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사랑의 자물쇠
뉴욕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가 있다면 서울에는 남산타워 전망대가 있다. 뉴욕의 일상을 떠나 고국방문을 갔었던 이번 여름 남산을 찾았다. 고국을 방문하면 옛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 기억을 되살려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상념에 몰입해 즐기는 묘한 버릇이 있는데 아마도 스쳐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의 몸짓일 게다.부제했던 땅에 돌아가 흘러간 시간의 아득한 간극에 아스라한 괴리감을 깊은 숨으로 토해낸다. 역시, 남산도 많이 변해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8분 정도를 올라가 남산 꼭대기에 내렸다. 멋스러운 성곽 담벽과 통신수단으로 연기를 피워 올렸던 봉긋한 벽돌 봉화대에서 내려다보니 거대한 콘크리트의 서울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단한 발전이다.
봉수대를 내려와 팔각정 광장의 계단을 지나 테라스로 올라가니 담장에는 수 만개의 사랑의 자물쇠가 매달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사랑 빛깔이 다르듯 각양각색의 하트모양 사연을 적어 매달은 자물통 위에는 '우리 사랑 영원히' '헤어지면 안돼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야' '오늘 우리 사랑 시작한 날' 등 수많은 연인이 남겨놓고 간 사연 사연들이 굳건히 닫혀 있었다.
자물통을 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걸어 심지어는 가로등의 갓 위 둥근 쇠고리에까지 걸려있었다. 서울시는 일부는 펜스에 그대로 두고 일부는 조망권과 자물쇠 무게로 인해 펜스가 무너질 우려가 있어 '사랑의 나무'라고 해서 그것들을 한쪽으로 옮겨놓았다. 모든 연인의 사랑의 자물쇠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처럼 치장되어 또 다른 남산의 명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소설 오블리아 디떼 '난 널 원해'에서 사랑하는 두 여인이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자물쇠를 로마 북쪽에 있는 폰테밀리오라는 다리에 걸어놓고 영원히 열을 수 없도록 열쇠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사랑을 맹세한 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하는데 남산에도 사랑의 언약이 맹세가 되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너도 나도, 누구나 갈구하는 사랑의 영원성이 너무 아득하고 애련하고 아름답기도 해서 머리에 현기증이 돌며 속이 울렁거렸다. 우리는 불확실한 가변적인 사랑 앞에, 그리고 한시적인 생 앞에 영원이란 단어를 붙잡고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담장 빼곡히 악을 쓰듯 매달아 놓은 사랑의 자물통 위로 순간 슬픔의 빛깔이 훅하고 지나가는 듯 한데 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거기에 더한 또 다른 의미의 자물통이란 왠지 꽉 막힌 폐쇄적인 느낌으로 숨막히게 목을 죄 오는 것은 어인 일인지.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를 잠가 버릴 때 맹독이 되고 '나만 바라봐'의 절대성 요구에 치명적인 사랑의 파괴를 맛보지 않을까. 우리는 너를 송두리째 다 소유한다고 아우성칠 때 너를 고스란히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숨막히는 사랑의 게임은 꽉 막힌 자물통이 족쇄가 되어 던져버린 열쇠를 찾아 피범벅이 되는 몸부림을 치는 것은 아닌지. 순간, 저 많은 사람의 사랑 맹세가 다 이루어졌을까? 중간에 사랑이 깨지면 저들은 이곳에 다시 찾아와 자물통을 떼어갈 것인가? 엉뚱한 생각에 사랑의 쓴맛을 아는 나의 순수하지 않음이 안타깝다.
사랑. 글쎄, 한때 이곳에 와서 핑크빛 웃음에 빨강하트를 매달고 간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철회하고 각자의 거리를 인정한다면 저들이 채워놓은 사랑의 자물쇠는 어떤 열쇠로도 풀 수 없으리란 생각이 스친다.
사랑하기, 그 찬란한 동사에 몸을 던진 남산타워에 사랑의 자물쇠를 채워놓고 간 그들의 사랑하기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아무리 독약을 마신 것처럼 쓴 밤을 맞이하더라도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메마른 나날을 보내는 것보다는 목숨을 걸고라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영국의 여류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우리는 오직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아 놓은 사랑의 자물쇠 위로 오후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김 애 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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