡아 오래 동안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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