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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역사의 무대에는 극본이 없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에서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가 얻을 것은 전세계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팜플렛으로 불리는 <공산당 선언> .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23쪽 분량의 작은 책.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선언에서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공산주의의 정당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제시했다. 잇단 흉작과 대불황으로 빈곤과 굶주림이 유럽을 휩쓸고, 부르주아 지배에 저항하는 혁명이 파리에서 일어나 독일로 번지던 1848년 2월 24일, 런던 거리에 처음 뿌려진 <공산당 선언> 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깊고도 넓다.

정치적 선언문으로서 이 선언만큼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것이 없다. 이 선언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그것이 출간된 모든 나라에서 맹렬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 선언의 성공이 단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번득이는 문장과 박력있고 선동적인 어조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 선언은 아담 스미스의 신세계가 결코 영원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특수한 질서’임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가 인간의 주관적 희망이나 윤리도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발전법칙에 의한 붕괴에 이어 필연적으로 한층 평등하고 풍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선언했다. 공산주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달리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운동법칙 그 자체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뛰어난 천재였고,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매우 치밀한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그도 보통사람들이 그러하듯 자기 시대의 문제에 대해서까지 전적으로 냉정한 태도를 취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예언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의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른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의 예측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는 그가 눈여겨 보지 않았던 러시아와 중국 등 후진국에서 출현하였으며, 그 마저 대부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또 그의 생전에 그토록 갈망했던 ‘새시대의 도래’를 보지 못했으며, 그동안 자본주의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쨌든 붕괴하지 않았다. 서유럽의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 파멸의 위기를 맞았지만,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복당하지는 않았다. 서유럽의 자본가계급과 정부가 비록 선택할 길이 없어서이긴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공산당 선언> 이 묘사한 것과 다르게 행동했다. 결국 서구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궁핍화될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이것이 그의 사상과 이론의 한계다. 어떤 역사이론도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결정짓지는 못한다. 역사는 똑 같은 대본에 따라 수없이 되풀이되는 연극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이 공산주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지만, 서유럽에서는 혁명 대신 개량을, 공산주의 대신 수정자본주의를 낳았다.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상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천재였지만, 그 역시 자기의 시대를 완전히 초월하지는 못했다. 인류의 해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작 사슬에서 해방된 것은 시장자본주의였다. 20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채 100년의 역사가 지나기도 전에 급격히 붕괴되면서 역사의 장으로 퇴장했다.

흔히 지식인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한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사상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오만하다. 특히 계몽시대 이후 성직자 대신 사회적 스승의 자리에 오른 현대의 지식인들은 대담무쌍하게도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그들이 사회적 병리를 진단할 수 있고 자신들만의 지성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세속적 지식인들은 사회구조뿐 아니라 인간의 습관까지도 변형시킬 수 있는 공식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영웅은 신명(神命)을 무시하고 천상의 불을 훔쳐서 인간 세상에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였다.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저술가인 폴 존슨은 “지식인을 경계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만의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20세기 공산주의의 원흉들이 바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권력에서 멀리 떼어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집단적으로 충고하고 행동하려할 때는 특별히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처럼 지적으로 겸손하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신 앞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낮추고, 엘리엇처럼 전통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려는 지식인은 믿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지식인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공산당 선언> 17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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