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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순신은 노량해전서 전사했다

[이순신 순국 418주년 기념]
이내원/ 이순신 숭모인

임진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은 조선과 명나라가 야심차게 수립한 일본군 몰아내기 총공세라고 할 수 있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수군에 연패해 군수품 보급노선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 군부는 전면 남하, 남해안을 따라 장기 주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조명 지휘부에서는 네갈래 길로 3개 처의 일본군 본거지를 일제히 공격하여 몰아냄으로써 지루한 임진왜란을 끝장내고자 총공세 작전인 사로병진책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동로(東路)군인 마귀와 김응서는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고, 중로(中路)군인 동일원과 정기룡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를, 가장 서쪽인 순천 신성리 왜교성에 진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육상에서는 유정과 권율이, 해상에서는 진란과 이순신이 동시에 수륙양면공격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럴싸한 작전계획과는 달리 소극적인 명나라 장수들의 태도로 동로군과 중로군이 연달아 패하여 퇴각하자, 서로군의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 공격을 포기하고 남원으로 후퇴함으로써 육상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일하게 수로군만은 이순신의 단호한 결전의지에 진린이 감화돼 10월 2일부터 연합으로 광양만의 묘도와 장도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왜교성을 공격하며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지 않아 고시니는 고립무원의 난처한 입장으로 속을 태우게 된다.

하지만 명나라 수군의 느슨한 봉쇄로 사천의 시마즈 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고니시의 통신선이 빠져나간 것을 뒤늦게 알아 낸 이순신은 대규모 일본 구원군이 오는데 따른 작전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고니시를 봉쇄했던 조명연합 수군은 봉쇄를 풀고 일본 구원군의 진입해로가 될 노량해협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가 동짓달 19일(양력 12월 16일) 한밤중이었다.

노량의 북쪽인 곤양의 죽도에서 대기하던 명나라 수군과 남쪽 관음포 북쪽에서 대기하던 조선 수군이 노량(현 남해대교 지점)을 빠져나오는 약 500척의 일본군 대 선단에게 때마침 불어오는 북서풍을 이용해 불화살을 쏘아 맹렬한 화공을 시작한 때가 새벽 2시 한밤중이었다. 이 1, 2차 기습으로 일본군은 약 200 척의 군선을 잃고 남해도 해안을 따라 도망치기 바쁜 신세가 된다.

관음포 어구에 이르러 조선의 지리에 어둡고 어스름 미명에 시야도 분명치 않았던 일본군은 수평선에 닿을 듯 낮은 지형을 부산 방향으로 가는 열린 해로로 착각하고 관음포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실수를 범한다. 이 의외의 상황에 급히 추격해 온 이순신 수군이 쾌재를 부르며 관음포 어구를 틀어 막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살 길로 알고 관음포 안으로 깊이 들어 간 일본 수군은 곧이어 그 곳이 퇴로가 막힌 호리병 모양의 포구임을 발견하고 대경실색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독 안에 든 쥐는 고양이에게도 덤빈다는 격으로 일본군 지휘부는 결사 백병전으로 입구를 봉쇄한 조선 수군을 돌파해 나오기로 결의하면서 임진 7년 해전 중 가장 치열한 근접 백병 혼전이 전개된다. 이 돌발 상황으로 상승무패의 이순신 표준전법이라고 할 <조총의 사정권 밖 원거리 포격전> 을 쓸 수 없게 된 이순신 대장선은 날이 밝으며 시야를 확보한 일본군의 집중 조총 사격 표적이 되어 나라는 구했으되 자신은 구하지 못하고 장렬한 전사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기록이 말해 주듯이 노량 관음포 해전은 인명피해도 조선 수군의 통제사 이순신을 포함,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의 지휘관과 명나라 수군의 부장 등자룡, 중군 도명제가 전사할 만큼 임진왜란 해전 중 가장 치열한 해전이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을 뒷받침하는 이순신 순국해역의 지형조사는 2005년도 해군 충무공 수련원 제장명 교수와 남해도가 공동으로 실시, 간척 이전 임란 당시의 관음포 해안을 비정함으로써 이순신 전사의 필연성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논거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선비 문사들의 고전적 심정적 이순신 자살론이나 은둔설은 노량해전의 지리환경적 돌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허구임이 명백해 졌다.

정조대왕의 정사인 <충무공 이순신 전서> 나 오늘날의 해군사관학교나 순천향 대학교 이순신 연구소 등 정통 이순신 주류학계의 이순신 전사 학설에 더 이상의 왜곡이 없기를 바란다.



사진: 이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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