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생활] 집념으로 일군 이민의 행복
이규인/스프링필드·예비역 해군소령
미국은 내가 선택한 제 2의 조국이기에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사는 한 이 땅의 주인이 되고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시민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투표장에 빠짐없이 나서서 한 표의 주권 행사를 해 왔다.
한때 한국에서 촛불시위로 반미운동이 한창일 때에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모 일간지 오피니언면에 ‘반미운동과 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2003년 4월3일자) 올려 많은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았다. 이런 나의 의견을 영문으로 번역해 당시 우리지역 연방하원이었던 탐 데이비스와 서신으로 의견 교환을 한 적도 있었다.
나의 이민생활은 영어와의 씨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여 년 동안 낮에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매일같이 영어공부를 했다. 영어를 정복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영어와 씨름을 계속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언제인가는 목표를 달성하리라고 굳게 마음먹고 반반세기의 장기간을 계속하여 영어 공부를 해 왔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배워나가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어렵게 외웠던 단어를 잊어버려서 다시 외우고 또 다시 외우고 해야 하는 어려움은 나를 어지간히 괴롭혔다. 차라리 공부하는 그 시간에 돈을 더 벌어서 저축을 해 놓았더라면 그 저축한 돈이 은행에서 이자를 불리고 있을 터인데 외우면 자꾸 잊어버리는 식의 영어와의 씨름에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하는 갈등과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영어를 정복해야 되겠다는 집념에서 나의 영어 공부는 계속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단어를 보면 사전을 찾아가면서 외우고 있다.
특히 영어를 입으로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미국 사람들과 접촉이 쉬운 미국교회를 찾았다. 아내는 계속하여 한국교회에 나갔고 나만 미국교회에 다녔다. 소그룹 성경반에도 등록해 10년 이상 미국 사람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했다. 좋은 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됐고 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고맙게도 이 교회에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고 많은 미국인 성도들로부터 축하를 받기도 했다.
영어가 서투른 아내는 교포가 경영하는 캐리아웃 식당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알링턴에 소재했던 규모가 제법 큰 식당이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걸어 출퇴근을 했다. 주인의 도움을 받아 일년 남짓 식당 일을 하면서 이민생활의 기초 수업을 닦았다. 어려운 과정을 여러 차례 넘기게 되는데 한번은 다른 종업원으로부터 따귀를 얻어맞는 수모까지 겪는다. 아내는 그 사건을 지금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때의 그 사건이 큰 충격으로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후에 아내는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집 근처 맥도널드로 직장을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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