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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가작…25초 간의 걸음마

이필순

이른 새벽잠이 깼다. 다시 잠을 청하려다 연적에 물을 채우고 먹을 간다. 방 안 가득 번져가는 먹향. 화선지를 펼쳐 놓는다.

硏露題詩潔
이슬로 먹을 갈아 시를 정결하게 쓰고
消氷煮茶香
얼음을 녹여 차를 향기롭게 끓인다

당나라 시인 요합(姚合)의 시구가 마음에 든다. 이슬을 받아 먹을 간다는 옛 선인들의 풍류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화선지 위로 붓을 들어 호흡을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새기듯이 써보지만 붓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화선지 이십여 장을 허비하고 그 중 나은 것으로 골라 낙관을 찍었다. 뻐근한 어깨와 허리를 펴면서 창밖을 본다. 어제 밤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이 제법 많이 쌓였다. 이른 아침 산책 나온 강아지가 앞서가는 주인을 충직하게 따라간다. 점점이 생겨나는 발자국이 공들여 찍은 낙관처럼 선명하다.

두어 해 전에 내가 사는 시애틀에 많은 눈이 내렸다. 30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라고 했다. 마침 그 때 친구의 초대를 받은 나는 눈길에 자동차를 운전할 엄두가 나지않아 아들에게 부탁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보니 정원의 잔디밭과 보도의 구분이 사라지고 포근한 목화 이불을 덮은 듯했다. 차고에서 미리 내다 세워 둔 아들의 차까지는 15미터쯤 될까. 높낮이의 구분이 안 되는 눈길은 무릎까지 빠질 것 같아 머뭇거렸다.

"엄마 제 손을 잡고 발자국을 따라 걸으세요."

반백이 된 아들이 아직도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언제 들어도 정답고 포근한 말이다. 아들은 체격도 좋지만 유난히 손발이 크다. 키가 작은 나는 그 넓은 보폭을 따라 걷기가 힘들었다.

"보폭을 좀 줄여다오."

"예"

싱긋 웃으면서 뚜벅뚜벅 걸어 가는 아들의 발자국은 눈 속에 준비해둔 빈 장화가 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눈 장화 속에 내 발을 넣었다. 아들의 커다란 손을 잡고 한걸음씩 차 앞으로 갔다. 아들과 함께 걸어간 시간이 25초쯤 되었을까. 뒤 돌아보니 두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이 한 줄이다. 순간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오르면서 울대뼈가 떨려왔다.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았다. 내 눈에 맺힌 이슬을 보았을까 이번에는 아들이 나를 꼬옥 안았다. 가슴에 닿은 아들의 온기가 온몸에 번져왔다.

아들의 훈기 속에서 잊혀진 줄 알았던 남편을 보았다. 내게만 보여주던 선하고 장난기 어린 웃음. 그의 짙은 그림자를 떨치려고 이 먼 미국 땅으로 도망치듯 왔는데…

아련히 떠오르는 남편의 모습을 딛고 살아나는 생생한 기억들. 겨울 나들이로 꽁꽁 언 내 손은 언제나 남편의 외투 주머니 속으로 붙잡혀 들어갔다. 그 큰 손은 내 작은 손을 주물러 녹여주곤 했다. 화롯불이 따로 없었다. 마냥 따스하고 행복했다. 그는 작은 일에도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려고 애썼다. 그런 남편의 베풂을 아내가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세상의 모든 아내가 으레 받는 대우라고 알았다. 허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말 없는 남편의 소박하고 절절한 사랑이었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남편은 이미 내 곁을 떠나고 없었다. 남편과 함께 한 50년의 세월이 아들과 눈 장화를 신고 걸었던 25초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산통 끝에 만난 첫 아들을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받아 안았다. 그 순간 품 안에서 꼬물대던 여린 감촉이 너무나 황홀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태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 수줍음과 설레임으로 가슴을 열고 초유를 주기 위해 젖꼭지를 물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의 가슴에 생명의 젖샘이 있다는 것을. 눈을 감고도 유두를 찾아 빨아 대는 힘이 어찌나 센지 내 안의 모든 것이 빨려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힘 새 생명과의 만남이로구나. 가슴이 뭉클했다.

아기가 첫돌을 지나면서 걸음마를 시작했다. 나를 향해 첫발을 떼며 비틀거린다. 넘어질세라 얼른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킨다. 힘에 부쳤는지 엉덩이를 빼며 털썩 주저앉는다. 이번에는 조그만 발을 내 발등 위에 포개고 둘이 한 몸이 되어 걸음마를 한다. 그렇게 걸음마를 배운 아이는 어른이 되어 제 분야에서 제 몫을 다하고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오랫동안 못 보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마음을 달래면서도 어쩐지 쓸쓸해지기도 한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천명(知天命)의 아들.

함박눈이 내리는 날 우리 모자는 25초라는 시간 안에서 다시 한 몸이 되어 눈 속을 걸었다. 첫 걸음마를 하면서 내 발등 위에 포개졌던 조그만 발이 아닌듬직하고 투박한 발. 아들과 함께 걸은 25초가 어찌 남편과 함께 지낸 반세기의 시간 16억 여 초에 비기랴.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에 남편을 보았고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나를 만났다. 힘이 빠져가는 내 회한의 얼굴 또한 만났다. 그래서인지 아들과 함께 눈 속을 걸은 25초의 걸음마는 내게 기쁨과 가슴 벅찬 감동으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요즘 들어 자주 찬바람이 어깨를 시리게 하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한기를 느끼게 한다. 밤잠도 짧아졌다. 긴 밤을 벗삼아 나도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아들의 듬직하고 투박한 발로 눈을 다져
큼직한 눈장화를 만들었네
작아진 어미 발을 감싸안고
눈길 나들이를 함께 하였네

졸작인줄 알면서도 붓을 놓고 낙관을 공들여 찍었다. 내 서필에 찍힌 낙관이 아들 딸 손자 손녀들에게 각인되기를 소망하면서.

이제 내가 바라보고 갈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그 크신 발자국을 따라가는 길. 그 길의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향기롭게 살고 싶다.

눈이 녹고 새봄이 되면 들판에는 새싹들이 돋아날 것이다. 마치 내 아이들이 새 세상을 향한 꿈을 펼쳐 나가듯이.

수상 소감

"삶의 새로운 지평 열리는 계기"
'중앙 신인 문학상' 수상자 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낭보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국문학을 전공 했으면서도 글 쓰는데 인색했고 '문학상' 에 도전해 보겠다는 열정도 없었습니다. 그저 수필이 좋고 시가 좋아서 가리지 않고 읽으며 마음 내키면 습작 삼아 조금씩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고 있는 시애틀 형제실버대학에서 6년 동안 문학공부를 하면서 "글이 참 좋아요 계속 써보세요" 늘 따뜻하게 이끌어 주신 수필가 김학인 학장님 습작수필을 꼼꼼하게 지적하며 언제나 친절하게 조언해주신 수필가 김윤선 선생님 문학개론을 담당하고 동아리지도를 통해 많은 정보를 주신 시인 정혜영 선생님의 적극적인 격려에 힘입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앉으니 닫혔던 글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살아나는 의욕과 열정으로 긴장감이 생겼습니다.
이번에 인지도 높은 중앙일보 '문학상'에서 영광스럽게 수필부문 가작으로 당선된 것은 제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깊은 성찰로 백지 위에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쓰며 부끄럽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려 가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세 분 선생님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문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 기쁨을 나눕니다.
이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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