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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엘리트 한인 2세가 전하는 북한

장연화/교육부문 부장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남자’였다. 파이낸싱 플래닝 회사를 경영하며 나름 경제적 성공도 이룬 한인 2세였다. 그런 그가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해 중국 선교를 떠나겠다며 회사를 정리하고 나서자 부모는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북한이 어떤 곳인가. 게다가 탈북자라니. 미국에서 고생하며 키운 아들을 말리기 위해 소리도 질러보고 화도 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렇게 중국으로 훌쩍 떠났다. 마이크 김(33)씨의 이야기다.

지난 6일 한미연합회(KAC) LA지부 주관으로 웨스트LA의 조그만 책방 '자이언트로봇 2'에서 열린 자신의 책 ‘북한탈출기’ 사인회에서였다. 책방에 모인 50여명의 한인 2세들과 아시아계 학생들, 또 파란 눈의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는 중국에서의 4년과 탈북자들의 생활을 생생히 들려줬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벗어난 탈북고아와 탈북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여성들은 매춘부로 전락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팔려갔다. 대낮에 의자에 묶여 있는 탈북 고아의 몸값을 매겨 판다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충격이었다.

“북한에서 탈출했지만 결핵으로 죽어가는 엄마와 생활 때문에 매춘부로 살아가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녀를 제3국가로 보내기 위해 국경 근처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도중에 기력이 다한 엄마는 ‘딸만이라도 구해달라’며 산길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렇게 두고 갈 수가 없어 엄마를 업고 부축하면서 겨우 국경을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살려줘서 고맙다’며 눈물로 인사하던 그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중국여행 도중 방문한 지하교회에서 만난 탈북고아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탈북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미국에 돌아와서도 머리 속에는 탈북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년 동안의 준비를 마친 그는 2003년 편도 항공권과 가방 2개를 들고 북한 국경을 향해 시카고를 떠났다.

북한인이 운영하는 태권도장 수강생으로 들어간 그는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허름한 집에서 침낭 한장에 의지해 바닥에서 자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김씨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에 머물면서 ‘크로싱 보더스(Crossing Borders)'라는 기독교 비정부기관을 설립해 탈북자 지원사업을 펼쳤다.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중국 공안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활동은 주로 점조직으로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갈 곳 없는 탈북자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했고 수백 명을 이웃 국가로 탈출시켰다. 그중 일부는 현재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책 속에는 북한의 현실과 탈북자들의 처참한 생활이 더 생생한 모습으로 기록돼 있다. 또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하면서까지 탈북자 구하기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도 담겨 있다. 반면 이같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도 있다. 김씨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전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탈북자 문제에 더 무관심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정권 퇴진을 이끌어낸 민주화 시위가 리비아에 번져 진행중이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된 이집트는 새 각료를 세우는 등 독재청산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반면 리비아는 무력진압으로 인해 수백 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는 언제쯤 민주화 바람이 불까. 마이크 김의 북한탈출기가 ‘한국의 옛 과거’로 남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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