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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에세이] 프리다 칼로의 죽음


1930년 프리다는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에서 벗어나려고 연방정부에서 가난한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벽화를 그리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리다는 ‘위대한 미술가 디에고의 부인이며 소일 삼아 그림을 그리는 여인’으로 알려져 그녀의 그림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디에고는 무차별한 혼외정사를 계속했다. 이때가 프리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프리다는 미국을 혐오했다. 디에고를 따라나설 때도 마비된 다리로 인해 그의 보폭을 맞추기 힘들었다.
1933년 그들은 멕시코로 돌아왔다. 부부는 모두 방탕한 생활을 했다. 프리다도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소련 혁명가 트로츠키였다. 당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숙청 대상이었고 항상 암살당할 위험에 있었다. 트로츠키와의 애정으로 인해 프리다는 다시 화필을 잡았고 그에게 수많은 자화상을 증정했다. 결국 트로츠키는 암살범에 의해 도끼에 찍혀 죽었다. 그러자 프리다는 태도를 바꾸어 트로츠키는 비겁한 자며 자기 집에 은신했을 때 자기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 아닌 이야기를 퍼트렸다. 또 트로츠키는 건방지고 현학적이며 자신을 무슨 거물이나 되는 듯 여기는 과대망상 환자로 인격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열렬한 스탈린주의자가 되어 그가 수천만 명의 인명을 살해한 뒤에도 그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스탈린과 나’라는 그림을 그렸고 일기장에 ‘스탈린 만세’라는 구절을 적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디에고-칼로 부부가 트로츠키 암살에 관련되었으리라는 의문이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1938년 프리다는 초현실주의 주창자의 하나인 앙드레 브레통을 만났다. 그너는 그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으나 자신은 초현실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다. 31세가 되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개인전을 열고 그림을 팔아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독자적인 미술가로서의 존재를 확립했다.
그녀는 1954년에 폐동맥 경색이란 질환으로 47세 나이로 급사했다. 그 전부터 프리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다리 하나는 '괴저'(Gangrene)로 인해 절단해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자살을 했으리라고 본다. 그녀는 죽기 이틀 전에 일기에 “나는 기쁘게 세상을 하직하려 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사후 거의 30년 간 잊혀 있다가 1963년 한 전기 작가에 의해 조명을 받았고 1991년에 소위 ‘프리다 광증’(Fridamania)을 일으켰다. 여성주의의 영향이 컸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 중에는 멕시코 작가로 노벨상을 받은 옥타비오 파즈가 있다. 그는 그녀를 ‘비열한 개’라고 혹평하면서 그런 화가가 위대한 예술가일수 없다고 말했다. 프리다나 디에고가 스탈린을 너무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찬양의 대상이 아니고 참회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인 비용, 에즈라 파운드, 화가 카라바지오나 고야 등도 한 때 정치적이나 법적 제약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작가적 재능을 배반했지만 위대한 예술가라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술의 명예를 회복해야 했었다고 비판했다.
프리다 칼로의 전기는 2002년 셀마 헤이약 주연으로 ‘프리다’란 영화로 만들어져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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