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 목사 칼럼] 세 가지 시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던 날, 그 날은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베드로는 정체가 드러날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추위 때문에 떠날 수 없었던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세 가지 다른 눈을 만납니다.
첫 번째 눈은 어떤 눈입니까? 불가 너머로 베드로를 빤히 쳐다보던 한 계집종의 눈입니다. 이 눈은 어떤 눈입니까? 관찰하는 눈입니다. 상대방을 매섭게 조사하는 눈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이 눈은 베드로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매서운 눈으로, 매의 눈으로 그를 관찰해도 베드로는 뻔뻔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잠시 뒤 베드로는 두 번째 눈을 만납니다. 이번에 만난 눈들은 부인하는 베드로를 의심하는 눈입니다. 어쩌면 경멸하고 정죄하는 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는 네 목숨 살릴려고 스승을 배반하는 그런 사람이구나?”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경멸하는 그 시선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버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날 밤 한 종류의 눈을 더 만납니다. 누구의 눈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드로의 반응이 다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실 때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이 어떤 눈이었을까요? “너라는 놈을 수제자로 둔 게 실망했다”는 눈이었을까요? “나 3일 뒤에 부활하는데 너 나중에 두고보자”는 경고의 눈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 용서와 사랑의 눈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예수 믿는 자들은 넘쳐나도 정작 예수님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관찰하고, 비판하는 매서운 눈도 많고, 정죄하고 경멸하는 눈도 많지만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눈은 참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랑과 이해와 용서의 눈, 베드로를 움직이게 했던 그 눈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새해에 예수님의 그 눈을 사모하며….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