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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교회]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권태산 목사/ 하나님의꿈의교회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사람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슨 옷을 입느냐, 어떤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인간은 죄의 노예였다. 죄의 권세 아래 모든 자유를 잃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세상이 이끌고 명령하는 대로 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 주셨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세상의 명령을 듣지 않고 살아도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약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 라는 단어가 124번 나오지만 영어성경 특히 킹제임스에는 오직 2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른 영어 번역들도 노예라는 단어보다 '종''일꾼'(servant)으로 단어가 바뀌어 있다. '노예' 없이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종'과 '노예'는 같은 개념으로 인식되지만 신약성경이 기록된 2000년 전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하는 일이 비슷하지만 '종'과 '노예'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노예 제도가 사라진 17세기부터 오늘날의 현대인들까지 '종'이나 '노예'나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종'과 '노예'라는 단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종'과 '노예'의 차이의 구분이 왜 중요한가? 종은 선택의 자유, 재산 소유권이 있는 사람이다. 누구를 위해 일하고 얼마를 받으며 일할까를 선택할 수 있다. 자유와 권리가 오직 주인에게만 있는 사람이 '노예'이다. '노예'는 움직이는 재산 '동산'이다. 인권이 전혀 없다. 물건이다. 원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의 노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즉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힌 나쁜 이미지 때문에 '노예'라는 단어보다 '종'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식민지 개발이 한창이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노예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사도행전 시절에는 '나는 가이사의 노예이다'라는 말을 흔히 쓰던 시절이었다. 길거리를 보행하는 1/5이 전쟁 노예였으므로 약 1200만 명이 노예였다고 추측된다. 노예는 너무나 흔한 사람들이었고 노예제도 역시 일상적이었다. 사도행전11장에서야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죽기 직전에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의 노예였다가 예수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노예라는 단어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여호수아가 다윗이 엘리야가 히브리어로 노예라는 단어 '에베드'를 써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노예임을 밝혔다.

신약성경에 '주인' 소유주'라는 뜻의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750여 회 등장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교회 다니고 집사 장로로 헌금하고 헌신하는 삶보다 훨씬 더 깊은 개념이다. 우리는 여태 종(Servant)의 개념에서만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닐까.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노예라고 말씀하고 있다. 종의 옷을 입느냐 노예의 옷을 입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노예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주인의 명령에 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없다. 나는 그리스도 앞에서 '종'의 옷을 입고 있는가 아니면 '노예'의 옷을 입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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