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의 스포츠카페] 마쓰이 히데키의 '조용한 애국'
박찬호가 막 성적을 내기 시작한 때이니 벌써 15년은 흐른 얘기다. 1996년 박찬호가 시카고 컵스를 상대 빅리그 데뷔 첫승을 따냈을 때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한국 스포츠계의 한 유명칼럼니스트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1승이 한국의 월드컵 축구 1승과 맞먹는다'고 흥분했을 정도였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만 본선만 나가면 주눅이 들던 때였고 메이저리그 역시 우리에겐 신개척지였다. 앞서 박철순이 도전했고 최동원 선동렬도 문을 두드렸지만 한국인에게 빅리그는 감히 넘보지 못할 높은 벽이었다. 최동원 선동렬은 병역문제가 걸려 시원한 도전조차 못해봤지만 어쨌든 미국야구는 우리에겐 '갈 수 없는 나라'쯤이었던 때다.그렇게 첫승을 따낸 박찬호는 2승 3승째를 추가하며 승승장구했다. "한국인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실력 발휘였다.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은 전국민이 TV 수상기 앞에 모였다. 야구를 잘 모르던 사람도 박찬호만큼은 알았고 그의 호투에 환호하고 안타라도 맞으면 하늘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스포츠 신문들은 박찬호가 투구하는 날이든 그렇지 않은 날이든 어떻게 해서든지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정치 사회 뉴스를 톱을 하는 종합지들도 박찬호를 비중있게 다루던 때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어디 박찬호 한 명이 그렇게 오래도록 뉴스의 중심에 설 수 있을까. 처음이니 특별한 면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있었을 터였다. 그래도 담당 기자들은 '박찬호 뉴스'를 생산해 내야 했다. 뉴스의 밸류가 크든 작든 박찬호 이름만 엮으면 곧바로 톱기사가 되던 시절이었다. 딱히 1면 뉴스가 없을 경우라면 데스크는 무조건 박찬호 기사를 요구했다. 지금 와 돌아 보면 너무 심했다 싶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랬다.
오전 회의를 간다 온 데스크는 아니나 다를까 박찬호 기사를 요구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보고해도 소용 없었다. 전화로 박찬호와 에이전트 다저스 구단을 들 쑤셔 봐도 나오는 게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마침 박찬호가 LA 한인상공회소 주최 관련 행사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마감시간 전에 간신히 접할 수 있었다.
미국 정치인들도 일부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박찬호는 외교관'이란 기사를 만들게 됐다. 속내는 그렇지 않았지만 제목은 그럴 듯 했다. 뭐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분명 외교관 10명 아니 수 십명도 해내지 못할 국위선양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최근 LA 에인절스에 마쓰이 히데키란 일본 선수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오렌지카운티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마쓰이라면 이미 뉴욕 양키스에서도 최고 수준의 타자로 활약해 누구나 아는 선수지만 에인절스의 특별한 대접은 전성기 때의 박찬호와 오버랩돼 더욱 관심을 갖게 한다.
일본의 야구영웅을 넘어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마쓰이다. 에인절스는 그런 마쓰이를 위해 배팅오더 작성시 그의 이름을 영문 표기 대신 한자 표기 그대로 적어 넣고 있다. 일본어까지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사용하는 그대로 표기해 준다는 것은 파격적이다.
박찬호도 김병현도 그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다. 그건 시애틀의 스즈키 이치로도 마찬가지다. 마쓰이가 단순히 야구만 잘한다고 해서 에인절스가 그런 대접을 했을까. 팬과 언론을 대하는 마쓰이의 행동거지가 그런 대접을 받게 끔 만들게 한 것은 아닐런지. 이런 애국이 또 어디 있을까. 뛰어난 야구 실력과 바른 행동으로 메이저리그에 조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해내는 마쓰이의 모습에 절로 칭찬과 박수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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