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그레이 칼럼] 정의의 여신(Lady Justice)
영그레이, 앨러배마 거주
앨라바마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부모와 금전관계로 갈등을 빚은 아들부부가 그들의 아이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을 금지시켰다. 노 부부는 앨라바마 법에 호소해서 방문 권리를 얻은 후 보고싶던 손자손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부부가 법원에 노부부가 얻은 방문 권리를 취소시켜 달라고 항소했다. 결국 이 사건은 앨라바마 대법원의 안건이 되었다.
이번에 앨라바마 대법원 판사들이 7대 2의 결정으로 아들부부의 편을 들었다. 미국 가정의 핵심요소는 부부와 아이들이라면서, 아이들에 관해서는 부모의 결정이 우선이며 그것은 합법이라고 했다. 이같은 부모의 권리에 정부나 주법이 관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대부분 공화당인 대법원 판사들이 아들부부의 권리를 보장해 주면서 구약성서를 거론하고, 한 가족의 단위가 서양사회의 핵심요소임을 새삼 강조했다. 정의의 여신은 냉정했다.
여러 세대가 한 집에 화목하게 사는 대가족 제도가 미덕인 유교사상에 젖어서 자란 나에게 이번 판결은 동양과 서양의 근본적인 정감 차이를 느끼게 했다. 정신적인 결함이 없는 부모라면, 그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에 가지는 절대적인 권한을 법으로 보호해 주는 것은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부모와 장성한 자식들 갈등사이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한 다리 건너 직계 가족관계의 파괴에 우울해진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 성장하는 아이들은 조부모들로부터 부모와는 다른 사랑과 인간관계의 조화를 배운다. 그 관계가 부모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단절되었을 때, 아이들이 입을 상처는 오히려 노부부가 얻는 상처보다 더 클 수도 있고 또 장기적인 후유증을 가질 수도 있다. 심리학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건 이해하게 된다.
법적인 투쟁으로 서로의 불만을 외부에 털어놓은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꼭 이집의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주변에서 흔히 듣는 가정불화다. 대부분의 경우가 역시 가족간의 금전문제가 이해문제로 확대되면서 남남으로 냉정해져 버리는 관계들이다. 만약 이것이 한인가정의 일이라면, 조부모는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해진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라 손자손녀가 보고 싶더라도 남의 이목을 고려해서 법정에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을것 같다.
내가 아는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의 유산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으려고 움켜쥔 장남부부는 훈계한 어머니와 인연을 끊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만 아니라 삐뚤어진 심리로 노모와 형제를 버린채 자기네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놀부네로 변했다. 자연히 손자나 증손자 손녀와도 인연이 끊어져 버렸다. 이제 나이들고 병이 든 노모는 자손들이 보고싶지만 오랜 세월 연락없는 아들네의 무정함을 속으로 삭이고 산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부모를 버리고 잘 되는 사람을 본적이 없는것 같다. 성경의 십계명에도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다. 그리고 인륜은 천륜이라고 했다. 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눈앞의 재물에 어두워 거스리며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 탓에 우리 사회가 각박해진 것 같다. 더불어 사람관계에서 가장 중심인 감정(compassion)이 많이 희박해져 버렸다. 대법원까지 가면서 법정투쟁을 벌려서 노부모와 자식들의 인연을 끊은 아들부부의 마음이 변하는 기적을 바라고 싶다. 그것은 정의의 여신(Lady Justice) 영역 밖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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