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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영어에 가는귀먹다

구자분/ 수필가

먹다먹다 별걸 다 먹어 이젠 가는귀까지 먹고 만 것인가. 틴에이저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처럼 쿵쿵 울려대는 음악을 즐긴 것도 아니었다. 자나깨나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지내는 청소년도 물론 아니며 차가 들썩거릴 만큼 고음으로 노래를 듣는 흑인 애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이어폰을 상시 사용하는 입장도 아니었으니 소음성 난청이 올 리야 없다. 그럼에도 귀에 선뜻 상대의 말이 들어오지를 않는 이 변고. 갑갑하고도 난감한 일이다.

살다 보니 내가 그 짝, 사오정이 따로 없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 들으니 말이다. 남들 다 웃는데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 무슨 소린데? 통역을 의뢰한 다음 뜬금 없이 뒷북치기도 우스운 노릇이고 겸연쩍은 터라 그냥 대충 넘어간다.

이리 지내자니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참 한심스럽다. 결국은 갈데 없이 내가 그만 가는귀먹고 만 꼴이 돼 버렸다. 물론 벌써 노인성 난청에 이른 것도 아니다. 청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말 중에도 오직 영어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나이 들어 미국에 와서 도무지 뚫리지 않는 언어장벽 앞에 전전긍긍해댔다. 10년이 지났건만 어느 세월에 뚫리려나, 그리 나쁜 돌머리는 아닐진대 도무지 영어가 늘지 않는다. 일터에서야 늘 쓰는 기본 대화만 통하면 되니까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되지만 밖에 나오면 완전 꽉 막힌 벽창호가 되고 만다.

홈 그라운드에서는 수년간 안면 익힌 사이들이라 대개 나의 영어 수준을 파악하니 그에 맞게 알아서 쉬운 말만 골라 쓰지만 문 밖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은 나에 대해 백지이니 내 입장을 배려해 줄 리 없다. 하여 나가서 부딪쳐야 하는 세상은 완강한 적지나 다름없다.

미국사람들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빨리 하면 그야말로 돌돌돌돌∼ 말이 굴러간다. 그럴 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신나게 얘기 나누며 저희끼리 박장대소를 해도 나는 멀뚱한 채 겉돌아야 하는 아웃사이더, 국외자다.

누가 일부러 돌려놓으려고 그러는 거라면 아예 먼저 팽 돌아서면 그만이다. 흉을 보는 것도 무안을 주거나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지만 내 쪽에서 알아서 그만 저절로 나가떨어지게 되고 만다. 그 때마다 멋쩍은 혹은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나 솔직히 씁쓸하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한다. 그러면서 번번이 겪는, 무리에서 격리되어 혼자가 되어야 하는 소외감, 단절감, 고립감은 은근 고약스럽다.

영어는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언어라고 한다. 얄팍한 내 실력으로야 언감생심, 완전 절벽으로 까맣게 귀먹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어느 분의 토로처럼 특히 요즘같이 하루 다르게 신조어에 유행어가 생겨나는 판에는 그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하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한인 2세들조차 비록 원어민 영어를 구사할지라도 완벽한 미국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서로의 정서와 문화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듯 나는 김치 없이 못사는 속속들이 한국인이다. Z란 알파벳의 발음조차 나는 여전히 제트, 신나는 마징가 제트다.

하물며 이민 고작 10년차인 내가 무슨 욕심을 부리랴. 그간 따로 노력을 기울여 영어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다 문맹 탈출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 본 적도 없는 내가 아닌가. 결국 감나무 아래서 홍시 떨어지기만 기다려 온 나였다.

이제와 기를 쓰고 끼어 들어가려 해도 그 틈에 끼어 들지 못할 바엔 차라리 백기를 내걸고 이대로 편안히 살고자 한다. 굳이 불편하다고 여기지 말고 안 들리면 안 들리는 대로 가는귀먹은 걸 기꺼이 인정하자.

그 대신 이 상태를 십분 활용해가며 즐겁고 지혜롭게 사는 길을 찾을 밖에는. 음악가의 무기인 청력을 잃고도 명곡을 남긴 베토벤이 있지 않은가. 지난 9월 9일은 귀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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