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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세상]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조성자/시인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전문-

한 편의 시에는 한 권의 소설, 한 편의 영화와 맞먹는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시의 행간에는 함축된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기도 해서 시 속에서의 나무, 하늘, 별 등은 복면을 한 미인의 얼굴 같이 전혀 다른 무엇을 비유하곤 한다.

좋은 시는 천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장르적 특성상 시는 온갖 비유의 집합체이다. 새콤달콤한 미각적 이미지의 청포도를 오브제로 도입해 암울한 조국의 미래를 밝게 겨냥하고 독립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오실 귀한 손님으로 염원하고 있다.

좋은 시는 그래서 무겁지 않다. 이 시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풍경을 징검다리로 놓아 암울한 시대, 밝아 올 독립국가의 평화를 꿈꾸고 있다. 그러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각자 꿈꾸는 이상을 향한 염원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포도 중에서도 청포도는 듣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칠월의 뜨거운 볕에서 익어가는 청포도는 밝고 후련하고 상쾌한 시각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삶이 신산하고 암울할 때일수록 꿈은 더 선명하고 명확해진다.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타국의 감옥에서 외롭게 순국한 시인. 빼앗긴 조국, 잃어버린 고향을 타국에서 바라보는 심정을 시로 승화시켜 놓았다.

포도는 풍요와 축복, 평화와 다산을 상징한다. 특히 기독교에서 포도와 포도주는 각별한 의미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상징해 성찬식 때마다 교인들이 포도주를 마신다. 영원한 생명의 징표이다.

포도의 역사는 약 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포도주에 취한 노아가 벗은 줄도 모르고 잠들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만큼 인류와 더불어 오래 함께해 온 과일 중의 하나이다. 잘 익은 포도가 즙 틀에서 으깨지면서 신의 눈물이라는 포도주를 만들어 낸다. 발효의 과정을 거쳐 한 방울의 성스런 상징이 된다.

포도는 나에게도 친밀감을 주는 과일이다. 나는 고향을 생각할 때면 달착지근한 미각적 이미지가 앞선다. 내 고향 경기도 안성은 포도, 복숭아, 배 산지로 이름이 있다. 특히 한국 최초로 포도가 재배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어릴 적에는 알이 굵은 거봉 포도가 주종이었다. 정렬을 하듯 일렬로 늘어선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소담한 포도송이가 단맛 들어가는 모습은 풍요로운 유년의 정겨운 풍경이다.

포도뿐만 아니라 복숭아나 배 과수원도 많이 있었는데 과일들이 익어갈 때면 온 동네가 단맛으로 북적거리곤 했다. 지금은 포도 종주 고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듯 포도박물관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육사 시인은 만주와 중국으로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길 여러 차례, 광복 한 해 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북경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이육사라는 아호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조국은 경제성장으로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오실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싶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조국을 바라보는 마음은 암울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어떤 연고로 조국을 떠나왔건 우리는 이국땅에서 향일성 식물처럼 태어나서 자란 고장 쪽으로 몸이 기울고 있다. 고향의 풍경은 잘 만들어진 영화처럼 마음의 물결을 일으키게 하는 바람이다.

시각적으로 또는 미각적으로 아니면 후각적으로 다가오는 제 고장의 모습은 우리를 외롭지 않고 당당하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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