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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히로히토의 '인간선언'

박용필/논설고문

일본 왕실과 관련한 금기어 중 하나가 '닌겐센엔'이다. '인간선언'이란 말이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새해 교지를 통해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공개 선언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왕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인간선언'을 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 점령군 사령부는 일왕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한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해 히로히토를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펼쳤다. 치욕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미군의 강압에 결국 굴복한 것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초법적 권위로 절대복종의 명령만을 내리던 일왕이 직접 육성으로 '나도 사람이다'라고 밝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은 '신'의 영어 번역이다. 일본에선 현인신(現人神)과 현어신(現御神)의 두 종류로 분류한다. 전자는 '살아있는 신'이고 후자는 '신으로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원문엔 후자로 표기돼 있다.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나타났듯 일왕도 그렇다는 의미가 강하다.

번역을 맡은 인물은 레지널드 블라이스. 일본인 보다 더 일본화 됐다는 영국인이다. 그가 동양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뜻밖에도 조선이다. 일제강점 시절 경성제국대(현 서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10년 넘게 살았다. 여기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배운 그는 나중에 도쿄에 둥지를 틀었으나 전쟁이 터져 포로수용소에 감금됐다. 적성국 시민이라는 이유에서다.

블라이스는 일본 패망 후 왕실의 '입'으로 신분의 급반전을 이룬다. 히로히토의 신임을 얻어 '닌겐센엔'의 영어번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현어신'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채 어물쩍 신(divine)이라고 옮겨놨다. 일부에선 의도적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현어신'이 뭔지 모를리 없는 그가 연합국 측을 속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파 인사들은 이를 근거로 히로히토의 '인간선언'은 '현어신'을 포기했을 뿐 일왕은 여전히 '현인신'이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에 일본 지도층과 정치권이 광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에이런 라제어는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히로히토도 '인간선언'에서 일본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라고 실토한 바 있는 마당에 사과를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근대역사에서 링컨의 노예제도 사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대인 학살 침묵 사과 리하르트 폰 바이트제커 독일 대통령의 2차 세계대전 만행 사죄는 사과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사과는 관계회복의 열쇠이자 갈등과 위기를 풀어나가는 상생의 소통법 가운데 하나다. 더 이상 약자나 패자의 변명이 아니라 '리더의 언어'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일본이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독일처럼 진솔하게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사과하세요. 늦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이제 일왕이 주변국들의 요구에 반응을 보여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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