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속으로] 데모크라시프렙 한국어반을 가다
NY·NJ·CT 2500여 명, 한국어 공부 '삼매경'
전국 1만 명 육박…3명 중 2명은 타민족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안토니오 월턴이에요. 저는 보라색 연필 세 자루가 있어요.”
맨해튼 할렘에 있는 데모크라시프렙 차터스쿨(교장 나타샤 트라이버스, 이하 데모크라시프렙). 9학년 한국어반 대화 발표 수업이 진행된 지난달 29일, 30여 학생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미가 역력했다.
월턴과 크리스토퍼 허트필드가 짝을 지어 평소 연습한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가자 남은 학생들은 그 내용으로 문제를 풀었다. 친구가 소개하는 물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연필’, 색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보라색’이라고 써넣었다.
두 사람씩 조를 이뤄 나오는 팀마다 분홍색 개를 그린 그림부터 초록색 책가방까지 들고 나오는 물건도 다양했다. 책을 들고 나오면 몇 ‘권’, 인형을 들고 나오면 몇 ‘개’로 수량과 단위를 구별했다. 발표를 마치면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서로에게 90도로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들이 잘한다 싶으면 호응도 뜨거웠다. 수업을 담당하는 강리아 교사가 "박수를 치면 다음 친구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하자, 아이들은 핑거 스냅(중지와 엄지를 튕겨 내는 소리)으로 발표를 무사히 마친 친구에게 갈채를 보냈다.
지난해 9월 '가나다라'부터 시작한 아이들은 이제 제법 한국어가 자연스러워져 서로 묻고 대답하는 수준이 됐다.
지나가는 한인들에게는 "안녕하세요" 하고 다가가 인사도 하며 가벼운 대화도 나눈다.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만나는 아이들은 모두 가볍게 목례를 한다. 어른이 지나가면 멈춰서서 배꼽 인사를 한다.
다음 수업 교실로 이동하는 사이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다가온 야분다 콘테는 "한국어가 재밌다. 입학하면 맨 처음 한국어부터 배운다. 예절도 배운다. 3년간 배우면 12학년 때 한국 문화도 배우고 한국도 방문한다. 기대가 된다. 숙제도 하고 연습도 많이 한다"고 한국어로 말했다.
소피 이 프로그램 매니저는 "지난 주 12학년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나가는 한인들에게 한국어로 인사할 때 반응이 뜨거웠다고들 했다. 돌아올 때 집에 오기 싫어 우는 아이도 있었다"며 "한인과 타민족이 섞이지 않아 백지 상태에서 같이 출발하고 열심히 하면 선배나 친구들만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효과를 배가시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에 가서, 세상을 바꾸자’는 모토로 8년 전 설립된 데모크라시프렙은 지난해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당시 졸업생 46명 전원이 두 곳 이상의 대학에 합격하는 성과를 냈다.
이들 대부분이 가정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저소득층 흑인·히스패닉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설립자 세스 앤드류는 이 학교의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한국어 교육을 꼽는다.
이 매니저는 "아이들에게는 대학 가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각 가정에서 겪지 못했던 것들이다. 한국어도 그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강 교사도 "데모크라시프렙 아이들은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졸업할 수 있다"며 "발표 수업을 할 때면 무척 진지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어 교육 현황
공립학교의 한국어 열기는 데모크라시프렙뿐이 아니다. 본지가 한국어진흥재단과 뉴욕한국교육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 초·중·고교에서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는 학교 수가 크게 늘고 있다.
2013~2014학년도 현재 전국 124개, 뉴욕 18개, 뉴저지 4개, 커네티컷 1개 학교에서 한국어반을 운영하고 있다. 뉴욕 일원 한국어반 학생 수는 2500명을 넘어섰다. 전국 한국어반 등록 학생 9876명 중 66%가 타민족이다.
한국어반 개설 추진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띤다. 첫 번째는 데모크라시프렙과 같이 타민족 학생이 대부분인 학교이고, 두 번째는 한인 밀집 지역에서 한인 2·3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2007년 설립된 한국어정규과목추진회 김영덕 회장은 “2·3세 아이들의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한국어를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추진회에서 교사를 양성하고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회장은 “교사를 양성하려고 보니 교사 자격증을 주는 프로그램을 각 대학에 개설해야 했다. 럿거스 뉴저지주립대에 한국어 교사 양성 과정을 신설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어 교사 양성과 보급
데모크라시프렙 강리아 교사 또한 추진회 장학생 출신이다. 그는 “한국 교원 자격증이 있어도 미국 교사 자격증 취득이 필요하고, 미국에서 다른 과목 교사 자격증이 있더라도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별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점이 강점으로 작용한 케이스”라고 말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강리아 교사의 외모는 영락없는 미국인이다. 강 교사는 “7살 때 영국에서 한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한국 초·중·고 공립 교육을 받았다”며 “미국인 남편을 만나 3년 전 미국행을 결정하면서 장점인 이중언어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착실히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대 한국어 강사 양성 과정을 수료했다. 미국으로 오면서 모자란 학점은 뉴욕대에서 시험을 통해 받았다. 이후 럿거스대 교육대학원에서 언어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지난해 데모크라시프렙 교사로 부임했다.
추진회 김 회장은 “한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 사업을 계속하면서 주류사회로 나아갈 목적으로 한국어반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지선 기자 [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