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숙의 그림과 글 사이에서.13] 고등어가 있는 밥상
수년 전 맨해튼 스패니시 할렘가에 살 때 이야기다. 돈은 없고 큰 공간이 필요한 가난한 화가의 가족이 살기엔 적당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젊음이 그런 용기를 가졌었구나 생각되고 우리 아이들에게 새삼 미안해지는 그런 험한 동네였다. 그 중심부인 브로드웨이에 한인이 운영하는 큰 생선 가게가 있었다. 화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저녁 지을 시간이 되면 그 가게로 가서 우리 식구들이 좋아하는 고등어를 사러 가게를 메운 흑인들 뒤에 줄을 섰다. 매번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급히 달려가다 보니 내 행색이 궁상스러웠을 것이지만, 그 가게 주인 아저씨는 가게 안쪽에 좀도둑 잡는 높은 의자 위에 앉아서 나를 보면 항상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선풍기를 강하게 틀어놓고도 그 앞에서 성급한 부채질을 하던 그 아저씨는 아마도 한국에서 이민오기 전엔 일류 학교를 나오고 어쩌구 하다가 이민이란 새로운 삶의 도전에서 지쳐 짜증이 많이 나있는, 교포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런 안쓰러운 인상이었다.
어느 날 오후, 또 줄을 서서 그 가게에선 제일 싸구려인 고등어 두 마리를 사는 내 앞에 느닷없이 그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린 이 분은 “에이, 씨..” 하시며 비닐봉투를 하나 들곤 “이런 거두 좀 먹구 살라구, 에이 에이!”하며 왕새우랑 연어 토막들이랑을 막 집어넣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런 동네에 한국 사람 사는 거 보는 것도 신경질 나는데, 매엔날 고등어, 그 눔의 고등어, 에유, 어쩌다 이렇게 살어요?”하며 거의 야단을 치면서 내 손에 고등어 아닌 온갖 진미들이 들어있는 봉투를 쥐어주고는 ‘그냥 가라’고 했다. 얼떨결에 가게에서 쫓기다시피 나와서 집에 걸어오면서, 이게 무슨 눈물겨운 동포애인가, 자기 화풀이였나, 생선 종류를 갖고 남을 판단해버리는 무지인가, 내가 의도치 않게 그에게 상처를 준 거였나,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했다.
그 후론 맛있는 고등어를 사러 가려면 절차가 복잡해졌다.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가다듬고 가서는 고등어 말고 다른 몇 가지를 조금 더 사면서 그 아저씨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그 높은 의자에서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그래 봤자 난 벌써 너 주제를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내려다 보시고.
선풍기 앞에서 급하게 부채질을 하던 그분의 복잡한 속사정 때문에, 아니면 소심했던 나의 반응 때문에, 그 후 우리는 고등어를 많이 못 먹게 되었다. 그 아저씨가 자신을 “나는 좀 눌려 사는, 불쌍한 흑인들에게 싱싱한 생선도 먹이고 돈도 버는 행운아”라고 생각했던들, 아니면, 내가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이상하게 우리 애들은 건방지게도 다른 생선보다 고등어를 제일 좋아한답니다요”하며 너스레로 그분을 웃겨드렸던들, 서로 조금씩만 여유를 가졌어도, 둘 다 행복한 밥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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