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독거노인] "애들도 먹고 살기 힘든데…" 외로움 삭이며 눈시울
66세 최현수씨의 '쓸쓸한 삶'
달랑 침대 하나 뿐인 스튜디오, 외로움은 어느새 '익숙한 면역'
갑작스런 실직에 생활비 부담…그래도 자식걱정에 내색도 못해
용돈 쪼개 장보고 만든 반찬, 주말 교회에서 나눠 먹는 게 낙
#. 내 이름은 최현수. 올해 66살이다. 나는 혼자 산다. LA한인타운에 있는 400스퀘어피트 남짓한 스튜디오에서. 집 안에 제대로 된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 뿐이다. 이마저도 비좁은 스튜디오 내부를 꽉 채운다. 더 들여놓을 가구도 없지만 설령 들여놓더라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포기하고 산지 오래다. 사실 별 필요도 없다.
난 여전히 젊고 건강하다. 하지만 내 나이는 이미 초로 노인 그룹에 들었다. 나처럼 혼자 사는 노인을 독거노인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말만 들어도 쓸쓸함이 묻어난다.
한국에서 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친정 식구들은 남편과 사별 후 태어난 딸을 미국에 입양시키라고 했다. 하지만 유일한 혈육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싱글맘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내 아이가 주눅들까 봐 겁이 났다. 결국 아이의 미래를 위해 1982년 9살 된 딸의 손을 잡고 미국에 왔다. 친정 가족을 따라 이민길에 오른 것이다.
빈 손으로 온 이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청소부터 시작해 식당, 택시, 봉제공장, 베이비시터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일거리가 없어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고 차에서 두 달 동안 생활하며 렌트비를 모으기도 했다. 남들은 노후 준비할 때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바빴다. 아이의 미래만 생각했지 정작 내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간신히 아이를 북가주에 있는 대학에 보내고 한숨 돌렸다.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이 때부터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딸을 떠나 보내고 20여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살았다. 딸은 학교를 졸업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하다 타인종 사위를 만나 10여년 전 결혼했다. 그동안 난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세월이 흐르니 어느새 외로움은 익숙해졌다. 외로움도 ‘면역’이 되더라.
#. 3년 전 10년 넘게 몸 담았던 직장을 떠나야 했다. 건강식품 판매회사였다. 적어도 70살까지는 일할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일에 파묻혀 있을 땐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일은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을 놓아야 했고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실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느덧 나이는 60을 훌쩍 넘겨 일자리를 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우울했다. “나 아직 일을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실직은 생활비 부담으로 이어졌다. 일을 못하니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일만 하느라 하소연할 친구 하나 못 사귀었다. 딸 걱정할까 봐 마음의 병을 내색도 하지 못했다.
타인종 사위가 행여 도와달라는 줄 알고 오해라도 할까 봐 탁 터놓고 “힘들다”고 얘기 한번 못했다. 그래도 살아가야 할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짧아질수록 딸과 같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은 커진다.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수없이 되뇌며 맛있는 것도 해주고 남은 인생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남을 위하기는커녕 내 몸 하나 지키기 힘들어져 상상만 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생활이 지속된다. 그래도 언제 어떻게 갈 지 몰라 매일같이 정리정돈을 한다. 세상을 등져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자식에게만큼은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빨리 가야지’라는 생각을 수 없이 되뇐다. 하지만 자식한테 상처 줄까 봐 두려워 이내 마음을 다잡기가 하루에도 여러 번이다.
#. 매일 아침의 시작은 숫자와의 전쟁이다. 팍팍하기만 한 생활비 걱정 때문이다.
매월 지급되는 사회보장연금(SSA)은 700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작은 스튜디오의 렌트비만 해도 월 750달러. 3년 전 신청한 노인아파트는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하루가 멀다고 노인 아파트 쪽에 연락해 “언제나 입주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 뿐이다. “죽은 다음에나 들어갈 수 있겠다”라고 하면 그 쪽은 어이없는지 헛웃음 소리만 전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그나마 저소득층 아파트 몇 곳에서 연락이 와 가봤지만 렌트비 차이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다 지금 집보다 더 작다. 당장 이사 비용까지 생각하니 이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간신히 시간당 9달러를 받는 간병인 일을 구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마저도 SSA를 받는다는 이유로 월 80시간으로 제한돼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3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몸을 움직여 일할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간병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자동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유일한 낙이다. 회사를 다닐 때 틈틈이 독학으로 컴퓨터를 공부했다. 가장 잘 한 일이다. 드라마도 보고 웹 서핑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한다.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낙이다. 게임을 할 땐 머리 회전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치매 예방이 절로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모니터를 한참 보면 눈이 아프다.
주섬주섬 외출 준비를 한다. 타운 내 마켓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면 운동도 된다. 종종 용돈을 쪼개 장을 본다. 세일하는 품목을 골라 반찬을 만든다.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주말에 교회에 가져가 나눠먹는다.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좀 나아진다.
‘아직 죽지 않았어.’
한인노인 빈곤율 24%
LA의 한인 노인들은 따뜻한 날씨 속에서 골프를 즐기는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보내고 있을까. 찰스 드류 대학(CDU) 연구팀이 LA 지역 65세 이상 인종별 노인 빈곤율을 조사한 결과 한인 노인의 빈곤율은 24%로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히스패닉(18%), 흑인(17%)을 제치고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최성연 남가주정부협의회(SCAG) 프로그램 매니저는 “한인들은 갓 이민 와 타운에 살다가 정착되면 자녀 교육 등을 위해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지금 타운에 남아 사는 사람은 노인이 대부분이다. 노인을 위한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정부 자원을 가져올 수 있지만 정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봉사 단체 등 한인 커뮤니티 자체적인 해결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재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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